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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장편소설 디누 1부 18화 미우누나 1

by 권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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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겨울방학이 다가왔다. 나도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기다리는 이유는 전혀 달랐다.

방학 때 국기원 도서관에 가서 책 읽을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국기원 도서관은 당시 몇 안 되는 개가식 서가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최상의 놀이터였다. 정우에게 같이 다니자고 했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쾌히 승낙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도서관 아홉시에 문 여니까, 여덟 시 전에 우리 집에 와. 피아노 연습도 좀 하고 그러다 도서관 가자. 걸어서 15분이면 가니까.”

왜 마다하겠는가?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케이” 했다. 그리고 달력에 날마다 X표를 그려 넣으면서 방학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내가 정우랑 같이 도서관에 공부하러 간다고 하자 둘이서 밥을 사 먹고도 한참 남을 정도의 돈을 점심 값이라며 챙겨 주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가관이었다.

“정우랑 같이 공부하면, 정우가 너 보다 더 많이 공부하지는 않을 것 아니니?”

어머니는 아직 경쟁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학교 공부만큼은 정우를 현저히 앞서고 있었다. 정우는 학급에서 2등, 3등을 오가고 있었고, 나는 반 등수 따위는 관심 없고 전교 3~6등을 오가는 위치였으니 말이다. 아무리 머리 좋은 정우라도 취리히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학업성적까지 유지하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정우 어머니가 여전히 전교 1,2등 한다고 허풍을 떨었던 모양이다. 어머니 뇌리에는 내가 겨우 전교 5등을 맴 돌 때 전교 2등쯤 하는 정우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었다.

어쨌건 나는 방학의 첫날이 밝자마자 전투적으로 아침 식사를 해치우고 정우네 집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데 초인종을 누르려고 하는 순간, 문이 활짝 열렸다.

내가 온 걸 봤나? 이런 생각을 하려는 찰라 잘 차려 입고 집을 나서는 정우와 정우 어머니가 문 밖으로 튀어나왔다. 제대로 차려 입은 저 복장은, 그들이 날 맞이하려고 문을 연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어.”

나는 당황하여 아무 의미 없는 감탄사를 뱉었다.

“어.”

정우도 감탄사로 화답했다.

“어, 어디 가?”

“응. 그런데 웬일이야?”

“방학 첫 날이잖아? 방학 첫 날 도서관 같이 가기로 하지 않았어?”

“아, 맞다! 그런데 그 첫날이 오늘이야?”

정우가 다시 씩씩한 말투와 모습을 되찾으며 말했다.

“그럼 언젠데?”

“미안. 난 내일부턴 줄 알았어.”

“뭔 소리야?”

“오늘은 그냥 일요일이잖아? 방학은 내일부터고. 오늘은 엄마랑 성당이랑 또 어디 좀 다녀와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하지만 어제 방학식 했잖아?”

“일요일은 어차피 방학 아니라도 학교 안가는 날이잖아?”

방학식이 토요일이라 빚어진 해석상의 혼란이었다. 우린 서로 난감했다.

“너들” 정우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오늘 만나서 뭐 할 일 있었나?”

“피아노 같이 치고, 도서관에 가서 책 읽으려고 했어요.”

“아, 그래?” 정우 어머니가 손을 저었다. “그럼 오석이는 그냥 들어와서 피아노 치고 있그래이. 우린 점심 전에 일 다 보고 올 거니까, 그럼 같이 점심 먹고 그러고 가라. 어이?”

“그래. 그게 좋겠다. 집에 들어가서 피아노 치면서 기다려. 점심 전에 들어올게.”

정우도 거들었다.

내 생각도 그랬다. 나는 마치 정우와 교대라도 하듯 정우가 아파트 계단을 통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정우네 집으로 들어갔다.

정우가 다시 오려면 몇 시간 있어야 했지만 아무 문제없었다. 정우네는 반나절 정도 시간 보내는 건 문제도 아닐 만큼 재미난 것들이 넘쳐났으니까. 피아노도 있고, 오디오도 있고, 책도 있고. 오히려 시간이 모자랐으면 모자랐지, 할 일이 없지는 않았다.

자, 그럼, 피아노 먼저.

정우 방에 들어갔다. 내 피아노처럼 익숙해진 정우 피아노가 나를 반겼다.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피아노 뚜껑을 열고 모차르트 소나타 악보를 얹었다. 그리고 잠시 손가락을 주무른 다음 정우가 가르쳐 준 것들을 떠올리며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K.333번 B플랫 장조를 연주했다.

정우가 뛰어난 음악 교사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몇 달 사이에 내 솜씨가 이렇게 엄청나게 늘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이거 정말 내가 치고 있는 게 맞아?’ 하며 내 솜씨에 내가 놀라기도 했다. 손가락 쓰는 법 조금 고쳤을 뿐인데, 몇달 전에 그토록 어려웠던 곡이 제법 그럴듯한 소리를 내었다.

그때 갑자기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공기를 흔들며 나의 모차르트 연주를 뚫고 귀에 꽂혔다.

“디누! 나 어제 늦게 잤단 말이야. 아침부터 꼭 그래야겠어? 오늘 일요일이잖아?”

아차! 순간 정우네 집에 정우만 사는 것이 아니라 미우도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늦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늦잠을 자지 않을 것이라는 유아적 사고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일어나서 여기까지 왔으니 미우도 당연히 일어나서 어딘가 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미우는 일요일 늦잠을 자고 있었고, 내가 누나의 방학 첫날 혹은 일요일 아침의 여유를 깨뜨렸던 것이다.

조용히 건반에서 손을 내리고 피아노에서 물러나려는데, 방문이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니, 그런다고 하던 걸 멈춰? 뭐야, 너 답지 않게. 그냥 하던 거 계속해. 내가 들어줄 게. 근데 오늘따라 연주가 형편없다. 뭐지? 새로운 해석이야? 아니면 컨디션 망조야? 그래서야 취리히 예선이나 통과하겠어?”

아까보다 한결 가라앉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감히 뒤로 돌아서지 못하고 그대로 덜덜 떨며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몸이 떨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니, 이유를 따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머, 디누가 아니네?”

그제서야 미우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정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뜻밖에도 놀라거나 소리 지르지도 않았다. 달걀 프라이가 아니라 소세지 볶음이네 하는 정도의 톤이었다.

미우의 침착한 반응 덕에 용기를 되찾은 나는 조용히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아, 오석이구나?”

미우는 단번에 나를 알아보았다. 내 얼굴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나? 몇 년 만에 처음 보는데 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잠시 우쭐했지만, 미우는 “안 그래도 네가 우리 집에 매일 온다고 들었는데, 꼭 나만 오면 가고 없는 거야. 많이 서운했는데, 이렇게 보네?” 라고 말하면서 우쭐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는 감히 고개를 들어 미우를 볼 수 없었다. 미우는 잠에서 방금 일어난 차림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공단 같은 재질로 보이는 파란색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스커트가 무릎보다 상당히 많이 위에서 끝났기 때문에 하얀 다리가 훤하게 드러났다. 여름에 물들였을 봉숭아 물이 아직도 발톱에 남아 액센트를 주고 있었고 중학생 때 보다 한결 여성스러워진 가슴의 굴곡까지 눈에 들어왔다. 철들고 나서 젊은 여성의 살이 그렇게 많이 드러난 것은 처음 보았다.

나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잠시 나무처럼 굳어 있다 간신히 걸음을 옮겨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더욱 당황스럽게도 미우가 내가 앉은 바로 맞은편 소파에 슬쩍 올라앉았다. 서로의 얼굴이 바로 앞에 마주 보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미우 눈에 내가 남자가 아닌 다만 어린아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몰랐다.

“계속 쳐 봐. 누나가 들어 줄게.”

“아, 아뇨. 오늘은 그만 할래요.”

“정우는?”

“미사 갔어요. 그런데 누나는 안가요?”

“뭐 됐어. 미사야 몇 번쯤 안가도 예수님이 삐지진 않으니까. 아 참, 이러면 되겠다.”

미우가 다시 팔짝 몸을 일으키더니 가벼운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잠깐만 기다려.”

나는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억지로 눌렀다. 목덜미와 뺨에서 화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누나와 함께 사는 정우가 부러워졌다.

“자 준비됐어.”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미우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잠옷 차림이 아니었다. 목둘레가 라운드로 처리된 편안한 스웨터와 물이 약간 빠진 데님 소재의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손에는 바이올린 케이스가 덜렁덜렁 들려 있었다.

미우가 케이스를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뉘어 놓은 다음 딸깍 소리를 내며 뚜껑을 열었다. 암적색 도료가 칠해진 아주 낡은 바이올린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와, 악기가 무척 낡았어요.”

바이올린에 대해 잘 모르던 나는 이런 한심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하지만 미우는 그런 말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조용히 “피아노 앞에 앉아서 A5 쳐 봐.” 라고 한 마디 던질 뿐이었다.

“아, 네.”

나는 마치 어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펄쩍 일어나 피아노 뚜껑을 다시 열고 A5 건반을 눌렀다. 그러자 미우가 그 소리에 맞춰 화현을 몇 차례 긁으면서 음을 조율했다.

단지 5도 화음으로 화현 두어 번 했을 뿐이지만 나는 그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입을 반쯤 벌린 채 귀를 기울여야 했다. 흔히 말하는 바이올린의 꺼억 하는 마찰음은 전혀 섞이지 않았고, 작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힘차게 뻗어 귀에 세차게 꽂히고, 그러면서도 거칠지 않은 그런 소리였다.

“바이올린 소리 들을 줄 아네?”

내가 소리에 반응하는 것을 알아차린 미우가 활짝 웃었다.

“튜닝 소리에 그렇게 감동할 줄 몰랐는 걸? 바이올린 소리가 좋은가 봐?”

“좋아해요.”

“그래? 제일 좋아하는 곡은?”

“크로이쳐 소나타요.”

나는 모기 장 밖으로 멀어져 가는 모기 같은 소리로 간신히 말을 꺼내었다. 누구 때문에 크로이쳐 소나타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음. 나도 크로이처 소나타 아주 좋아해. 그럼.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는?”

미우는 3년 전, 내 앞에서 크로이쳐 소나타 연주했던 일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수많은 연습들 중 하나였을 뿐이고, 하필 그때 내가 있었을 뿐이니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까닭이 없었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랑 아이작 스턴이요.”

“그래?”

표정을 보아하니 미우는 내 대답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구술 시험에서 오답을 말한 수험생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집에 있는 바이올린 곡 음반들은 거의 대부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아니면 아이작 스턴이 연주한 것들이었고, 내가 듣기에 그 연주들은 무척 훌륭했기 때문이다.

“자, 우리 재미있는 거 해 보자. 우선 피아노에 앉아.”

정작 미우는 아까의 싸한 반응을 벌써 씻었다. 어쩌면 나 스스로 미우의 반응을 보고 초조해 했는지도 몰랐다.

“네.”

나는 주섬주섬 피아노에 앉아서 건반에 손을 얹었다.

“아까 하던 거 다시 해 봐. K.333번 소나타 연주하고 있었지?”

“네.”

“그럼 1악장 시작.”

누구 명이라고 감히 거역하겠는가? 나는 숨을 두어 번 숨을 들이 내쉰 다음 모차르트 소나타를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때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살짝 곁눈질을 돌려 보니 바로 옆에서 미우가 바이올린으로 앙상블을 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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