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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장편소설 디누 1부 17화 사춘기 디누 3

by 권재원

3

정우네 집은 정말 가까웠다. 학교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있는 ‘레인보우 아파트’ 였으니.

그때만 해도 우리 집이 있던 도곡동보다 서초동 집값이 더 비쌌다. 지금도 그런가? 하여튼 그 때는 서초동 아이들이 도곡동 아이들에게 콧대를 잔뜩 세우곤 했다. 그 중 가장 콧대 높은 녀석들이 바로 저 레인보우 녀석들이었다.

잠실 살 때와 마찬가지로 정우네는 여전히 잘 사는 모양이었다.

“자 들어와.”

집에 아무도 없는지 정우가 직접 열쇠로 문을 열어 주었다.

정우네 집은 우리 집보다 넓었다. 대략 50 평 정도 되어 보였다. 거실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바로크 스타일의 가구들이 장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잠실에서 봤던 레코드 판들이 보이지 않았다.

“판들은?”

“아, 그건 내 방에. 이리 와.”

정우가 방문을 열고 드넓은 자기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게 네 방이라고?”

깜짝 놀랐다.

방이 어찌나 넓은지 책상과 침대, 그리고 피아노를 놓고도 자리가 남았다. 그 자리에는 태국풍 조각으로 장식된 나무 탁자와 소파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책들로 가득한 책장, 오디오, 그리고 잠실 시절보다 수백 장 더 늘어난 레코드 판들이 벽 하나를 거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와, 레코드 가게 온 것 같다.”

“그 동안 공부하느라 판을 많이 샀어. 자, 이거 봐.”

그가 피아노 위에 얹혀 있던 악보 책을 탁 접어서 나한테 내 밀었다. 표지에는 ‘Mozart Klavier Sonaten Vol. 2.’ 라고 적혀 있었고, 모차르트 소나타 11번에서부터 19번까지 수록되어 있었다. 악보에는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아니, 악보 마디 하나마다 빈 공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메모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메모 내용이 이상했다. 나도 피아노를 꽤 배웠기 때문에 정우처럼 연주할 수는 없어도 음악용어와 악전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정우가 빽빽하게 적어 놓은 메모들은 아무리 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DLB, GA, FG1, CE, IH, KH, AdL, LK/ WG/ DK... 하나 같이 난생 처음 보는 기호들이었다.

이 괴상한 기호들과 함께 이런 식의 메모들이 적혀 있었다.

“DLB에서 조금 맑게 CWG풍으로…”

이런 종류의 메모들이 어찌나 많이 적혀 있는지 심지어 어떤 페이지는 원래 악보를 읽기 힘들 정도였다.

“이게 무슨 뜻이야? 내가 모르는 음악 용어야?”

“아, 그거?” 정우가 콧구멍과 입술로 공기를 내 뿜었다. “그건 나만 알고 있는 기호야. 음악 용어가 아니라. 대가들의 모차르트 소나타 연주를 들어보고, 어떤 부분을 취할지 정리해 본 거야. 말하자면 그 분들이 내 레슨 선생님인 셈이지. 큭큭.”

그러더니 정우가 연필을 들고 종이 위에서 한바탕 춤을 추었다.

DLB=디누 리파티의 브장송 연주/ GA=게자 안다/ FG1=프리드리히 굴다의 첫번째 녹음/ CE=크리스토프 에셴바흐/ IH=잉그리드 해블러/ KH=클라라 하스킬/ LK=릴리 클라우스/ AdL=알리치아 데 라로챠/ WG=발터 기제킹

그건 모두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의 이니셜이었다.

“아니, 그럼 너 설마 모차르트 소나타 음반을 이렇게나 많이 들었다고?”

“이거 말고도 더 있어. 들어보고 던져버린 판들도 있으니까. 예를 들면 다니엘 바렌보임, 크리스티안 치머만,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는 탈락. 이래저래 소나타 음반만 100장도 넘게 구했어. 협주곡도 마찬가지고.”

“그걸 전부 악보랑 맞춰가면서 다 들었어?”

“그럼. 같은 곡이라도 연주자 마다 조금씩 다르거든. 그 조금씩은 직접 들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고. 그래서 악보에 메모해 가면서 들었어. 디누 리파티는 이 부분을 이렇게 처리했는데, 프리드리히 굴다는 이렇게 했고, 클라라 하스킬은 저렇게 하고… 이런 식으로. 그러고 나니 꼭 여러 대가들의 레슨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

“그럼 여기 DK라는 글자 뒤에 나오는 메모는? 이건 누구야?”

“그건 Dinu Kwon, 나야. 다른 대가들이 이 부분을 이렇게 저렇게 연주했는데, 나는 이걸 이렇게 하겠다 결론을 내린 거지.”

“소나타 19곡에 전부 다 이렇게 메모한 거야?”

“응. 소나타 19곡하고 협주곡 5번부터 27번까지 스물 세 곡도. 처음에는 혼자 악보 보면서 연습했는데, 너무 지루한 거야. 아무리 연습해도 맨날 거기서 거긴데다 음악은 지루하고. 심지어 연주하면서 졸기까지 했다니까. 베토벤이나 쇼팽은 막 느낌이 있잖아? 신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그런데 모차르트는 이거 뭐 이래 이런 생각이 들었어. 뻔하고, 단순하고, 지루하고, 하품 나고. 이건 그냥 동요 수준의 노래일 뿐이라고. 이런 건방진 생각도 했어. 그러다 우연히 이걸 듣게 되었어.”

정우가 나도 아주 좋아하는 음반인 크리스토프 에셴바하가 연주한 7장짜리 모차르트 소나타 박스세트를 꺼내 들고 말을 계속했다.

“여기에 완전히 다른 세계가 들어 있었어. 단순하지도 뻔하지도 않았어. 와, 이걸 들어보니까 모차르트의 소나타는 여백이 많은, 그런데 그 여백이 너무 멋있는 그림이더라고. 있잖아? 우리나라 수묵화 같은 거? 너도 서예 학원 다녔으니까 알지? 서예를 흔히 글씨를 쓰는 게 아니라 여백을 그린다고 하잖아?”

“어떤 느낌인지 알겠어.”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정우가 말을 꺼내기 전에는 내가 서예 학원 다녔던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물론 붓글씨를 쓰면서 검게 먹칠 된 부분보다 훨씬 더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하얀 종이부분을 미적 형상이라고 느낀 적도 없었고.

“그 여백은 말이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정우는 자기 이야기를 계속했다. 국민 학교 때는 피아노를 참 잘 치는 아이였는데, 이제는 피아노에 대해 말도 참 잘 하는 소년이 되어 있었다.

“여백은 단지 먹이 칠해지지 않은 부분이 아니야. 오히려 그게 그림인거야. 화선지에 먹이 들어간 부분이 아니라 칠해지지 않은 하얀 부분이 만들어내는 형상, 그게 그림인 거야. 붓으로 종이에다가 선을 그을 때는 실제로는 그 선이 그어짐으로써 남게 되는 여백을 그리는 거라고.”

“그런데, 솔직히 난 아직도 연결이 안 돼. 수묵화와 소나타.”

“잘 봐. 얼마나 빽빽한지.”

정우가 악보 책 하나를 들이 밀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음표가 빽빽하게 적혀있는 리스트의 ‘초절 기교 연습곡’이었다. 그리고 정우는 다시 모차르트 소나타 악보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걸 봐.”

과연 리스트 악보에 비하면 모차르트는 악보가 거의 텅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과연 이 몇 개 안 되는 음표로 내는 소리로 만족했을까? 이게 모차르트 머릿속에 있었던 생각 전부일까? 모차르트는 정말 이만큼만 연주했을까?”

정우의 강의가 계속되었다. 마침내 정우는 거의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것은 대화도 강의도 아닌 독백이었다.

“천만에! 모차르트가 원래 머릿속에 담고 있었던 곡은 이것보다 훨씬 복잡할 텐데, 아마추어들이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화시키고 생략한 것이 바로 이 악보란 말이지. 그때는 레코드 판이 없었으니 악보를 팔아야 했거든. 물론 이 중 몇몇 곡은 실제 모차르트 본인이 연주회에서 연주하기도 했어. 하지만 이 악보 대로는 아니었지. 그렇다면 이렇게 생략된 악보를 가지고 어떻게 모차르트가 원래 생각했던 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함부로 악보를 바꾸거나 악보에 없는 음들을 마구 집어넣을 수도 없고. 이게 내 고민이었어.”

“그게 가능하기는 해?”

“물론이지. 내 해법은 이거야. 악보에 나와 있는 음만 연주하되, 그 소리 하나하나를 아주 섬세하고 다양하게 연주하자. 똑 같은 음표를 보고 건반을 누르더라도 모두 다르게 터치하자. 건반을 내리 치고, 끊어내고, 지그시 누르고, 가볍게 두드리고, 스치듯 어루만지고… 모차르트는 이런 것들을 전혀 표시하지 않았어. 모차르트 악보는 그림으로 치면 어디가 선이고 어디가 여백인지 표시한 거야. 그렇다면 이 여백은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연주자 자신의 느낌으로. 섬세하고 풍부하게 채울까, 아니면 담백하게 여백을 그대로 비워두고 선에 집중할까? 이런 게 다 연주자의 과제란 말이지. 아, 잠깐. 나 물 좀 먹고.”

한바탕 강의를 하다 보니 정우의 목소리가 텁텁해졌다. 하지만 잠시 나가서 물 한잔을 마시고 돌아온 정우는 다시 깨끗해진 목소리로 강의를 계속했다.

“그렇다고 연주자가 자기 느낌 가는 대로 멋대로 연주해도 될까? 글렌 굴드가 그렇게 연주했지. 그리고 결과는? 망했어!. 모차르트가 생각한 최상의 연주는 분명 있어. 그런데 이 사람은 그걸 어디에도 기록해 두지 않고 자기 머리 속에만 담아두고 있다가 아무 한테도 말해주지 않고 하늘로 갔어. 그걸 찾아내는 거, 이게 연주자의 숙제야. 에셴바흐의 연주를 들어보면 알 거야. 음표는 물론 쉼표 하나하나까지 다 달라. 비록 0.1초 차이지만 조금 더 길고, 조금 더 짧아. 또 손가락을 조금 빨리 떼거나 늦게 떼는데 따라서 완전한 침묵이 되기도 하고 여운이 되기도 해. 하지만 에셴바흐의 연주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 바로 울림이지.”

“울림?”

사실 나는 피아노 연주에서 울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끝없이 이어지는 정우의 강의를 끊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어설픈 반문은 오히려 정우에게 새로운 강의 거리를 만들어주고 말았다.

“울림이란 건 이런 거야. 피아노는 커다란 울림통을 가지고 있고, 88개의 금속 줄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어. A6 키를 누르면 해머가 A6에 해당되는 현을 두드리는데, 같이 연결되어 있는 다른 현들이 미세하게 떨리고, 이 떨림이 큰 소리통을 통해 우리 귀에 들려. 그러니까 피아니스트는 건반을 땅 때릴 때 그 건반의 음뿐 아니라 다른 수십 개 현이 은연중에 공명하면서 내는 소리까지 염두에 두고 연주해야 해. 그건 악보에는 나오지 않아. 하지만 페달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그 울림들을 활용할 수 있고, 이건 연주자의 자유 영역이야. 에셴바흐의 연주에서 아쉬운 게 바로 그거야.”

나는 정우가 어머니가 사준 귀중한 음반 중 하나인 에셴바흐의 모차르트 소나타 연주를 뭔가 흠이 있는 것처럼 말해서 조금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나도 그 음반을 충분히 많이 들어보았고 잘 알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야 했다.

“에셴바흐의 모차르트 소나타 앨범은 나도 가지고 있어. 그리고 3년 동안 정말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럼 네가 말한 그 울림을 잘 활용한 피아니스트는 누군데?”

“프리드리히 굴다, 알프레드 브렌델!”

질문 떨어지기가 무서웠다.

“굴다?”

그 이름은 낯설었다.

“그럼 굴다가 에셴바흐보다 더 훌륭한 피아니스트야?”

“야, 넌 왜 그렇게 순위를 못 매겨 안달이야? 그런 뜻은 아니야. 서로 훌륭한 점이 다르지. 예를 들면 음표 하나 쉼표 하나까지 철저하게 준비해서 곡을 구성하는 치밀함에서는 에셴바흐가 굴다보다 훌륭해. 굴다 연주는 치밀하다기 보다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산만하고 가볍게 느껴져. 하지만 울림은 정말 환상적이야. 건반을 누를 때 마치 그 배음까지 같이 연주하고 있다는 느낌. 하지만 때론 그 울림이 모차르트 원곡으로부터 자꾸 멀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함을 줘. 그 정 반대의 위치에 잉그리드 해블러가 있어.”

자꾸만 낯선 이름이 등장했지만, 정우는 내가 낯선 이름들에 익숙해질 틈을 주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연주는 모차르트의 악보를 재연하는 것이 아니야. 어떻게 악보가 음악을 모두 담겠어? 난 모차르트의 악보를 매개로 삼아서 내가 이해하고 생각한 모차르트를 보여주려고 해. 피아니스트는 악보를 재연하는 도구도 아니고, 또 작곡가가 생각한 소리를 재생하는 도구도 아니야. 연주는 작곡가가 남겨 놓은 빈칸을 채워 가는 일종의 창작이야. 이런 부분이 부족하면 참 잘 치는구나 하는 느낌은 있지만 뭔가 지루하구나 하는 느낌도 반드시 따라 나오지.”

“그럼 네 마음에 드는 모차르트 연주는 없는 거네? 그렇게 기준이 까다로워서야.”

“있어.”

“누구?”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모차르트를 만날 수 있는 제대로 된 길목을 찾아낸 피아니스트는 디누 리파티야.”

“아, 네가 이름 따 온?”

“맞아. 그런데 이 분은 너무 일찍 죽은데다가 녹음기술도 원시적이던 시절에 활동해서 남아있는 녹음이 a단조 소나타랑 k467번 협주곡 밖에 없어. 그것도 음악소리보다 지지직 소리가 더 큰 낡은 녹음으로.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소름 끼칠 정도야.”

“그래서 네가 배운 게 뭐야?”

난 이제 정우의 지루한 강의를 끊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 새로운 강의 주제를 던진 꼴이 되고 말았다.

“내가 배운 거? 이런 거지 뭐. 얼마 되지 않는 음표와 광활한 여백의 조화. 그동안 난 여백까지 포함한 그림 전체를 보지 못하고 단지 검게 그려진 몇 안 되는 선만 보았어. 선을 그을 때 여백까지 그리는 건데, 선이 몇 개 안되니까 유치하고 단순하다고 짐작했던 거야. 유화보다 수묵화가 유치하다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몇 안 되는 선이지만 그 선이 너무도 아름답고 완벽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만 굵거나 가늘어도, 조금만 어긋나거나 이지러져도 그림 전체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몰랐던 거야.”

마침내 정우가 들고 있던 컵을 탁자에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기나 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강의도 잠시 멈추었다.

독자들은 아마 내가 여기 옮겨 놓은 말이 과연 중학교 1학년짜리가 했던 말인지 의심할 것이다. 옮겨 적고 있는 나도 때로는 정말 정우가 그때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일까? 혹시 내 기억이 나의 지적 성장과 함께 업그레이드된 건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때 정우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그게 디누다. 피아노를 잘 쳐서 천재가 아니라 피아노에 대해 생각을 잘 해서 천재였던 디누다.

“와, 이제 수업 끝난 거야?”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정우의 이 긴 모차르트론을 들어 줄만한 소양을 갖고 있지 못했다. 나는 그 장광설이 지루했고, 까칠한 반응을 감추지 않았다.

“응. 대충.”

“그런데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어. 다른 사람들 연주에 대해 열심히 평가만 한다고 해서 모차르트를 공부한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너는 어떻게 연주할 건데?”

“아, 그거? 대화!”

나는 정우를 좀 긁으려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정우는 의외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대화?”

너무 생뚱맞고, 너무 간단했다. 그렇게 악보가 새까매지게 메모해 놓고 수백 장의 음반을 들으며 분석한 결과가 대화? 그러자 정우가 답답했는지 우리 말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에게 설명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화 몰라? 오른손이 왼손과 대화하고, 1 주제는 2 주제와 대화하고, 2악장은 1악장과 대화하고. 오손도손 그런 대화도 있고, 으르렁거리며 다투는 대화도 있고, 묘하게 서로 노려보는 그런 대화도 있고. 그게 모차르트야. 어떤 경우에도 절대 대화가 끊어지지 않아. 심지어 왼손이 단지 알베르티 베이스를 연주하고 있을 때도, 그저 베이스를 채우고 있는 게 아니라 오른손과 대화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오른손과 왼손은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 저마다의 노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비유 말고 구체적으로 말해 줘. 어떻게 쳐야 하는데?”

“오른손은 오른손 나름의 이야기를 연주하고, 왼손은 왼손 나름의 이야기를 연주하는데, 마침 이게 서로 어울리는 거지. 처음부터 어느 하나에 다른 하나를 맞추는 게 아니라 마치 두 명의 연주자가 각각 악보 윗줄과 아랫줄을 맡아서 연주하되, 서로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연주해야 해. 혼자 연주하는 2중주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결국 내가 나와 대화하는 거야. 오른손을 움직이는 나와 왼손을 움직이는 내가 이야기도 나누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그리고 화해하고, 웃고, 까불고.”

“야, 웬지 무섭다. 네 머리가 두개 달린 모습을 상상해 버렸어.”

“나도 솔직히 무서워. “

그래. 무섭겠지. 이게 무슨 정신분열증 연습이 아니고 뭐람?

얼마 전에 읽었던 슈테판 츠봐이크의 소설 ‘체스’가 생각났다. 한 사람이 체스의 양 편을 동시에 맡아서 자기와 자기의 대결을 벌였다는 이야기.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자신을 오른손과 왼손으로 나누어 마치 두 명의 연주자가 대화하듯이 연주해야 한다는 이야기.

이건 도저히 정상적인 인간 심리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신분열이 이런 것일까?

“야, 생각만 해도 어지럽다. 설마 그걸 제 정신으로 할 수 있다고 봐?”

“난 완전히 두 사람이 되는 그런 경지에 도달하고 싶어. 미쳤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까짓 거 미쳐도 상관없어.”

그때 내가 보았던 정우의 얼굴은 중학교 1학년의 그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 얼굴은 수 십년 간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그 극한까지 추구하기 위해 삶을 송두리째 내어 건 음악가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웬 심술인지 나는 그런 정우를 더 곤혹스럽게 하고 싶었다. 나는 나름 어렵다고 생각되는 질문을 던졌다.

“좋아. 대화. 그럼 뭔가 화제가 있고 내용이 있어야 하잖아? 그 대화 내용이 뭐야?”

“아, 그거?” 하지만 정우에게는 그 질문 역시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냥 싱긋이 웃으며 대답했으니. “기쁨이야.”

“기쁨?”

“맞아. 플레져의 기쁨이 아니라 조이의 기쁨. 피아노 소나타 뿐 아니라 모차르트의 거의 모든 작품의 주제는 기쁨이야.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의 기쁨을 주고받는 대화.”

“뭐가 그렇게 기쁜데?”

“살아있음. 생명의 약동함.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삶의 힘, 활력. 그리고 그걸 느낄 때의 즐거움. 이런 거. 살아있다는 느낌. “

“그건 베토벤 아니야? 환희의 송가도 있잖아?”

“아, 베토벤의 기쁨은 주관적이야. 기쁘고 싶은 욕망이기도 하고. 그래서 ‘기뻐하라!’ 하고 자기 목소리로 외치는데, 모차르트는 객관적이야. 그래서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인간의 기쁨을 들려주지. ‘기뻐하라’가 아니라 ‘이런 게 기쁨이다’, 이런 식으로. 이게 모차르트 음악의 핵심이야.”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아. a단조 소나타나 g단조 교향곡, 그리고 레퀴엠 같은 곡들은 전혀 기쁘지 않아.”

“아, 물론 그건 다 어두운 곡들이야. a단조 소나타나 g단조 교향곡은 조금 예외적이긴 해. 어둡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모차르트가 주관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하지만 미완성인 레퀴엠을 제외하면 모차르트의 음악은 우울하거나 비극적인 정조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곡이 진행되어가면서 위로가 있고, 고무가 있고, 결국은 기쁨으로 마무리되게 되어 있어. 그것은 자신의 힘, 그리고 자신의 힘이 늘어나는 것을 느끼는 것 속에서 얻어지는 그런 기쁨이야.”

정우는 스스로의 대답에 도취되더니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쑥 빼들었다.

그러나 나는 칭찬 대신 벼르고 벼르던 결정타를 날렸다. 친구로서 나는 이 질문을 했던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음악 애호가로서는 그것이야말로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나의 그 질문 때문에 정우의 인생이 크게 달라졌으니. 그 질문은 이랬다.

“그러면 그렇게 대화하는 사람들 중에 연주하고 있는 네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데? 너는 단지 두 손, 여러 대화하는 목소리로 쪼개어진 거야,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목소리가 따로 있는 거야?”

“아, 그게…” 정우가 의외로 당황스러운 모습으로 자기 머리를 두드렸다. “아, 그걸 생각 못했네. 그 속에서 내 자리는 어디지? 난 뭐지?”

정우가 너무 힘들게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자 나까지 힘들어졌다. 내가 꽤 큰 타격을 주었음에 분명했다.

그날 이후 나는 정우의 연주를 쉽게 청해서 듣기 어려워졌다. 그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 얼마나 자신의 정신을 쥐어 짜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경사 절벽에 매달려 있는 클라이머가 겉보기에는 정지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엄청난 에너지를 쓰고 있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정우는 과연 이 역경사를 극복하고 절벽 위로 올라설 수 있을까, 아니면 끝내 힘이 다하여 추락하고 말까?

어쨌든 정우 덕분에 나의 중학교 시절은 온통 모차르트로 점철되었다. 정우의 모차르트 소나타 연주와 그 장황한 모차르트 연주론 강의를 들은 뒤, 나는 의식적으로 모차르트의 음악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원래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베토벤이나 19세기 낭만주의 음악, 아니면 서늘하면서도 장중한 시벨리우스였지 모차르트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우의 강의를 듣고 그 강의 복습을 위해 모차르트를 듣다 보니 어느새 푹 빠져들게 되었다. 공부할 때나 쉴 때나, 틈만 나면 모차르트를 들었다. 특히 오페라에 완전히 빠져서 ‘피가로의 결혼’이나 ‘돈 지오바니’ 같은 작품은 아리아나 중창은 물론이고 레시타티보 하나하나까지 거의 다 외웠다.

그런데 모차르트의 숨은 매력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나는 갑갑함 때문에 몸부림을 쳐야 했다. 내가 들으면서 느낀 것들을 직접 연주하며 확인하고 싶었지만, 여동생 방으로 유배 가버린 피아노는 여전히 접근금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성적을 전교 3등으로 옮겨 놓아 어머니를 그럭저럭 만족시키고는 있었지만, 책과 피아노에 대한 봉인은 여전히 해제되지 않았다. 일단 내려진 긴급조치를 절대 철회하지 않는 것은 과연 유신 시대를 살아온 어른들 다웠다.

하지만 잔혹한 유신 정권도 민주화 운동을 막을 수 없듯이, 부모님의 긴급조치도 내가 피아노 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나의 탈출구, 정우네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국민학교 때처럼 학교가 끝나면 일단 정우네 집에 들렸다 집으로 가는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정우는 내가 피아노를 치면 반드시 옆에 와서 잔소리를 했다. 결국는 정우를 선생 삼아 레슨을 받게 되었다. 레슨비는 정우가 쮜리히 콩쿠르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모차르트 소나타 14번, 피아노협주곡 23번, 그리고 슈만 피아노 협주곡 a단조 연주를 듣고 품평을 해 주는 것이었다. 정우는 내가 하는 말을 매우 진지하게 들었다.

다만 미우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학교가 인왕산 너머에 있었던 관계로 거의 여섯 시가 다 되어야 집에 왔기 때문이다. 조금 완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엄격한 어머니를 두려워하던 나는 그 때까지 미우를 기다렸다 집에 갈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우를 다시 만난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기말고사가 끝날 때까지 미우와는 계속 길이 엇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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