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장편소설 디누 1부 23화 디누탄생 2
내 인생에서 가장 음악적이었던 중1 겨울방학이 끝나고 두려울 것이 없는 나이, 중2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정우와 같은 반이 되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18반까지 있었기 때문에 1등부터 18등 까지를 1반부터 18반의 1등으로 배치하고, 19등을 18반의 2등으로 36등을 1반의 2등으로 배치하고, 37등을 1반의 3등으로 54등을 18반의 3등으로 배치하는 식으로 돌리면서 반 편성을 했다.
정상적인 반 배치였다면 나와 정우는 공부를 엇비슷하게 했기 때문에 절대 같은 반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1학년 1학기 때 전교는커녕 반에서 14등(전교 석차는 아마 200등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까지 떨어지는 등 엉망이었기 때문에 2학기를 전교 3등으로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1학년 전체 성적은 53등에 불과했고, 전교 17등인 정우가 1등으로 배당된 반에 3등으로 배당되었다. 물론 담임은 입이 귀에 걸렸다. 전교 3등이 반 3등으로 들어왔으니 말이다.
중학교 2학년이라는 숫자에는 뭔가 신비로운 면이 있었다. 그걸 중2병이라고 폄하해도 마찬가지다. 원래 인간은 급격한 변화나 낯선 것은 무조건 병리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니까. 중2병은 그 시기가 인생 전체에서 낯설고 독특한 시기라는 뜻이다. 어제까지 나라고 믿어왔던 존재가 전혀 다른 존재로 바뀌는 시기이니 일종의 병인 셈이다.
정우는 특히 그 병이 심했다. 덥수룩하게 수염이 났고, 목소리도 굵은 바리톤으로 바뀌었으며, 어깨와 허벅지도 각진 근육으로 마치 갑옷처럼 단단하게 뒤덮였다.
나도 정우한테 지면 안 된다고 엄한 가정교육을 받아오지 않았던가? 나 역시 키가 부쩍 자라서 아버지와 비슷해졌고, 덩치는 아버지보다 더 커졌고, 목소리도 바리톤이 되었다.
이제 어머니 말에 복종하기만 하는 그런 소심하고 착한 모범생은 사라졌다. 다른 아이들이 괴롭힐까 봐 두려워서 이리 저리 숨을 곳을 찾아다니던 나약한 어린아이도 사라졌고, 그 자리에 인민군도 두려워한다는 천하에 겁날 것 없는 사춘기 소년이 나타났다. 우리는 서로 수염이 몇 가닥인지 세어보며 한 가닥에 100원씩 유치한 내기를 걸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세어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 내기는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물론 우리 뿐 아니라 교실에 우글거리고 있는 70명의 학생들 모두 그렇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후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아마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테스토스테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리라.
이렇게 한창 호르몬의 세례를 받고 있는 소년들의 머리에 들어 있는 생각은 하나도 여자, 둘도 여자, 셋도 여자였다. 두 명 이상만 모이면 여자 친구가 있는 녀석의 과장된 무용담과 그것을 부러워하고 선망하며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는 녀석들의 추임새가 펼쳐졌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비록 남자 반, 여자 반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남자 중학교 학생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한 몸에 받는 남녀공학이었다. 이야기 거리가 많이 나왔고, 썸타는 애들이 생겼다. 아무리 학급을 분리하고 서로 다른 층에 배치하고 그 사이에 학생부실을 배치해 놓아도 일단 비슷한 공간에 수백 명의 여학생과 수백 명의 남학생이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로미오와 줄리엣 또래의 마음을 막을 수 없었다.
정우는 전학 올 때부터 여학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학교 행사에서 특별 공연으로 슈베르트 즉흥곡 2번과 4번을 연주했을 때는 당대의 청춘 스타였던 이용, 전영록 부럽지 않을 정도의 괴성과 비명소리가 아우성쳤다. 그래서 우리 반 교실 근처에는 정우를 보러 오는 여학생들이 늘 어슬렁거렸고, 심지어 교문 앞을 어슬렁 거리는 다른 학교 여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우를 훔쳐보러 맴돌고 있는 여학생 앞을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서 서둘러 지나갔다.
그런데 그 여학생 입에서 “어머, 오석아! 너 오석이 맞지?”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어, 너, 너는.”
국민학교 6학년 때 옆자리에 앉았던 박헤렌이었다. 얼굴은 그대로지만 나머지가 너무 달라져 내가 알아보지 못했다.
우선 키가 부쩍 커서 거의 170 센티 정도 되었고, 가슴이 봉긋하게 신라 왕릉 같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감색 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도 낯설었다. 6학년때는 늘 바지만 입고 다녔고, 책상 위에서 캉캉 춤을 추고,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서 쭈쭈바를 먹는 쾌활하고 조금 거칠기까지 한 왈가닥이었는데 이런 여성스러운 모습이라니.
그렇게 부쩍 여자가 되어 있는 헤렌을 보자 모르는 여학생과 마주쳤을 때의 갑절로 화끈거림이 느껴졌다. 2년 전만해도 한 교실에서 그것도 바로 옆에 앉아서 서로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때로는 치고 박고 다투기도 했던 사이였지만 아무 구멍이라도 있으면 파고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어색했다.
“어머, 정말 오석이네? 와, 머리만 짧고, 너무 똑같아. 너무 반갑다.”
눈웃음도 어색하고 처음 들어보는 애교 섞인 목소리도 낯설었다. 아무것도 몬 본 척, 못 들은 척 교실로 줄행랑을 쳤지만 나의 도주는 매우 희극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너무 당황하여 미닫이 방식의 교실 문을 여닫이 문처럼 힘차게 잡아당기며 용을 쓰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헤렌이 바로 내 등 뒤까지 다가왔다.
“왜 그래? 우리 짝꿍이었잖아? 왜 도망가고 그래? 너무 무안하잖아?”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미안해.” 이럴 때는 그저 깨끗하게 사과하는 게 상책이다. “그냥, 좀 어색해서. 미안.”
하필 이럴 때 우리 반에서 제일 까부는 녀석들이 지나갔다.
“야, 오석이 여자 만난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올라갔네?”
“범생아. 너 그러나 학주한테 혼난다.”
그 짓궂은 녀석들이 저 마다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나는 순간 울컥했지만 참았다. 공연히 싸움 일어나는 게 싫었다. 그때 교실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정우 목소리도 들렸다.
“너, 맨날 여자만 보면 도망 다니더니, 그게 다 내숭이었어? 웬일이야, 오늘은?”
정우마저 날 놀렸다. 배신감이 들었지만 꾹 참고 해명부터 했다.
“6학년 때 짝꿍이야. 그냥 복도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반가워서 얘기 좀 했어.”
“그래? 짝꿍이라. 안녕.”
어느새 정우가 헤렌에게 눈인사를 했다. 외국을 많이 다녀봐서 그런 건지 정우는 도무지 여학생 앞에서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석이 친구면 곧 내 친구. 난 오석이 친구 권정우야. 우리 아빠랑 얘네 아빠도 친구 사이고. 그냥 형님 아우 사이라고나 할까? 하하. 물론 내가 형이지.”
헤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턱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눈을 실처럼 뜨고 소리 내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러더니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안녕.”이라고 말했다. 난 6학년 내내 헤렌이 이렇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건 못 들어봤다.
“오석아.” 정우가 유쾌한 목소리를 마치 레치타티보처럼 던졌다. “학교 끝나고 러브리 가자. 러브리 알지? 나랑, 너랑, 그리고 네 짝궁이랑. 내가 낼 게.”
물론 나는 러브리가 어딘지 알았다. 학교에서 강남역 쪽으로 나가면 모퉁이에 있는 패스트 푸드점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카페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델리였다.
난처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같이 길을 가기만 해도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로 꽉 막힌 시절이었다. 그런데 정우는 대놓고 같이 놀자고 한다. 그때 기준으로는 명백히 날라리 짓이었다.
그런데 헤렌의 대답은 뜻밖에 대담했다. “응. 좋아.” 는 기본이고 “저… 내 친구 데려가도… 돼?”가 추가되었다.
“오, 그럼 더욱 좋지.” 정우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럼 학교 끝나고 ‘러브리’에서 보자.”
헤렌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더니 조용히 여자 반들이 있는 2층으로 사라졌다.
“야.” 그제서야 제 정신을 차린 나는 정우를 힐난했다. “왜 그래? 선생님들한테 걸리면 어쩌려고?”
“야, 여자가 무슨 괴물이냐? 다 같은 사람이고, 다 같은 친구야. 남자랑 여자가 만나는 걸 비난할 수 있는 도덕적 근거를 하나라도 대 봐. 없지? 2년 전 까지만 해도 바로 옆에 앉아서 같이 공부하고 놀기도 했던 애랑 만나는 게 못된 행동으로 바뀐 근거가 뭐야? 선생님들은 연애 안 했어? 별 해괴한 걸 다 해라 마라 그러고 있대?”
정우의 반응은 뜻밖에도 아주 완강하고 공격적이었다. 그러다 토끼 눈을 뜨고 움츠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나? 그러니까 쉽게 생각해. 넌 내 친구고, 네 짝꿍은 또 내 친구야. 네가 반가워하니까 나도 반가운 거고. 그리고 헤렌? 헬렌? 하여간 걔 입장에서도 남자 애 둘 사이에 혼자 끼기가 어색하니까 자기 친구 데리고 나오는 거고, 우리는 간식 몇 개 나눠 먹고 시원한 거 마시고 헤어질 거야.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교실에 들어오자 몇몇 녀석들이 수근거리고 있었다. 평소에 행실이 그다지 바르지 못해서 학생부에 자주 불려 다니는 녀석들이었다. 그 녀석들이 뭐라고 수근 거리는지 자세히는 들리지 않았지만 헤렌이랑 정우에 대한 애기인 것 같았다. 그 수근 거리는 소리 파편들을 억지로 긁어모아서 모자이크를 만들면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박헤렌이 권오석한테 들이댄다.”
“박헤렌, 걔 날라리잖아?”
“아까 봤어? 그 양아치가 정우 앞에서 내숭 떠는 거?”
“권오석은 범생인데, 잘못 걸렸다.”
“그러게. 정우 따라다니다 보면 범생이 생활은 쫑 나는 거지. 정우가 은근히 좀 놀잖아?”
귀가 고양이처럼 예민한 정우도 분명 이런 소리들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우는 그런 소리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오선지 공책에 계속 음표만 그려 넣고 있었다.
그 놈들은 그 놈들 대로 계속 수근거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배짱이 늘었는지 좀 더 큰 소리로 숙덕거렸다.
“그런데 최나경도 나올까?”
“당연하지. 박헤렌 노는 곳에 최나경 빠지겠냐?”
“그런데 최나경이 그렇게 예쁘다면서? 넌 봤어?”
“그럼 봤지. 와, 겁나게 예쁘지. 완전 뿅 간다니까.”
“그럼 뭐해? 유승진이랑 사귀는 걸? 최나경 근처에서 얼씬거리면 주먹 떡 먹을 걸?”
“권정우가 유승진한테 맞을까? 안 그럴 걸? 만만치 않을 거야. 어쩌면 유승진이 까일지도 몰라.”
대충 이런 수준의 유치하고 저속한 이야기들이었다. 수업 시작 종이 그토록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반면 수근 거리던 녀석들은 아쉬워하며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최나경이란 이름이 머리에 박혀서 떠나지 않았다. 저 밝히는 녀석들이 한결같이 예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댄 최나경. 1학년때 부터 최나경이라는 이름은 남학생들 사이에 미인의 대명사처럼 회자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자 반 가까이 갈 배짱이 없어서 먼 발치에서 애들이 “야, 저기 최나경이다.”라고 수근 댈 때 얼핏 스쳐본 기억밖에 없었다. 그 정도 거리에선 그저 여학생이라는 것만 식별되었지 예쁜지 못 생겼는지 심지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최나경을 ‘러브리’에서 만나게 된다? 호기심이 치솟았다. 얼마나 예쁠까? 어떤 아이일까? 마음도 예쁜 진짜 미인일까? 하지만 불길한 예감도 있었다. 유승진이랑 사귄다고? 그렇다면 역시 같은 날라리임에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