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장편소설 디누 1부 24화 디누탄생 3
수업이 끝나자 나는 거침없이 전진하는 정우의 걸음을 따라 강남대로를 향해 걸어야 했다. 정우는 걸음이 매우 빨랐기 때문에 도저히 나란히 가지 못했고, 정우 뒷모습을 보면서 가야 했다. 정우는 같이 걸어가는 사람의 속도를 배려해주지 않았고, 자기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로 전진했다.
정우의 걸음걸이는 결코 아름다운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뒷모습을 보고 따라가는 일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빠르게 걷거나 달릴 때면 왼쪽으로 몸이 끄떡 끄떡 흔들렸다.
정우는 공부 뿐 아니라 운동도 잘하는 조선시대 식으로 말하면 문무를 겸비였다. 학교 체육대회 같은 것을 하면 으레 학급 계주 대표 선수로 등장하곤 했는데, 왼쪽으로 크게 끄덕끄덕 하면서도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그의 모습은 거의 코믹하기까지 했다.
그의 끄떡 거리는, 그의 어머니 표현을 빌리면 삐딱거리는 걸음을 볼 때마다 나는 그의 인간적인 빈 구석을 찾은 것 같아서 기쁘고 반가웠다. 신동 디누는 그 비뚤어진 골반에 인간 정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의 코믹한 걸음 덕분에 우리는 ‘러브리’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러브리는 패스트푸드를 주로 취급하는 곳이었지만 요즘 패스트 푸드점을 생각하면 안된다. 당시 패스트푸드는 상당히 고급 음식이었기 때문에 중학생이 여기를 드나드는 경우는 강남구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그때는 서초구와 강남구가 분리되지 않았다- 풍경이었다. 그 당시 패스트푸드점의 위상은 요즘의 스타벅스 이상이었고, 롯데리아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랬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이라 러브리에는 손님이 몇 명 없었고, 학생은 우리 둘 뿐이라 눈에 확 띄었다. 나는 민망해서 고개를 슬그머니 숙였지만 정우는 뭐 어떠냐 하는 표정으로 경찰 모자 같은 교복 모자를 벗어서 가방에다 쑤셔 박았다.
여자 아이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잠깐 기다려.”
적당한 자리를 잡자 정우가 성큼 성큼 카운터로 가더니 나한테 뭐 마실거냐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코코아 두 잔을 받아왔다. 달콤한 초콜렛 냄새를 머금고 김 아지랑이가 춤추며 올라왔다.
“우리끼리 먼저 먹어도 되는 거야?”
“걔들 오려면 아직 멀었어.”
“그럼 뭐해?”
정우가 가방에서 악보를 꺼냈다.
“일단 이거 먹으면서 공부를 하던가, 책을 보던가 해.”
“걔들은 왜 사람을 기다리게 해?”
“너 여자애들 전혀 모르는구나. 너 같으면 교복 입고 이런데 와서 교복 입은 남자애들하고 놀래? 일단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이것저것 챙겨서 나오려면 시간 좀 걸릴 거야.”
“학생이 교복 입는 게 어때서?”
“아이고, 모범생님 죄송합니다. 하여간 그래. 여자애들은.”
정우는 그렇게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지고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악보를 펼쳐놓고 읽기 시작했다. 때로 연필로 악보 여백에 뭐라고 메모를 갈겨쓰기도 했지만, 입으로 흥얼거리거나 손으로 박자를 맞추거나 하지는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악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책을 읽는 것 같았다. 정우는 문자 그대로 악보를 읽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머쓱해져 코코아를 몇 모금 마신 다음 주섬주섬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들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나일강의 죽음’을 절반 정도 읽을 때까지 정우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계속 악보에 메모만 하고 있었다.
더 무료해진 나는 소설책을 집어넣고 수학 문제집과 연습장을 꺼내 놓고 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여자아이들은 오지 않고 있었다.
“디누는 음악과 자기만 사랑해. 음악과 자기만 사랑해. 음악과 자기만 사랑해.”
미우의 목소리가 귓가를 앵앵거리면서 돌아다녔다.
“야, 이거 너무 대단하지 않냐?”
별안간 정우가 탄성을 지르며 악보를 들이 밀었다. 그 바람에 미우의 목소리가 뿔뿔이 흩어져 날아가버렸다.
“뭐가?”
“이거. 여기, 여기 말이야.”
정우가 악보의 어느 부분을 가리켰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복잡한 악보일 뿐 뭐가 대단한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정우 역시 누군가에게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 내 의견을 듣고 싶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억지로라도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한 찰라 벌써 내 눈에서 악보를 치우고 다시 자리에 앉아 부지런히 악보 여백에 깨알 같은 글씨들을 적어대고 있었다.
내 머리 속에서 빠지직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람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야 그러면서 한 소리 지르려는 찰나, 정우가 또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홀 귀퉁이에 있는 피아노를 향해 마치 싸움이라도 거는듯한 모습으로 걸어갔다.
‘러브리’는 패스트푸드의 메뉴를 같이 취급하고 있었을 뿐이지, 어쨌든 카페나 레스토랑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는 시간제로 고용한 피아니스트에게 감상적인 곡들을 연주 시키곤 했다. 물론 그 피아노는 낮 시간에는 실내를 좀 더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는 장식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저기 학생, 그러면 안 되는데.”
정우가 피아노 뚜껑을 열고 앞에 앉자 놀란 직원이 카운터에서 뛰어나와 정우를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직원은 두 걸음도 옮기기 전에 그 자리에 멈춰서야 했다. 정우의 연주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첫 네 마디만 듣고도 난 그 곡이 모차르트의 f단조 판타지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조율이 엉망이네. F5가 반음 낮고, C6는 반음 높아.”
연주하면서 정우가 계속 주절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귀에는 분명 모든 키가 제 소리를 내는 것처럼 들렸다. 조율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거나 정우가 그 두 음을 알아서 반음 높여, 반음 낮춰 연주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당연히 후자였을 것이다.
직원은 정우 근처까지 다가가서 교복을 이리 저리 훑어보다가 고개를 갸우뚱 하며 카운터로 돌아갔다. 교복이 무슨 예술 중학교나 예술 고등학교 교복이 아니라 의아한 모양이다.
나는 조용히 손바닥에 턱을 고이고서 눈을 감고, 정우가 펼치는 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내가 아는 모차르트의 f단조 판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분명 익숙한 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맙소사! 그것은 쇼팽의 발라드 1번이었다. 그런데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모차르트의 판타지가 들려왔다. 다시 쇼팽 발라드. 이번에는 모차르트 d단조 판타지, 쇼팽 스케로쪼, 모차르트 f장조 소나타, 쇼팽 마주르카…. 나는 이런 식의 메들리는 처음 들어보았다. 아니 이런 식의 메들리가 가능 할 것이라고 생각 해 본적도 없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식의 연주를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모차르트 곡과 쇼팽 곡을 잇따라 연주하는 것도 아니고 한 소절 단위로 해체한 다음 마구 뒤섞어서 연주하는 메들리라니.
더 놀라운 일은 정우가 아니라 나한테서 일어났다. 그때 까지만 해도 나는 겨울 방학 때의 따돌림, 미우와 정우 사이에서 새우등이 되었던 일 따위로 정우에게 악감정 혹은 서운함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모차르트와 쇼팽이 마구 섞인 저 메들리 연주를 듣고 있다 보니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정우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서운하고 좋지 않았던 감정들이 사르르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
한 때나마 가졌던 정우에 대한 서운함과 미움은 오히려 정우의 저 연주를 더 아름답게 들리게 만드는 조미료로 기능하고 말았다. 나는 정우를 미워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이런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미우와 함께 연주하는 정우의 피아노 소리는 분명 멋지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홀로 연주하는 정우의 피아노 소리는 그런 평가 자체를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정우는 미우와 함께 연주하면 훌륭한 피아니스트였지만, 혼자 연주하면 피아니스트 그 이상이었다.
매장 안에서 지나가던 손님들도 주문하던 손님들도, 그리고 직원들까지 평소 음악을 즐겨 듣던 사람이건 전혀 듣지 않던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넋을 빼앗긴 채 서거나 앉은 그 자리 그대로 자신들의 시간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시간은 오직 정우와 그가 연주하고 있는 피아노에서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리는 범위는 모두 그 시간의 흐름에 종속되었다.
아니 이건 뭐지? 정우가 만들어내는 시간의 흐름에 나를 맡기고 그 즐거움을 만끽하던 나의 안이한 귀에서 예리한 전율이 일어났다. 정우가 연주하는 음악이 너무 낯설게 바뀌었다. 모차르트인가? 그런 느낌이 들긴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독주곡 중 저런 곡은 없다. 그럼 쇼팽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든 난생 처음 들어보는 곡이다.
그때 매장 문이 열리더니 시간의 흐름이 한 군데 더 만들어졌다. 그 시간의 흐름을 따라 여학생 둘이 들어왔다. 하나는 헤렌인데, 교복 대신 발목까지 걷어 올린 청바지와 후드가 달린 코트를 입고 있었다.
헤렌 옆에는 짧은 치마와 그때만 해도 교칙으로 금지되어 있었던 반투명 검정 스타킹, 이른바 성인용 스타킹 차림의 여학생이 있었다. 얼른 보면 중학생이 아니라 대학생처럼 보였다. 남학생들 사이에서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바로 그 최나경이 나타났다. 짧은 치마보다 살짝 더 긴 코트를 입고 있어 마치 치마를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그 코트 끝자락을 바이올린 케이스가 가리고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매장을 가득 채운 피아노 소리에 어리둥절해 하며 내가 있는 테이블을 향해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오석아, 안녕.”
헤렌이 다시 국민학교 때처럼 손을 까불거리며 친한 척을 했다.
“안녕.”
나도 형식적인 인사로 화답했다. 하지만 내 신경계는 헤렌이 아니라 소문의 주인공 최나경을 향해 쏠리고 있었다.
첫 느낌은 얼굴이 무척 작구나 하는 것이었다. 손이 그리 큰 편이 아닌 내가 손바닥만으로도 완전히 덮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작은 얼굴 안에 짙은 눈썹과 오똑한 콧날이 얼굴에 완벽한 T자를 그려 놓았고, 그 사이에 쌍꺼풀 진 큰 눈이 길고 오똑한 속눈썹들을 흔들며 생글거리고 있었는데, 눈망울이 엑스트라 버진 오일이라도 뿌려놓은 것처럼 윤기있게 반짝였다. 그 생글거림에 보조를 맞추면서 살짝 미소를 띤 도톰한 입술이 활 모양을 하고 있는 보조개들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살짝 갈색 빛깔을 띈 곱슬머리는 거의 허리길이까지 굼실굼실 드리워져 마치 후광처럼 빛나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학생부의 단속을 피해가며 이정도까지 길렀는지 신기했다.
얼굴이 작고 다리가 길어서 헤렌보다 키가 작았지만 얼른 봐서는 오히려 더 커 보이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정말 예뻤다. 같이 다니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한번씩 쳐다볼 수 밖에 없는, 그래서 공연히 옆에서도 우쭐대는 느낌이 들 수 있는 그런 소녀였다.
“안녕. 최나경이야. 넌? 헤렌이 친구?”
나경이 자리에 앉으면서 인사를 했다. 맑은 소프라노 음성이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저기 저 피아노 치는 애가 디누?”
나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시 고개만 조용히 끄덕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피아노 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테이블 아래로 검정 스타킹과 약간 굽이 있는 구두를 신은 나경의 발이 꼼지락 거리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구두가 잘 맞지 않아서 뒤척뒤척 하는 수준이었지만 나중에는 아예 구두를 벗어놓고 발을 그 위에 얹은 채 꼼지락거렸다. 바이올린을 들고는 있었지만, 음악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어?”
마침내 나경이 지루한 듯 입을 열었다.
“한 20분쯤.”
“어쩌지? 나 쫌 있다 레슨 가야 하는데.”
나경의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놀랍게도 찡그린 모습도 매혹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포사가 얼굴을 찌푸리자 온 주나라 여인들이 따라서 얼굴을 찌푸렸다는 고사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가서 얘기 해 볼게.”
나는 여자 애들 둘과 같이 앉아 있는 것이 계면쩍어 핑계 김에 일어났다. 정우는 내가 다가가는 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여전히 내가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이상한 곡들을 연주하고 있었다.
“쟤들 시간 없대.”
정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슬쩍 뒤를 돌아 보자 나경이 짐을 챙겨서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애들 불러 놓고 이렇게 그냥 보내는 건 아무래도 너무 무례한 행동인 것 같았다. 하지만 정우는 도무지 피아노 앞에서 떨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묘안이 생각났다. 정우 귀에 대고 슬그머니 한 마디 던졌다.
“지금 누구 작품 연주하는 거야?”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연주가 딱 멈추었다.
연주를 중단한 정우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몹시 짓궂은 장난을 치고 난 다음의 어린아이 같은 웃음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구 작품이라니? 아무 작품도 아니야.”
“그런데 한참 연주 했잖아?”
“응.”
“그런데 아무 작품이 아니라니? 네 작품이야 그럼?”
“아니. 그것도 아니야. 연주는 했는데, 작품은 아니야. 그냥 되는 대로 연주한 거였거든. 만약 나 더러 아까 연주했던 거, 또 해보라고 그러면 못해.”
그리고 정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여자 애들 만나기로 약속한 건 아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심지어 내가 같이 있다는 것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만 기가 질려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우를 다시 볼 때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재능이 마치 초가을 경주 궁궐터의 코스모스처럼 우수수 솟아 나왔고, 그 반대급부로 정 떨어지게 만드는 냉혹함과 자기중심성도 뭉게뭉게 솟아 나왔다.
그때 나경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얘, 지금 뭐하는 거야?”
나경이 약간 골이 났는지 아까보다 좀 더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손과 어깨를 으쓱하고 들어 보일 뿐 뭐라 말할 게 없었다. 그러자 나경이 찌푸렸던 얼굴을 펴고 다시 옅은 미소를 던지며 말했다.
“됐어. 우린 갈래. 나 레슨 있어서 가 봐야 해. 디누 실물 좀 보려고 왔던 건데, 봤으니까 됐어. 헤렌아, 가자.”
“으, 응.”
헤렌은 나경에게 마치 여왕 옆의 시녀처럼 복종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시는 재연되지 않을 그런 곡을 두드리고 있는 정우의 연주는 계속되었다. 아니 점점 더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바뀌어 갔다. 그와 함께 정우의 얼굴도 서서히 창백하게 바뀌어 갔다. 약간 숨소리가 거칠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다스 베이더 숨소리 같았다. 그와 동시에 이마와 볼에서 땀방울이 지그재그로 굴러 떨어졌다.
“어머, 얘 지금 이상해.”
출구 쪽으로 몸을 돌리려던 나경이 다시 몸을 되돌렸다. 마치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정우의 연주가 멈추었다. 이윽고 여러 개의 건반이 동시에 울리는 쿠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정우의 얼굴이 그대로 건반 위로 엎어졌다.
“왜이래? 야, 임마. 일어나.”
나는 당황하여 정우의 몸을 잡아 흔들었다. 그러나 정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푸우, 푸우 하는 숨소리만 거칠게 들릴 뿐이었다.
“저리 비켜 봐.”
나경이 예상보다 훨씬 강한 팔 힘으로 나를 밀쳐냈다. 그리고 정우의 겨드랑이 쪽을 잡고 그를 피아노 앞에서 끌어 낸 뒤 테이블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나는 저 날씬한 몸매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지 놀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경은 정우를 평평한 곳에 눕히고, 소파에서 쿠션을 가져와 발 밑에 고여 두고 손등으로 호흡을 확인했다.
“호흡은 정상이야.”
“어. 그래. 다행이다. 그런데 어떻게?”
“나, 병원 집 딸이거든.”
나경이 내 어깨를 탁 치며 말했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하여간 실신인지 쇼크인지 했는데, 직원 분한테 부탁해서 119에 전화 부탁해. 구급대가 곧 올 거야. 그때까지 얘를 잘 돌봐 주렴. 그럼 난 내가 할 건 다 했으니까 그만 간다.”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짧은 치마를 나풀거리면서 긴 다리로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나경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야, 쟤들 어디 가? 이제 시작인데?”
어느새 정우가 의식을 찾았다.
“너야 말로 어디 갔다 이제 와?”
“갔다 오다니? 무슨 소리야?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설명 좀 해 줄래?”
“한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혼자 피아노 치다가 뻗었어. 그래서 그 누구냐, 예쁜 애, 걔가 응급 처치 하고 갔어.”
“응급 처치라면, 인공호흡? 아하하하.”
“야 이 미친놈아. 농담이 나오냐?”
“아니, 그런데 왜 걔들은 그냥 갔어?”
“걔, 바이올린 들고 왔더라. 음악 하나 봐. 레슨 시간 때문에 더 못 기다린다고 했어. 그런데 꼭 레슨 시간 아니더라도 나 같아도 그냥 갔겠다. 넌 여자 애들이 왔는데도 아는 척도 안하고 피아노만 치고 있었잖아? 그것도 모자라서 이런 생 쇼를 다하고.”
“야, 야. 그만하자. 쪽 팔리니까.”
정우가 손을 내밀면서 일부러 거칠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의 눈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식의 떨림이 어떤 것인지 기억한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 동물원에서 하필이면 내 바로 앞에서 하마가 그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렸다. 그때 너무 두렵고 놀라 울지도 못하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면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 움직일 수 있었던 것, 아니 내 뜻과 관계없이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눈두덩이의 바르르 떨리는 경련 뿐이었다.
나는 정우 얼굴에서 하마 아가리 앞에서 얼어버렸던 그 꼬맹이를 보았다. 잔뜩 겁먹은, 아니 겁먹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거의 생각이 흡수되어버린 그런 모습. 그때 까지만 해도 나는 정우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었다.
“제 증언은 여기까지 입니다.”
“아니, 농담하십니까?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려고 하는데, 여기까지 라니?”
재판관이 펄펄 뛰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신문에 응할 수 없었다. 너무 지쳐 있었고, 더 이상 기억 나는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짓을 계속 했다가는 내가 두 동강이 날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냥 자연인 권정우에 대해 알고 싶다면 아직 해 드릴 이야기가 더 남았습니다만, 음악가 디누에 대해 알고 싶다면, 여기서부턴 제 기억의 한계를 넘어갑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가 정우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것은 중학교 2학년 1학기로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부터 정우는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고, 저와 다른 세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와 세계를 공유한 친구들은 따로 있었고, 그들이 디누를 만들었습니다.”
“세계를 공유한 다른 친구들. 그게 누구죠? 필요하면 그들도 소환하도록 하죠.”
“아녜스, 지네트, 최유선, 베네디토 몬테카리니, 클로드 티보, 볼프강 지히발.”
“다들 음악가로군요.”
“아, 그리고 미켈레 아고스티니.”
“그 사람은 뭐하는 분이죠?”
“클래식 에이전트입니다. 클래식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회사인 해리슨 패럿의 중역이죠.”
“그럼 증인은 그 사람들을 만나서 증언을 수집해 오세요.”
“네? 제가 말입니까?”
“내가 그 사람들을 소환할 수 없는 것 아시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오늘의 신문은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땅땅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