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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소설 디누 1부 26화 지네트2

by 권재원

나는 얼마 안 남은 여름방학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지네트 투어 일정에 맞춰 타이페이로 날아갔다. 남의 돈으로 해외 여행해 보는 것이 처음이라 의외로 마음이 설레어 전날 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나의 이 설레이는 여행 기분은 공항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바로 증발해 버렸다. 마치 헤어 드라이에서 나오는 것 같은 바람이 얼굴 위에 쓰나미처럼 덥쳐 온 것이다. 이게 열대의 더위구나 싶었다.

한국의 여름은 대만의 여름에 대면 차라리 가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물론 그때 느낌이 그랬다는 것이다. 2018년의 여름이라면 능히 대만과도 대적이 가능했을 것이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더위도 더위지만 공기를 짜면 물이 떨어질 것 같은 습기 때문에 숨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북회귀선에 가까운 곳이라 여름이지만 우리나라보다 해가 빨리 진다는 것. 일곱 시가 넘어가자 캄캄한 밤이 되었고, 밤거리가 제법 걸을 만했다. 나는 서울보다 훌륭한 시스템을 갖춘 지하철을 이용하여 공연장을 향했다.

공연은 완벽했다. 지네트의 연주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아늑한 명상과 초월적 평화를 뿌려 주었다. 여신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지 않았음을 삼십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천재에서 거장으로 성숙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공연 장소가 독재자인 장제스를 기념하는 중정 기념관 부속 시설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만 역사와 우리나라 역사가 중첩되면서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장제스, 그리고 그의 아들 장징궈로 이어지는 부자세습 정권. 무려 38년이나 계속되었던 계엄령. 수만 명의 시민을 학살한 2.28 사건.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한 지식인들을 테러하고 살해한 정보기관.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듯 우리나라와 같이 1987년에 이루어진 극적인 민주화.

갑자기 정우의 기억이 떠올랐다. 만약 오늘 공연의 주인공이 디누였다면 틀림없이 커튼 콜 도중에 이런 중첩되는 두 나라의 역사를 거론하면서 앞으로 대한민국과 대만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투 톱으로 나란히 등불을 밝히기를 기원한다 등등의 발언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국민당 간부들이 몹시 당황했을 것이고, 민진당 간부들은 박수 갈채를 보냈을테지.

어쨌든 훌륭한 연주를 들으니 행복했다. 이 훌륭한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없다니 그것 만으로도 한국에서 사는 것이 몹시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네트가 한국에서 연주하는 것이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음악당을 나오자마자 조명을 받아 괴기스럽게 빛나고 있는 중정 기념당이 보였다. 나는 박정희가 형님이라고 불렀다는 독재자와 관련된 시설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걸음을 재촉했다.

타이페이 국립 콘서트 홀에서 지네트의 숙소인 셰라튼 호텔까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걷기로 했다. 열대야라고는 해도 어차피 8월 중순이면 서울도 열대야긴 마찬가지니 얼마든지 견디고 걸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완벽한 오산이었다. 한밤중이지만 기온은 28도 아래로 내려갈 기척조차 보이지 않았고, 습도가 높아 숨까지 턱턱 막혔다.

그래도 지나가는 골목마다 걷어차일 정도로 많이 자리 잡은 세븐 일레븐과 페밀리 마트가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그 옆을 지나갈 때 마다 ‘뻐꾹, 뻐국, 뻐구기의 노래가...’ 하는 음악이 울리면서 자동문이 열렸고 매장 안의 시원한 에어컨 냉기가 돌풍과 함께 불어왔다. 그 덕에 이 끔찍한 열대야 속에서 그럭저럭 버티며 걸어갈 수 있었다.

호텔까지 거리가 생각보다 짧아 약속 시간인 10시30분보다 15분이나 먼저 도착할 수 있었고, 호텔 로비의 강력한 냉방을 이용하여 땀을 충분히 식힌 다음 지네트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숙녀를 만나는데 땀투성이 얼굴을 하고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에는 식은땀이 났다. 고등학교 때 한 두 번 얼굴 본 적 있었지만, 그건 지네트가 정우를 만나러 왔을 때 마침 근처에 있었건 것일 뿐, 감히 만났다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번에는 지네트와 정식으로 만나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20년 전부터 레코드판으로, CD로, DVD로 만나며 우상으로 삼아왔던, 아니 여신으로 삼아왔던 지네트를 말이다.

나의 온갖 생리 메커니즘들이 갖가지 예기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식은땀, 빨라지는 심장 박동, 잦은 잔뇨감 등등. 이 모든 생리 반응을 진정시키느라 나는 먼저 도착한 보람도 없이 약속 시간보다 5분 늦게 방의 벨을 누를 수 있었다.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누구냐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앨범 자켓이나 콘서트 포스터에서 볼 수 있었던 지네트의 실제 모습이 기적처럼 나타났다.

머리 속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우선 생각보다 몸집이 훨씬 작았다. 무대에서는 구두와 드레스 때문에 혹은 연주의 아우라 때문에 커 보였던 모양이다. 생각했던 위치보다 훨씬 아래쪽에서 창백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하얀 얼굴이 나타났다. 그 속에서 커다란 두 눈이 예리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각진 턱과 눈썹이 강인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돈 많기로 유명한 지네트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수수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기념품으로 받았을 것이라 생각되는 ‘I love Taiwan’ 이라는 알파벳이 적혀 있는 연 분홍색의 헐렁한 티셔츠와 무릎보다 조금 위에서 끊어진 연한 하늘색의 5부 데님을 입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는 날씬한 종아리와 아무런 장식이나 페디큐어 따위 없는 문자 그대로의 하얀 맨발이 드러나 있었다. 샌들이나 슬리퍼도 신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권오석 박사시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나도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 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늦은 시간에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양해는 제가 구해야 하는데요? 투어 일정이 빡빡해 이렇게 여유 없게 만나요. 참, 제 복장 이런 것도 좀. 한 시간 동안 드레스와 구두 차림으로 서서 연주하면, 어깨랑 발이 천근 만근. 그래서 숙소에서는 가능한 한 펄렁하게 하고 있답니다.”

지네트가 자질구레한 조사나 어미가 많이 생략된 한국어로 말했다. 그래서 이후 인터뷰는 아예 영어로 진행했다. 프랑스어로 하면 더 좋았겠으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다.

“아뇨. 오히려 분위기가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여 좋습니다. 참 티보 선생은 함께 오시지 않았나요?”

“아, 클로드는 이번 아시아 투어에 일정이 안 맞아서 함께 오지 못했어요. 저 혼자 돌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래서 이번 투어 프로그램은 전부 협주곡이죠.”

클로드 티보는 현재 프랑스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이다. 생상, 드뷔시, 라벨 등 프랑스 음악 연주에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자다. 지네트와 함께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여 20년의 세월을 함께한 음악적 반려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지네트 & 디누를 마치 관용어를 사용하곤 했지만, 실제로 지네트가 무대에 함께 오른 피아니스트는 대부분 클로드 티보였다. 심지어 그는 지네트와 한 집에서 산다. 동거 같은 것은 아니고, 세입자로서 그렇다는 뜻이다. 지네트의 집은 한국으로 치면 빌라 한 채다.

“자, 시작하죠.”

지네트가 소파에 앉은 뒤 발을 들어 올려 곁에 있는 작은 스툴 위에 놓았다.

“무례해 보여도 양해해 주세요. 공연 한번 하면 발이랑 종아리가 한 두 배쯤 부어 오르는 것 같거든요. 좀 편하게 있을게요.”

“괜찮습니다. 그럼 인사, 도입 다 생략하고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질문 드리겠습니다.”

지네트를 만난 감격에서 회복된 나는 인터뷰어로서의 면모를 되찾았다.

“정우와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뭐죠?”

“어머.”

지네트가 당황하며 순간 스툴 위에 올려놓았던 발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게 첫 질문인가요? 예상 밖인 걸요?”

“죄송합니다. 빨리 끝내려면 어렵고 민감한 질문부터 먼저 들어 가는 것이 좀 편해서요.”

“괜찮아요. 프랑스 사람은 단도직입적인 거 싫어하지만, 바로 말씀드리죠. 저는 디누와 결혼에 대해 생각한 적도 계획한 적도 없어요. 디누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그런 사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팬들은 당연히 두 분이 커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1989년 베를린 장벽 해체 기념 콘서트에서도 두 분은 수만 명이 보는 앞에서 심지어 위성으로 세계에 방송되고 있는 가운데 키스를 나누셨죠. 정말 감격스러운 장면이었습니다.”

“약속된 장면이죠. 공연의 한 부분이었답니다.”

“공연의 한 부분이라고요?”

“그때 디누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젊음과 사랑의 순결한 힘으로 가득 채우고 싶어했죠. 디누는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했어요. ‘사랑의 힘이 냉전의 벽을 허물었다. 사랑의 힘이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을 것이며, 우리는 어리석음을 몰아내는 사랑의 힘을 나누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음악이다.’ 이렇게 말이죠. 그런데 이 메시지에 대한 상징적인 퍼포먼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수맥만 명이 일제히 키스하는 퍼포먼스가 어떨까 제안하더군요. 저도 거기에 동의했고요. 결과적으로 크게 성공했죠. 그날 전 세계에서 위성방송으로 그 공연을 보고 있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우리의 키스를 따라 서로 얼싸안고 키스하며 감격했다고 하니까. 그게 전부예요.”

“아, 그러셨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전혀 수긍하지 않았다. 지네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정우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공연을 기획할 때 바로 곁에 있었기 때문에 그 공연의 전말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1989년 11월 9일. 당시 나는 TV를 통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수천, 수만 명의 동·서독 시민들이 얼싸안는 모습을 불안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1980년대는 이념의 시대였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했던 나는 동독이 무너진다는 것, 동유럽이 무너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본주의가 승리하다니, 자본주의가 승리하다니! 이게 내 심정이었다.

하지만 정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모든 굳어진 것은 사라진다. 그게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그 무엇이든. 두려움과 억압에 의해서만 지탱된 체제라면 자본가의 것이건, 노동자의 것이건 사라져야 마땅해.”

그리고 다시 침묵 속에 TV 응시.

정우가 벌떡 일어났다.

“독일에 가야겠어. 아니 동독에 가야겠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부터 시작해서 동독 지역을 돌면서 콘서트를 해야겠어. 12월 1일에 시작해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드레스덴에서 마무리하는 거야. 모든 공연을 무료로!”

물론 나는 말렸다. 정우는 이미 방학기간인 1, 2월, 7, 8월 단 넉 달 동안 세계를 돌며 40회나 되는 공연을 했다. 귀국할 때 모습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얼굴 반쪽짜리 허깨비 같았다. 그 상태에서 다시 두 달에 걸쳐 성주영, 정동진과 트리오 공연을 여섯 번 했고, 그 사이 사이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무료 음악회를 했다. 그렇게 12월 한 달 겨우 쉴 틈이 생겼는데 또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24일 동안 10회나 공연을 하겠다니, 이건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나는 일단 “~해야겠어.”라고 말한 정우는 절대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유나 알아보자 싶었다.

“왜 하필 동독이야?”

“독일은 곧 통일될 거야. 위로가 필요해.”

“통일은 축하할 일이잖아?”

“슬프기만 한 걸. 통일이 아니라 동독이 망해 합병되는 것이니까. 동독 주민들은 지금 환호하고 있지만 막상 그때가 되면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을 거야. 아니 어쩌면 이미 상처받고 있는지 몰라. 당장의 자유에 환호하다 다가오는 자유의 중압감에 두려워하고 있을지 몰라. 위로와 희망을 보여주고 싶어. 그들의 낙담을 어루만져주고 싶어. 오직 사랑, 사랑과 연대만이 그들이 무너진 세상을 버텨내는 힘이라는 것을 들려주고 싶어. 내 음악이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정우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내가 설득되었는지 따위는 확인도 하지 않았다. 내 대답이 나가기도 전에 그와 지네트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에이전트 미켈레 아고스티니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도 더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다. 나 역시 혼돈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한 달 전에 있었던 끔찍한 사건, 나의 대학 시절을 붉게 물들였던 열정과 이념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 사건, 바로 천안문 학살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독일에서 전학 온 성진이 가지고 온 광주 5.18 비디오를 보고 받은 충격이 나를 운동권 학생으로 만들었다.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만든 배후에 제국주의, 그리고 자본주의가 있다는 믿음으로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투쟁에 헌신했다. 그런데 그런 반제, 반자본의 보루로 여겼던 중국에서 인민을 향해 인민해방군이 총기를 난사했다.

정우는 나보다 먼저 학생운동에 투신했고, ‘건반 위의 체게바라’라는 별명으로 불릴만큼 좌파예술가로 유명했다. 그 충격의 무게가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느닷없는 동독 투어가 급조되었고, 아고스티니의 제안으로 투어의 첫 번째 공연을 동독 젊은이들이 자유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던 알렉산더 광장 야외공연으로 펼쳤다. 무료공연이지만 공연 실황 음반, 방송 중계권 등을 확보했기 때문에 결코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정우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의외로 철저했다.

1989년 12월 1일, 청중 수만 명으로 가득한 알렉산더 광장에서 정우는 쇼팽의 녹턴 6번,7번, 8번을 연주하면서 역사적인 공연의 막을 올렸다. 이후 모차르트의 소나타, 피아노, 오케스트라, 합창이 함께 연주하는 자신의 자작곡 등을 연주했다.

단언하는데, 그날 프로그램에 정우가 지네트와 함께 연주할 계획은 전혀 없었다. 워낙 급조된 스케줄이기 때문에 지네트와 조율할 틈도 없었고, 심지어 정우는 그날 알렉산더 광장에 지네트가 나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지네트가 무대 위에 올라온 것은 예상치 못한 해프닝이었고, 청중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의해 원래 프로그램에 없던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12 변주곡을 함께 연주했다. 그 2중주는 지네트의 계획에도 없었을 것이다.

지네트는 순전히 정우의 공연을 보고 싶어 혹은 무리한 일정이 걱정이 되어 자신의 투어 일정을 조정해 가면서 정우도 모르는 사이에 베를린에 왔던 것이다. 하필 그 자리에 악기를 들고 나타난 것은 계획이 있었단 뜻 아니냐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지네트는 어딜 가더라도 늘 악기를 가지고 다니는 버릇이 있다. 물론 스트라디바리는 아니고.

연주가 끝나자 정우는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박수갈채를 진정시키고는 “젊음과 사랑으로 반목과 증오를 물리칩시다.”라고 독일어로 외쳤다. 상황은 그 다음에 일어났는데, 한참 청중들과 사랑 타령을 외치며 광장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던 정우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지네트를 와락 끌어안고 열정적인 키스를 퍼부은 것이다.

수만 명의 관중과 위성중계를 보고 있던 수백, 수천만 명의 시청자들이 이 장면을 보았고, 마치 감염되거나 감전된 듯이 저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부둥켜안거나 키스하며 감동의 도가니를 만들었다. 아무리 봐도 그 상황은 절대 미리 준비하고 연출한 퍼포먼스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예기치 않게 와락 끌어 안기고 기습적인 키스를 받은 지네트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똑똑히 기억한다. 이게 만약 연출된 퍼포먼스였다면 그들의 출중한 연기력에 경탄해야 할 일이지만.

그런데 연출이라고? 어거지다. 하지만 지네트가 속내를 드러내지 않을 모양이니, 이것보다 더 직설적인 정공법이 필요했다.

나는 방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고 물음을 던졌다.

“정우를 사랑했나요?”

“네.”

나름 회심의 공격이었는데 지네트가 너무 쉽게 대답해 버려 김이 빠졌다. 좋다. 한 발 더 들이밀어 보자.

“좀 유치한 질문이지만 얼마나 사랑하셨죠?”

“나 자신보다도 더.”

이번에도 지네트는 아주 쉽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도 계속 밀고 들어가는 수 밖에.

“언제부터 사랑하셨나요?”

“1984년.”

1984년이라.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아녜스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마치 교대식이라도 하듯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던 지네트가 한국에 들어온 해.

하긴 그때 지네트는 귀국 목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디누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그럼, 그때 정우를 사랑해서 귀국하셨나요?”

“아뇨. 디누를 만나러 귀국한 건 사실이지만, 우린 서로 모르는 사이였죠.”

“전혀 알지도 못하는 디누를 만나러 파리에서 서울까지 날아오셨다고요? 거의 1년이나 연주 일정을 비워 두고서?”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지네트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의자 위에 걸쳐 두었던 다리를 끌어당겨 가슴에 붙이고 깍지 낀 자세로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혹시 잠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깨우는 게 옳을까 그냥 두는 게 옳을까 고민하기 시작할 정도로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정말 깨우기 직전에야 지네트가 다시 눈과 입을 열었다.

“미우가 떠나서 너무 슬펐어요.”

아, 미우!

그랬다. 1984년은 아녜스가 한국을 떠난 해이고, 지네트가 정우를 만난 해이지만 미우가 치명적인 질병으로 어이없게 그 찬란한 경력을 마무리해야 했던 해이기도 했다. 정우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해였다. 1월에는 치명적인 공연 실패, 2월에는 아녜스와의 결별, 그리고 6월에는 음악적으로는 어머니나 다름없었던 누나의 은퇴.

“너무 큰 충격이었어요.” 지네트가 말을 이었다. “미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연주자고 롤 모델이었으니까.”

아, 그 기억은 되돌리고 싶지 않았다. 청춘의 한 복판, 가장 예민한 시기에 터진 그 비극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어 내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을지 열어보기 두려웠다.

미우는 나의 사춘기 시절 거의 모든 것이었다. 미우의 상실은 나의 청소년기의 상실이나 다름없었다. 상념이 나를 사로잡아 그만 지네트가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잠시 잊어버렸다. 이런, 한심한 인터뷰어라니.

공기 속으로 흩어져가는 지네트의 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미우의 연주가 협주곡 보다 소나타에서 훨씬 탁월했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죄송합니다. 잘 못 들었어요.”

“미우가 협주곡 보다 소나타에서 더 훌륭했다고요.”

“아. 그랬군요.”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네트도 정확하게 그것을 말했다.

“그 차이가 뭘까요? 피아노. 디누의 피아노가 미우의 바이올린을 빛내 주었던 거죠. 만약 내가 디누와 함께 연주한다면 정말 멋질 거야,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때 정우 상태가 말이 아니었는데요?”

“그랬죠? 아녜스 떠나고 미우까지 떠나면서 디누는 완전히 침체되어 한 물 갔다, 얼굴 덕이다, 아이돌이다 등등.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죠. 그래서 바로 짐 싸서 귀국했어요. 아깝잖아요? 디누를 그렇게 버리다니? 내가 디누를 한번 살려보자, 뭐 이런 어줍잖은 생각을 했어요.”

“디누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 다음의 일이겠군요.”

“같이 연주해 보고 나서요. 우리는 강남역 근처 꽤 넓은 레스토랑에서 처음 만났어요. 내 친구 나경이랑 디누 친구라는 또 다른 남자 아이랑.”

친구라는 또 다른 남자아이? 허허, 이런, 지네트는 그게 나였다는 걸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하긴 그냥 누가 같이 나왔구나 했을 것이다. 정우 외에는 모두 부록에 불과 했을테니.

“그 레스토랑에서 어떤 일이 있었죠?”

나는 그때 바로 옆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뻔히 다 보고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그 레스토랑은 생음악으로 피아노를 연주해주는 곳이었죠. 마침 피아노 있겠다, 바이올린은 내가 들고 왔겠다, 우리는 억지로 용돈이나 벌자고 피아노 치는 기색이 역력한 알바생을 피아노에서 몰아내고 소리를 맞춰봤어요. 아, 그때 그 놀람이란. 디누는 파트너 따위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내 바이올린 소리가 노이즈가 될까 두려울 정도였어요. 몇 곡이나 연달아 연주했는지 몰라요. 피아노 소리가 너무 사랑스러워 그걸 듣기 위해 연주했어요. 느닷없이 레스토랑에서 음악회가 열린 꼴이 되었죠. 그러다 손님들이 저와 디누의 얼굴을 알아봤고, 쫓기듯 거기서 나와야 했죠. 그때부터 사랑했어요. 한국에 오래 머르기로 결심했죠.”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지네트는 지금 ‘사랑’이라는 말을 우리 같은 머글들과는 영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사랑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지네트가 말하는 사랑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캐어보고 싶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사용하여 사랑을 둘로 쪼개었다.

“그런데 좀 애매하네요. 그래서 누구를 사랑했다는 것이죠? 정우를 사랑했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정우의 피아노 연주를 사랑했다는 것인가요?”

“그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지네트가 깍지를 풀고 발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둘이 어떻게 분리될 수 있죠? 넌센스예요. 디누와 피아노는 분리할 수 없어요. 디누가 피아노 피아노가 디누죠.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지네트가 자신의 바이올린을 들어보였다. 나는 행여 그녀가 그 값비싼 악기를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조마조마했다. 기우였다. 지네트의 진짜 스트라디바리는 공연장에서 다음 공연장으로 삼엄한 경비와 함께 따로 이동했다. 이건 연습을 위해 가지고 다니는 복제품이었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 가지고 나간 악기도 이거였을 것이다.

“내가 얘고, 얘가 지네트죠. 누구도 이 둘 중 하나만 따로 떼어내어 사랑할 수는 없어요. 그건 사랑이 아니죠.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면 얘도 사랑해야 하고, 얘를 사랑한다면 나도 사랑해야 해요.”

“그럼 이런 저런 사고 때문에 정우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게 되었다면? 그래도 사랑했을까요?”

“실제로 디누가 피아노를 치지 못한 시간이 있었어요. 그게 생각보다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음악을 멈추진 않았죠. 지휘를 하고 작곡도 하고 제자를 가르쳤죠. 충분히 가치있는 일 아닌가요? 여전히 사랑했죠.”

“그럼 아예 음악을 하지 못하게 된 정우는?”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지네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 말을 가로 막았다. 놀랍게도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디누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요. 음악과 함께 와서 음악과 함께 살았고, 음악과 함께 떠났어요. 음악 없는 디누는 상상도 할 수 없어요.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어요.”

옳거니. 나는 지네트가 내가 친 올가미로 달려들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음. 그런데 정우는, 아니 디누라고 부르는 게 이젠 나도 더 편하네요. 여하튼 그 친구에게 음악이 없던 시절이 있었어요. 1989년 그 동독 투어가 끝날 무렵부터 1992년 여름까지2년 넘게 음악가로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죠. 아니 생사조차 확인이 되지 않았죠. 잠수도 완전 그런 잠수가 없었는데, 그때도 사랑했나요?”

“그때는... 그때 디누는.”

나는 지네트가 미처 뭐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말을 던져버렸다. 그것은 초강력 폭탄과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결국 유선이와 결혼했죠.”

던져 놓고 나니 이건 너무 잔인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폭탄이 아니라 생화학 무기였다.

이 말 속에는 지네트 당신은 디누가 음악가로서 거의 재기하기 어려워 보이자 냉정하게 버렸던 것 아니냐, 그래서 최유선이 그와 결혼하게 된 것이 아니냐, 그런데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애초에 둘은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고 연막 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힐난의 칼날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정해요.”

그런데 지네트는 너무 단호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함으로써 잔인한 물음을 던졌던 내가 쥐구멍을 찾게 만들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디누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때죠. 심지어 세상을 떠나고 난 지금보다도 더.”

“후회하나요?”

“아뇨.”

지네트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는 그 얼굴은 오욕칠정 그 무엇으로도 도저히 환원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음악 없는 디누? 그런 디누는 저와 함께 할 수 없어요. 의미도 없고요. 디누가 원하지 않았을 거예요. 디누와 저는 음악 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관계. 그게 아니라면 집착이고 고통일 뿐. 그래서 디누가 이 세상의 소박하고 잔잔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하며 놓아주었어요. 이미 할 만큼 했으니 쉬어도 되는 거죠. 몸과 마음 모두. 마침 유선이랑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들렸어요. 유선이는 내 동생이나 마찬가지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죠.”

“그럼, 만약 디누가 계속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면 두 분이 결혼할 수도 있었을까요?”

“아뇨.”

이번에도 지네트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음악을 함께 할 때 행복했어요. 생활을 함께 한다? 별로 행복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우리는 음악이 아닌 이유로는 가급적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죠. 생활은 함께 하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여기서 머글의 존재론적 한계에 부딪쳤다. 이런 것도 과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나는 사랑을 이런 의미로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네트는 이러면서도 사랑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어쩌면 그들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감정과 신체에 결박되어 있는 이른바 남녀 간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 그 너머에 있는 무엇, 누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격조건이 필요한 그런 것이었다. 지네트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인터뷰를 시작할 때는 사랑에 대해 물어보고, 정우의 음악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이 두개가 서로 뒤엉켜 버렸다.

처음 던졌던 도발적인 질문이 문제였다. 그렇게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걸 어떻게 되돌려 놓는담? 사랑이 음악, 음악이 사랑.

“연주 하나 해 드릴까요?”

절대 끝날 것 같지 않은 상념에 빠져들어 있던 내 정신을 번쩍 깨우는 말이 들렸다. 뜻밖의 말. 내가 감히 한 번 해 보고 싶었던 청이긴 하지만 그걸 지네트가 직접 말할 것이라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1:1로 마주 앉아서 직접 듣는 지네트의 연주라고?

“너무 폐가 되지는 않을까요?”

주섬주섬,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물론 속마음이야 당연히 듣고 싶었다. 어쩌면 내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저야 항상 연주하는 걸요. 앞에 누가 계시던 안 계시던. 어떤 곡을 할까요?”

“음. 생상 협주곡 2악장이 어때요?”

“직업 정신이 정말 철저하시네요.”

지네트가 빙긋이 웃었다.

“생상 콘체르토 3번 말씀하시는 거죠? 좋아요. 그럼.”

지네트는 내가 생상 협주곡의 2악장을 듣고 싶다고 한 이유를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 1994년 여름 어느 잡지에 실린 지네트의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내용은 이랬다.

‘저는 모든 연주를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바이올린으로 는 인간의 발성기관으로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바이올린 소나타가 피아노와의 대화라면 바이올린 콘체르토는 일종의 독백입니다. 피아노와 달리 오케스트라는 대화 상대라보다는 일종의 배경에 가깝죠. 저는 특히 생상의 협주곡 3번을 좋아합니다. 이 작품의 2악장을 연주할 때면 돌아보지 않는 존재에게 던지는 간절한 애원을 합니다.’

‘돌아보지 않는 존재’ 그것은 디누였다. 그렇다면 지네트가 그에게 던진 애원은 무엇이었을까?

음악의 길을 벗어나 생활인 권정우로 살아가려 하고 있는 디누, 그러나 그가 걸었던 음악의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직접 보아 알기에 차마 말로는 못하고 연주 속에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서 던져야 했던 지네트. 나는 돌아보지 않는 존재를 하이데거 철학의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엉뚱한 해석을 늘어놓는 이른바 인문학자들을 비웃으며 지네트가 연주한 생상의 협주곡을 수없이 반복해서 듣곤 했다.

“그런데. 오케스트라 파트가 없으니 좀 소리가 허전할 것 같은데. 오케스트라 파트는 마음의 귀로 들어주세요. 그런데 권박사님이 기억하고 있는 그 연주하고는 많이 다를 거예요.”

역시 지네트는 자신이 13년 전에 했던 ‘돌아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애원’이란 발언을 기억하고 있었고, 내가 이 곡을 듣고 싶어하는 까닭도 알고 있었다. 갑자기 정우의 말이 떠올랐다.

“지네트 앞에서는 완전히 투명해져야 해. 뭐든 꿰뚫어 보거든. 그래서 난 아예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 그리고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그 가벼움을 즐겨.”

“참, 권 박사님. 우리 로마에서 한 번 보죠.”

연주를 시작하려다 말고 갑자기 지네트가 뜬금없는 한 마디를 던졌다.

“네?”

머리 빨리 돌아가는 나조차 따라잡지 못할 정도의 비약이었다.

“우리, 로마에서 한 번 만나요.”

“저야 좋지만.”

“디누는 로마에서 성장했고, 몬테카리니 선생님을 만났죠. 이탈리아인이 청중에 섞여 있어도 공연을 취소하는 분이 디누를 보러 로마까지 온 거예요.”

“아, 그렇군요.”

그제야 나는 지네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네트는 이미 내가 가장 궁금해하던 질문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정우는 어디서 어떻게 음악을 배웠나? 지네트가 정우에게 준 음악적 영향은 무엇인가?

방금 지네트는 그 답이 로마에 있으며, 그건 이 자리가 아니라 로마에서 직접 말해 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생상 연주를 마지막으로 오늘 인터뷰는 끝내자는 완곡한 표현이기도 했다.

“오늘은 여기서 그만. 나머지는 로마에서!”

나는 즉시 지네트의 명령에 복종하여 조용히 몸을 바로잡고 연주에 몰두할 준비를 갖추었다. 나머지는 로마에서 듣기로 하고, 로마에서 만날 약속은 방학 일정과 지네트의 유럽 투어 일정이 잘 겹치는 날 중에서 잡기로 하고.

지네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지네트는 “로마에서.” 이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지네트의 연주를 바로 앞에서 듣는 순간 완전히 혼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연주를 듣고 나서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불필요하기도 했다. 연주 안에 하고자 하는 말이 다 들어있었으니.

지네트의 연주는 12년 전과는 전혀 달랐다. 애원이 아니라 공감이며 위로였다. 그 동안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내 가슴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던 한숨이 힘겹게 기도를 비비고 나와 밖으로 배출되었다. 그와 함께 눈물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와 속눈썹에 살짝 매달린 채 굴러 내릴 기회를 노리며 눈가를 적셨다.

이것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하지만 지네트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의 십분의 일도 듣지 못했다. 로마에서 나머지 이야기를 한다고 했으니, 지네트와 로마에서 만날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결국 해를 넘긴다는 뜻이다. 그럼 대체 이 책을 언제 다 쓴단 말인가? 이때 처음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이 작업이 엄청나게 길어질 것이라는.

그렇다고 놀고 있을 수 없으니 다음 인터뷰이를 만나야 했다. 내 기억이 멈춘 지점과 지네트 사이에 있는 존재.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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