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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소설 디누1부 27화 아녜스1

by 권재원

정우에 대해 계속 조사하려면 정우 음악 경력의 중요한 고리이자 한때 연인이었고, 최유선과 결혼한 이후에도 관계가 계속되었을 것이라 의심받는 아녜스를 만나야 했다.

문제는 내가 아녜스의 연락처도 주소도 알지 못하고, 알아낼 방법도 없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단서는 있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아녜스는 칼텍을 졸업했고 계속 거기서 연구했다.

마침 매부가 칼텍 안에 있는 미 항공 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에 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났다. 매부에게 메일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매부는 아녜스가 칼텍에서 유체역학과 음향학을 강의하고 있다는 정보를 건져서 보내주었다.

나는 겨울방학에 일정을 잡아 LA로 날아갔다. 매부가 알려준 주소를 찾아가 보니,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멀지 않은 롬바르디 로드라는 곳에 야자수가 심어진 넓은 마당을 가진 저택들이 나타났다. 그 중 빨간 지붕을 가진 저택이 내가 들고 있는 주소였다. 넓은 잔디밭 정원이 활짝 열려 있고, 집 앞에는 황토색 포드 레인저 한 대와 진주 색 프리우스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마당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어색하고 서투른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이게 한국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발음이 이상했지만 어쨌든 대략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실례지만 디누 친구 아닌가요? 미안해요. 이름은 잘 생각 안 나는데, 얼굴이 낯이 익어서요. ”

깜짝 놀라 소리 나는 곳을 돌아보니 동양계처럼 보이지만 백인 같아 보이기도 하는 여성이 환하게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 속 아녜스와 닮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20대 후반? 아무리 높여도 30대 초반? 아녜스는 나 보다 두 살 많은 1966년생이니 이미 마흔인데. 누구지? 딸이라기엔 너무 나이가 많고. 동생인가?

혹시나 싶어 한 번 던져 보았다.

“아녜스?”

“예스!”

진짜 아녜스였다. 맙소사. 이게 마흔이라고? 이런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세월도 이 바이올린 요정은 비켜간 모양이었다.

“알아보시네요. 그런데 미안해요. 디누 친구인건 아는데, 음…. 이름 기억 안나요. 얼굴 익숙한데…. 이름….”

더 이상의 한국어는 무리인 모양, 결국 아녜스의 말이 영어로 바뀌었다.

“오석이라고 합니다. 권오석.”

“아, 생각나요. 디누랑 같은 집안이라던 친구?”

“넓게 보면 그렇죠.”

“와우! 정말 반가워요.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디누 잘 아는 사람들 찾아다니면서 인터뷰를 하고 있습니다. 전기를 쓸 거라서.”

“와우! 디누 전기. 멋지네요. 저 만나러 미국까지 왔어요?”

아녜스가 눈과 입을 모두 크게 벌리면서 활짝 웃었다.

“그런 셈이죠.”

“너무 반가와요. 고맙고요. 참, 그럼 이럴 게 아니라 괜찮으심, 디너나 하면서 이야기할까요?”

“Why not?”

마침 나도 허기를 느끼던 터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아녜스가 계산한다면 말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실래요?”

잠깐 집에 들어가서 적당히 채비하고 나온 아녜스가 진주색 프리우스 문을 열었다.

“이 동네는 아무것도 없어서요. 다운 타운으로 가요.”

아녜스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유니온 스트릿에 있는 지중해식 레스토랑이라는 카페 산토리니. 아녜스 집에서 약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파사데나는 도시 전체가 서울의 구 하나 정도 밖에 안되는 작은 도시라 다운타운이라 해도 그리 멀지 않았고, 붐비지도 않았다. 어디를 가도 사람 투성이인 나라에서 이렇게 인구밀도 낮은 곳으로 오니 사람 마주치기 싫어하는 나한테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일단 자리를 잡고 식전주로 세리 한 잔을 마셨다.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고 나니 아녜스를 찬찬히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바이올린 요정이라 불리던 시절의 깜찍한 아름다움이 여전히 살아 있었고, 피부 역시 잔주름 하나 없었다. 다만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에 자주 노출된 탓인지 한국에서 봤을 때 보다 전반적으로 얼굴이며 어깨며 다리가 검게 그을려 있었고 기미도 살짝 눈에 띄었다.

“디누 전기 쓰는 이야기해 주세요.”

“음, 소설 형식의 전기가 정확한 표현이죠. 실제 인물들이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등장하지만 서술 방식은 3인칭 소설로 할 것이라서요. 실명을 사용할지 ‘달과 6펜스’ 처럼 가상의 인물로 바꿀지도 아직 고민 중입니다.”

“디누 음악재단에서 하는 일인가요?”

“아, 그 재단 만들어진 것 알고 계셔요?”

“그럼요. 저도 디누 재단 발기인이고, 5만 달러나 출연한 이사랍니다. 한 3만 달러 정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네트가 5만 내잖아요? 지기 싫어 저도 5만 냈죠.”

아녜스가 말 하고 나니 오히려 부끄러운 모양, 고개를 숙였다. 거 참. 유선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녜스를 그토록 싫어하고 경계하더니 돈 받을 일 있을 때는 거리낌 없이 연락했던 모양이다. 그나 저나 23년 전 남자친구의 기억을 위해 5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낸다? 이건 또 무슨 마음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 나도 모르게 불쑥 말이 튀어나갔다.

“계속 사랑했었나봐요?”

이게 원래 영어로 했던 말이라 우리 말로는 정확한 표현이 어려운데, 내가 구사했던 문장은 현재완료 진행형 시제였다.

아니, 하필 이런 질문을? 말을 던져 놓고도 후회했다. 마치 내가 아침드라마 작가로 디그레이드 된 것 같은 자괴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침 드라마가 그토록 욕을 먹으면서도 시청률을 유지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는 법이다. 우선 나부터도 아녜스 하면 제일 먼저 정우와의 애정 관계를 궁금해했으니 말이다. 당사자들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지만 사랑이야 말로 인류 공통의 관심사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그게 유명인의 일이라면. 유명인들의 운명이다. 소득이 있으면 세금이 있듯, 유명해졌으면 유명세를 치러야 한다.

그런데 아녜스의 대답은 뜻밖에 거침없었다. 지네트도 그랬는데, 그들 세계는 정말 우리 머글과는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녜스가 말했다.

“많이 사랑했죠. 그 때도 사랑했고, 헤어진 다음에도 사랑했고, 세상을 떠나고도, 지금까지도 계속 사랑해요. 디누의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어찌나 울었는지 아빠가 ‘맙소사, 내가 죽어도 저렇게까지 울지는 않을 거야.’ 라고 했죠.”

“두 분이 만났을 때 나이가….”

“열 다섯 때죠. 디누는 열 셋. 같이 활동한 건 나 열 일곱, 디누 열 다섯때.”

“그래요. 열 다섯.”

나와 정우보다 두 살 연상인 아녜스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수많은 기자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한국에 들어왔다.

아이돌 답게 “아버지의 나라에서 활동하고 싶다”, “한국이 너무 좋은 것 같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등등 기자들이 좋아할 말과 사진찍기 좋은 표정과 포즈도 잔뜩 던져주었다.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TV프로그램에도 나오고, 광고도 찍고 그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우와 듀엣 활동을 개시했다. 이게 뉴스거리가 되었다. 한국의 자랑 거리 듀오 MIU & DINU를 해체할 때 미우는 이렇게 말했다.

“2중주 보다는 협주곡 중심의 레파토리를 펴고 싶었고, 정우도 저의 반주자 보다는 장래를 위해 독주자로 나서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해체를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지? 정작 정우는 또 다른 듀오를 만들었다. 미우가 거의 남매 의절할 정도로 크게 화를 냈던 것으로 보아 정우와 아녜스 둘이서 결정한 것으로 보였다.

팬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오누이 보다 남녀 커플이 뭔가 스토리가 더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2중주라는 장르 자체가 그렇다. 모든 실내악의 주제는 악기들 간의, 악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 간의 대화다. 그런데 단 두개의 악기가 연주하는 장르라면? 사랑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특히 육중한 피아노와 갸녀린 바이올린의 조합이라 더욱 그렇고, 피아니스트가 남성이고 바이올리니스트가 여성이면 더더욱 그렇다.

당시 아녜스와 정우의 애정행각은 노골적이고 파격적이었다. 키스하다 나한테 들킨 것만 대여섯 번은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중학생들이 어디서 키스하는 장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무려 1983년의 일이다. 그 충격이 오죽 했을까? 그들의 모습은 순진하고 평범한 제5공화국 중학생들에게는 거의 충격과 공포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낯선 자극을 동화시켜 평형을 회복시킬 수 있는 개념적 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바로 ‘미국 아이’.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라 우린 외국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었다. 알고 있던 외국은 미국 아니면 일본이었으며, 미국 사람은 서양 사람을 모두 통칭하는 용어였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 문화는 모두 미국 것이었다.

“미국 여자애라 그래.”

이 한마디면 그 모든 파격이 다 이해되었다. 더구나 아녜스는 따지고 보면 일부만 한국인이고 얼굴에는 백인 모습이 꽤 많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조숙한 열애는 1년만에 파국을 맞았다. 100일만 지나면 이벤트를 하는 요즘 젊은이 기준으로는 무척 오래 갔지만, 연애를 하면 결혼까지 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순진한 80년대 중학생 눈에는 쉽게 달아올랐다 허무하게 꺼져버린 양은 냄비 같은 사랑이었다.

이후 아녜스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도 급격하게 식어서 한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다. 스물 셋에 공학박사인지 이학박사인지를 받았다는 단신을 신문에서 잠깐 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른이 된, 더구나 바이올린 대신 망치와 스패너를 든 요정에게는 별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저, 다음 질문 안 하세요? 나 말할 준비 다 되었는데?”

아녜스의 장난스럽고 발랄한 목소리가 들리며 나의 추억 상영관이 막을 내렸다. 나는 10대 소년에서 다시 삼십대 후반의 아저씨가 되어 파사데나로 돌아왔다.

“앗, 죄송합니다. 잠시 옛날 생각 좀 하다가.”

“어차피 옛날 얘기하자고 오신 거잖아요? 당연히 옛날 생각 하셔야죠.”

“그렇죠?”

“그럼요.”

아녜스가 입술 사이로 혀를 살짝 내밀면서 문자 그대로 베시시 웃었다. 끌어당기는 듯한 묘한 힘이 느껴졌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 순간만은 속담을 업그레이드하여 “웃는 낯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로 바꾸어야 했을 것이다. 나이 마흔에 악기 대신 망치와 스패너를 들어도 여전히 아이돌 시절의 힘이 남아있었다.

나는 그 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무적인 자세를 취하며 인터뷰어라는 본연의 자세를 회복했다.

“우선, 궁금한 게 이겁니다. 1982년 10월에 정우랑 듀오를 만들었잖아요?”

“10월 17일이 첫 공연이었어요.”

아녜스가 다시 기억력을 과시했다.

“네. 10월 17일.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해 6월까지만 해도 정우는 미우와 Miu&Dinu 라는 팀으로서 바이에른 국제 실내악 콩쿠르에서 우승 했거든요.”

“뭐가 문제죠? 바로 그래서 내가 한사코 디누와 같이 연주하려고 했거든요. 디누는 바이올린과 함께하는 2중주에서는 정말 최고였죠.”

“그러니까 그 모습이 마치. 음. 직접 말씀드리기 거북하네요.”

“아하~. 아이 갓 잇. 그러니까 우승팀이 두 달 해체되고, 각자 독주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는 발표가 나오자 마자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디누와 듀엣 하는 게 이상하다?”

“맞아요. 어떻게 보면 모양새가 마치.”

“디누를 누나한테서 가로챈 것처럼 보였겠죠.”

“굳이 말씀드리자면 그랬습니다.”

“그때 미우가 뭐라고 말 안 했어요?”

“당연히 엄청 언짢아했죠. 누나의 그때 워딩을 그대로 옮겨도 될까요?”

“물론이죠.”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지 않을텐데요?”

“어차피 옛날 일이잖아요? 괜찮아요. 미우 지금 덴버에 살고 있고, 지금도 콜로라도로 휴가 가면 종종 만난답니다. 아무 감정 없어요.”

“그럼 옮길테니 불쾌히 생각하지 마세요. 그때 미우 누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난 정우가 독주자의 길을 가라고 팀을 깼어. 그런데 이게 뭐야? 배울 것도 얻을 것도 없는 기능공 같은 아이랑 다시 붙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이렇게 말해 놓고 아녜스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그 반응도 모두 내 글의 소재를 캐어낼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도 아녜스는 생긋이 웃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그럼요. 사실 전해주시지 않아도 될 뻔했어요. 저도 그 말 들었거든요. 미우한테 직접, 바로 면전에서. 팀 결성 발표하고 몇 시간 되지도 않아 미우가 우리가 연습하고 있던 스튜디오로 왔어요. 화를 내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차분했죠. 하지만 방금 하신 그 말, 그 말을 저한테 직접 했어요. 그리고 그것 말고 다른 말도 했어요.”

“음. 괜찮으시면 뭐라고 했는지 여쭤 봐도?”

“이렇게 말했어요. ‘아녜스, 잘 들어. 넌 똑똑하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알 거야. 내가 디누를 놓아준 것도, 네가 디누를 얻은 것도 아니야. 내가 디누에게서 도망친 거야. 너는 디누 나라에서 살 수 없어. 이걸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았으면 해.’.”

“기분 나빴나요?”

“아뇨. 별로 진지하게 듣지 않았거든요. 내가 미우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화가 나는 게 당연했어요. 그 뭐냐, 한국 말로 ‘싸가지’ 없는 짓을 한 건 사실이고. 그래서 그냥 미우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다 들어주자. 하지만 그 말뜻을 새기지는 말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죠.”

그러나 나는 아녜스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아녜스에게 미우가 했다는 그 말 ‘놓아준 게 아니라 도망친 거다.’라는 말이 계속 전두엽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러고 보니 뭔가 퍼즐이 맞춰질 것 같기도 했다. 그 무렵 미우가 흐느껴 울었다. 내가 미우와 가장 친밀한 사이였던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리고 막상 그 팀이 깨진 이후 나는 미우와 다시는 그런 가까운 사이가 되지 못했다. 대체 저 말은 무슨 뜻이고,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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