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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소설 디누1부 28회 아녜스2

by 권재원

아녜스가 다시 나를 과거로부터 끌어 올렸다.

“미우가 도망쳤다고 한 말 생각하시죠?”

“네.”

이런이런, 아녜스는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예쁜 얼굴에 사람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여자를 한국에서는 여우라고 부른다고 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녜스는 이미 그 마음까지도 읽었으리라. 게다가 내가 알기론 영미권에서도 그런 여자를 Fox라고 부른다.

아녜스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1984년 1월에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내가 디누 나라에서 살 수 없다는 말. 그나마 1년 만에 알았으니 너무 늦지는 않았죠.”

“아, 1984년 1월이라면, 그때 그 공연?”

“그 공연. 지금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 공연. 심지어 저는 아직도 그날 일을 꿈으로 꾼답니다. 그래서 막 소리지르다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 일어나요.”

내 기억에도 생생했다. 1984년 1월의 그 공연. 나는 정우의 친구라는 이유로 가장 좋은 자리의 초대권을 받아 그들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의 4000석이 그야말로 빈 칸 하나 없이 꽉 찼던 그날.

불행히도 나는 아직까지도 그 보다 더 엉망인 연주회를 보지 못했다.

특히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정우의 피아노는 거침없이 달려가는데, 아녜스는 피아노와 맞추지 못하면서 연주의 밸런스가 무너져 차마 듣기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연주가 끝났는데도 형식적인 커튼 콜조차 한 번 없이 바로 객석에 불이 들어와버릴 정도로 완전히 망가져버렸던 공연.

“그런데, 그 공연도 공연이지만, 바로 한국 떠나셨잖아요? 정우하고도 헤어지고.”

나는 이때가 아니면 기회가 또 있을까 싶어서 그냥 대놓고 물었다.

“왜 그랬죠?”

“아유.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시면.”

아녜스가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내저은 손을 입에 대고 귀엽게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떠난 건 아니죠. 제가 한국 사람이 아니잖아요? 저는 미국 시민이고, 잠시 한국에 왔던 것이고, 더 있을 이유가 없어서 제 나라로 돌아 갔던 것 뿐이에요. 비자 문제도 있고.”

“왜, 머물 이유가 없죠?”

“음악가로서 한국에 갔죠. 음악가로서 디누의 파트너가 되고 싶었고. 그런데 그 공연 덕분에 내가 얼마나 큰 착각을 했는지 알게 되었어요.”

“공연 한두 번 망치는 거야 연주자에게 늘 있는 일 아닌가요?”

“그런 뜻이 아니랍니다. 미우가 했던 말 ‘너는 디누 나라에서 살 수 없어’라는 그 말이 뭔지 알았거든요. 저는 한국이 아니라 디누 나라에 살러 온 거였어요. 하지만 디누는 좀처럼 자기 세계를 보여주지 않았죠. 그냥 내 연주에 맞춰 갔고, 내 연주가 돋보이게 해 주기만 했어요. 그것 때문에 다투었죠.

나는 성을 내며 ‘너의 세계를 보여줘. 너의 음악을 연주해. 나는 디누와 2중주를 하겠어. 반주자 디누는 원치 않아.’라고 말했고, 디누는 ‘난 가장 아름다운 앙상블이 유지되도록 연주한 거야. 2중주란 그런 거잖아? 널 옆에 세워 두고 독주를 할 수는 없잖아?’ 라며 내 요구를 거부했죠.

하지만 저는 얼마든지 맞춰 갈 수 있으니까 마음껏 연주하라 부추겼어요. 그리고 그 결과가 아시다시피 그 모양이었죠. 그 날 디누는 진정한 연주가 무엇인지 보여 주었고, 저는 절대로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공연 한 번 망친 그런 정도가 아니었어요. 디누 나라 입국 심사에서 거부 당했던 거죠. 떠날 수 밖에요. 게다가 F1 비자로 체류하면서 예술 흥행 활동하는 것이 법에 저촉된다 만다 말도 많았고.”

“정우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아세요? 가신 분이야 모르겠지만, 남은 사람은 옆에서 보는 것이 더 괴로울 정도였답니다.”

“디누가 그렇게 힘들어 했나요?”

“제 영어 실력으로는 그때 정우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를 반의 반도 보여줄 수 없어서 애석하네요.”

“짐작했어요. 짐 쌀 때, 그리고 공항에서 디누가 너무 슬퍼해서 가슴 아팠어요. 하지만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디누는 내가 자기를 떠나서 슬퍼하는 걸까, 내가 음악을 떠나서 슬퍼하는 걸까? 디누는 누구를 사랑했을까? 아녜스일까? 바이올린 요정일까? 내가 미우 말대로 연주 기능공 이상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때도 디누는 나를 계속 사랑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 독하게 먹었어요. 나도 무척 슬펐지만.”

“그럼 디누와 헤어진 건가요?”

“아뇨, 원 천만에요.”

아녜스가 맑은 빛깔의 웃음을 터뜨리며 뜻밖의 대답을 했다.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클래식 아이돌로 군림했던 10대 시절 무대에서 자주 보여주었던 그 특유의 웃음.

“우린 계속 편지 주고받았어요. 가끔 전화도 했고요.”

“정우는 아주 끝난 것처럼 풀이 팍 죽어 있었는데요?”

“내가 함께 연주해야 한다는 디누 고집 때문이죠. 저는 여전히 디누와 잘 될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어요.”

“잘 된다면 어느 정도로?”

“음, 이렇게 말하자면 좀 부끄럽지만 저는 디누가 원한다면 아내가 될 생각까지 하고 있었어요. 음악 아니고도 내가 디누를 위해 하고 싶은 건 많았으니까. 살뜰하게 내조도 하고, 매니지먼트도 하고. 투어 하는 디누 곁에서 이런 저런 잡다한 어레인지 해주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죠. 하지만 디누는 음악을 떠난 것과 디누를 떠난 것이 같은 뜻이었어요. 내가 한국 떠난 다음에도 계속 연락해 온 것은 내 음악에 미련이 남아서 그랬던 것이지 나에게 애정이 남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어요.”

“정말 가차 없는 평가네요?”

“디누는 계속 졸랐어요. 바이올린을 잡아라, 듀오 계속 하자. 이런 이야기만 했지, 사랑한다, 어떤 선택을 해도 함께 할 거다 이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듣고 싶었는데. 하지만 지네트가 나타나면서 모든 게 끝났죠. 디누는 더 이상 내 음악을 원하지 않았고, 그건 곧 나를 원하지 않았단 뜻이죠. 하지만 저는 다른 방법으로 디누를 도와주었죠.”

“어떤 방법으로요?”

“엔지니어로서.”

“엔지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죠. 디누가 체형이 좀 독특해 공연장 피아노 의자가 잘 안 맞아 불편해 했는데, 제가 디누 체형과 연주 스타일에 딱 맞는 의자를 설계해 주었죠.”

“아, 정우가 공연갈 때 마다 가지고 다니던 그 의자?”

“네. 제 작품이랍니다.”

“아, 맞다. 프로무지카 홀도 설계하셨죠?”

“아유, 설계라뇨? 전 건축가가 아닌 걸요. 홀이 아니라 내부 음향 설계를 했죠. 소리가 객석 가장 구석까지 아름답게 전달되도록 반향판의 모양, 갯수, 위치 이런 것들을 잡아 주었죠. 원래 한 10만 불 정도 받아야 하는 프로젝트인데, 공짜로 해주었답니다.”

“그때는 감정이 다 정리된 상태였나요?”

“그건 비밀! 그땐 이미 디누가 결혼한 다음이잖아요? 노 코멘트. 아, 이건 확실해요. 디누는 지네트를 만난 다음부터 저를 편하게 대했어요. 디누는 음악과 여자가 하나일 때 사랑했지 그냥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니까요. 그 무렵 저는 디누가 지휘한 오페라의 소프라노 가수만큼의 의미도 없는 존재였답니다. 그래서 저도 도망친 거지만.”

“그래서라뇨?”

그러자 아녜스가 잔에 남아있던 와인을 단숨에 꼴깍 소리가 날 정도로 넘겼다. 나는 재빨리 병을 들어 잔을 채워주었다.

“디누의 여자가 된다는 건 절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니까요. 난 그럴 자신이 없었고. “

“절망?”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상대와 디누를 놓고 다투어야 하는. 심지어 질투조차 할 수 없는 경쟁자와 이 남자를 공유하고 항상 넘버 2에 머무르는 상황을 견뎌야 한다는. “

“그게 누구죠? 지네트?”

“아뇨. 지네트도 나랑 똑 같은 이유로 도망쳤는 걸요?”

“그럼 최유선은?”

“음. 최유선은 그걸 기꺼이 감수하기로 한 용감한 여성이고요. 언제나 두번째인 상황을 말이죠. 그 상대는 바로 뮤즈랍니다. 혹시 지네트도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

“어, 어떻게 알았죠?”

“디누에게 지네트는 지네트가 아니라 뮤즈의 화신이었어요. 그래서 지네트는 항상 뮤즈로서 살았죠. 하지만 지네트도 과연 디누에게 뮤즈이고만 싶었을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지네트가 보여주던 그 애매모호한 쓸쓸함이 떠올랐다. 지네트와의 인터뷰가 남긴 그 상큼하지 못한 뒷맛. 지네트가 뭔가 감추고 있다는 느낌.

“참 어렵죠? 디누의 여자가 되면 뮤즈를 질투해야 하고, 뮤즈가 되면 디누의 여자가 될 수 없죠.”

“너무 이기적이네요 그 자식.”

나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상대는 살아있는 여성들이잖아요? 그런데 체스 말처럼 너는 루크, 너는 나이트 이랬다고요?”

그러자 아녜스가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 모양을 만들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요. 내가 디누 생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 감사해요. 그리고 지금 마이클과 만나서 이렇게 행복한 가정을 꾸려 살고 있는 것도 감사하고요. 아 제 남편이랍니다. 그리고 여기, 제 아들 제이크.”

아녜스가 전화기에 저장된 남자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하하. 참 잘생긴 녀석이네요. 하긴 엄마가 이렇게 미인이신데 당연한건가? 참 그런데 아녜스, 그 바이올린은 지금도 갖고 계신가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과르네리 델 제수 쓰셨죠? 음악 포기하면서 경매에 넘기거나 하시진 않았나요?”

“아뇨. 아직 내가 가지고 있어요. 남편은 자기 사업 망할 때 대비한 비상금이라고 조크 하는데, 농담이 아닌 게, 지금 경매 붙이면 일단 200만 달러부터 출발할 걸요?”

“와, 굉장한 가격이네요.”

“델 제수는 숫자 자체가 적으니까요. 잘 보관해 두었다 제이크가 음악을 한다면 물려주고 아니면 디누 재단 통해 유망주에게 임대하려고요. 아무래도 임대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연주는 전혀 안 하세요? 아깝다.”

“무슨 말씀이세요? 연주 계속하고 있답니다. 연습도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요.”

“콘서트나 음반 소식은 못 들었는데요?”

“그런 활동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꼭 그런 활동을 해야 연주자라고 할 수 있나요? 내가 디누 세계에 들어가지 않은 까닭은 즐겁지 않아서였어요. 저는 갈채가 좋았고, 사람들이 제 연주를 듣고 행복해지는 게 좋았어요. 하지만 디누의 세계는 너무 어둡고 고통스럽고 무서웠어요. 디누, 지네트. 그들은 음악이라는 제단에 바쳐진 살아있는 희생이죠. 오, 노우. 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요. 즐겁게 연주할 수 있는 곳에서 부담없이 즐겁게 연주하며 살고 있답니다. 지역 사회에서요. 카운티에서 행사나 축제가 열릴 때 저는 가장 환영받는 게스트랍니다.”

“아름다우시니까.”

“어머, 그런 말도 할 줄 아세요?”

“정우한테 들은 말입니다. 정우가 중학교 때 아녜스에 대해 참 많은 말을 했는데, 그 중 절반이 ‘예쁘다’ 였거든요. 81년 브뤼셀 갔다 와서는 입만 열면 거기서 인형처럼 예쁜 아이를 봤는데, 바이올린 연주도 신기에 가깝더라 그랬거든요. 정우가 뮤즈만 사랑하고 여자는 관심 없었다? 에이, 아닐 겁니다.”

이 말이 주효했나? 아녜스와 나는 매우 빠르게 가까워졌다. 아녜스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아녜스도 디누의 옛 친구와 빨리 헤어지고 싶어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넓지 않은 파사데나의 페어 오크 가로를 나란히 걸었다. 30분쯤 걷다 보니 아름답게 나무들이 우거진 곳에 바 하나가 살포시 자리잡고 있었다.

“자, 내가 좋아하는 곳을 소개할 게요. 디누의 친구를 만났으니 그냥 디누라고 생각하고 한 잔 올릴게요.”

“차는 어떻게 하고요?”

“두고 가죠 뭐. 내일 운동삼아 걸어와서 회수하면 되요.”

“그럼, 뭐, 좋습니다. 저야.”

바의 이름은 ‘Est…’라는 의미심장한 단어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샴페인과 칵테일을 나눠 마셨다. 마치 인터뷰가 아니라 정우가 내 몸에 빙의되어 옛 여자 친구를 만나 추억을 나누는 시간 같았다. 아녜스도 디누를 투사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녜스에게 끌리는 나를 감추기 위해 대는 비겁한 변명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보호했다.

아녜스는 아름답고, 총명하고, 친절하고, 애교와 위트도 있었다. 정우가 왜 그토록 푹 빠졌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녜스가 남편 이야기, 그리고 자기 아들 이야기를 넌지시 비추지 않았으면 나도 너무 깊이 빠져 들었을지 몰랐다.

문득 정우는 이런 여성을 어떻게 그리 쉽게 놓아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슬피 울었으니까.

“오석, 그거 알아요?”

취기가 살짝 오른 아녜스가 말했다.

“내가 떠날 때 디누는 많이 슬퍼했어요. 그런데요, 붙잡지 않았어요. 가지 말라고 부탁하지도 않았어요. 이런 상황이 이해가 돼요? 슬퍼하기만 하고 붙잡지는 않고, 이게 뭐죠?”

“그걸 어떻게 이해합니까? 난 모르겠어요. 전혀. 이건 말도 안 되죠. 아녜스 같은 여성을 붙잡지 않다니. 그 녀석이 아마 잠깐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에이, 에이.”

아녜스가 마치 일본 만화 캐릭터가 “야레야레” 하는 것처럼 손목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디누는 언제나 정신이 맑아요. 술도 안 마시고, 늘 무서울 정도로 깨어 있었죠. 디누가 하는 말 한 마디, 행동 한 자락, 그 어디에도 우연은 없어요. 만약 디누가 가슴이 무너질 정도로 슬퍼 하면서도 붙잡지는 않았다면, 분명 그럴 이유가 있다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정우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섭다고요? 맞아요. 무서워요.”

아녜스의 목소리가 슬슬 흐느적 거리기 시작했다.

“나, 디누가 무서웠어요. 도망쳤어요. 도망쳤다고요. 사랑했지만 너무 무서웠거든요. 다들 도망쳤어요. 미우도, 나도, 지네트도, 그리고 유선이도. 유선이는 심했죠. 애들까지 싹 데리고 갔으니. 아, 디누는 너무 외로웠을 거예요. 그래도 난, 난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순간 나는 술이 번쩍 깨이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놀라운 단서를 하나 건진 것이다.

“잠깐, 잠깐, 방금 뭐라고 하셨죠? 유선이도 도망친 거라고요? 코벤트 가든에 자리가 나서 간 게 아니라?”

“틀림없어요. 이건 여자의 직감이라니까.”

“따로 유선이가 무슨 말 한 건 아니고요?”

“유선이 왜 나한테 말을 걸어요? 미우한테 들었어요. 콜로라도에 휴가 갔다 만났어요. 미우도 저처럼 즐겁게 연주할 수 있는 곳에서 연주하면서 살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말했어요.”

아녜스의 목소리가 점점 흐물흐물해졌다. 슬슬 분위기가 피츠제랄드 초기 소설 같은 분위기로 흘러갔다. 냉각이 필요했다. 나는 아녜스가 젤다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고개를 마구 흔들어 술기운을 흩뿌리면서 잘라 말했다.

“그렇군요.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언젠가 신문에서 아녜스의 IQ가 웩슬러 방식으로 156이네 160이네 하는 기사를 봤던 기억이 났다. 영리한 아녜스가 내 속뜻을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녜스가 딱 정색을 했다.

“뭔데요?”

“음. 그러니까.”

막상 말을 꺼내려고 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빌어먹을 영어. 이럴 줄 알았으면 학원이라도 다니고 그럴 걸 그랬다. 나름 영어를 좀 한다고 생각했는데 술기운이 오르니까 가물가물하기만 하고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뇨. 아뇨. 말하지 말아요.”

아녜스가 서글프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무우사 디누 딜렉시. 세드 푸이 헤베.”

“네? 그거, 지금 라틴어 하신 겁니까? 무슨 뜻이죠?”

“아, 별 말 아니예요.”

아녜스가 고개를 흔들며 잠시 도망갔던 쾌활함을 소환했다.

“자, 칵테일이나 한 잔 더 할까요? 제가 다 계산할게요.”

그렇게 우리는 몇 잔을 더 마셨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다른 클럽도 들렀다. 마침내 아녜스가 LA한인 코뮤니티에서 배웠음에 틀림없는 말인 “야, 3차 가자, 3차. 누나가 쏜다.”라고 외치는 것까지 들었다. 그렇게 한 바탕 피츠제랄드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노트북을 꺼내 들고 구글 번역기를 실행했다. 그제야 나는 아녜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냈다.

그 라틴어를 한국어로 옮기면 이랬다.

“디누는 뮤즈를 사랑했지만, 나는 헤베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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