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자아가 만들어낸 재판관이 증언 수집을 명했다. 그것은 정언명령이며, 반드시 이행해야 했다.
만나야 할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정우의 스승인 베네디토 몬테카리니와 볼프강 지히발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미우와 아녜스는 더 이상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지 않다. 음악가로서 정우와 함께 했고, 아직 음악가로 활동하는 존재는 단 한 명 지네트 뿐이었다. 권정우의 일생이라면 내 기억만으로 충분히 재구성할 수 있지만 디누의 일생은 지네트를 통하지 않고 재구성도 이해도 불가능했다.
나는 지네트 공식 홈페이지를 열어 투어 일정을 살펴보았다. 지네트는 1988년 이후 한국에서 공연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이나 타이완 공연 때 내가 날아가서 접선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타이페이, 오사카, 도쿄에 공연이 잡혀 있었다. 이 중 가까운 오사카, 도쿄 공연은 애석하게도 날짜가 학기중이라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다행히 타이페이 공연이 아슬아슬하게 개학 전에 있었다.
그럼 그때 타이페이로 날아가서 지네트를 만나기로 하고, 남은 기간 동안 할 일을 찾았다.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가능한한 많이 소화하는 쪽으로 인터뷰 스케쥴을 잡았다.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중 음악과 관련해서 정우와 교류가 많았던 사람을 찾아보니 성주영 교수가 눈에 들어왔다. 대학에 왜 다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땡땡이를 치던 정우가 유일하게 꼬박꼬박 참석했던 수업이 성교수 -당시는 강사였다-의 실내악 강좌였기 때문이다.
나와 정우의 친구인 성진의 사촌 누나이기도 한 성교수는 정우와 연주회 무대에 여러차례 함께 오르기도 했다. 정우와 함께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는 미우, 아녜스, 지네트 외에는 성교수가 유일했다.
정우와 같이 공연한 횟수로 치자면 오히려 지네트보다 많았다. 트리오 연주회를 여섯 번 정도 했고,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연주회를 세 번인지 네 번인지 했다. 정우가 피아노 연주를 두려워하던 시절에는 현악 사중주단 활동을 같이 하기도 했고, 정우가 오케스트라를 창단할 때 기꺼이 제1바이올린 수석을 맡아 정우 지휘봉 아래 앉기도 했다.
성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캠퍼스 전체가 열 섬이 되어버린 서울대학교 예술관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야 했다.
“진이 친구라니 더 반갑네요.”
“네. 진이는 잘 있죠?”
“음. 몸이 전혀 낫질 않으니 밖에서 보면 잘 있다고 하긴 좀 그런데, 본인은 마음이 편하다고 하니 정신적으로는 잘 있다고 봐야겠죠?”
“요즘 진이 책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저도 몇 권 사서 읽었습니다. 진이 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쩌면 몸을 불편하게 해서 책을 더 많이 쓰라고 하느님이 빅 픽쳐를 그리신 거였는지 모르죠. 자, 그럼 본론으로 갈까요? 권박사님이 알고 싶은 게 뭐죠?”
“음대생으로서 정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지 궁금하네요.”
“정우가 유일하게 꼬박꼬박 챙겨 들었던 수업이 교수님 실내악 강좌였거든요. 선생님으로서 정우에 대해 생각나는 것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디누를 가르쳤다고요? 무슨 그런. 아 하하하.”
대답대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그러시죠?”
“미안해요. 갑자기 빵 터져서 놀랬죠?”
내 낯빛이 변한 것을 보고 성교수가 당항하며 억지로 웃음을 눌렀다.
“아니, 공연히 그런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니고요, 정우가 대학시절 교수님 수업은 꼼꼼히 챙겨 들었던 기억이 나서요. 이렇게 웃으실 줄 몰랐습니다.”
“아, 미안해요. 그런데 그게 알고 보면 참 그래서. 이거 실망시켜 드릴 것 같은데.”
“실망해도 좋으니 듣고 싶습니다.”
“디누는 제 수업에 학생으로 참석한 게 아니었어요. 형식상으론 학점 신청해서 온 거지만, 저한테 배우러 온 게 아니었죠.”
“그럼 뭐죠?”
“피아노가 들어간 실내악 코스를 열고 싶었어요. 피아노 쪽 선생님과 협동 과정을 열어야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어요. 그때만 해도 제가 일개 강사 신분이라 교수님들 협조는 커녕 뵙는 것도 어려웠죠. 그때 번뜩 드는 생각이 디누였죠. 디누는 연습실에서 만나 안면을 텄거든요.”
“그러니까 정우는 협력 강사 역할을 했던 거네요?”
“윈윈이죠. 나는 협력 강사를 얻고, 디누는 그렇게 학점을 채우고. 그 강좌가 얼마나 인기였는지 몰라요. 당연히 나 보러 온 학생들은 아니었죠. 디누와 악기를 섞어 볼 수 있는 기회인데 누가 그걸 놓치고 싶겠어요? 음대생 아닌 여학생들까지 청강시켜 달라고 졸라댔죠. 참, 이거 오래된 건데, 한번 보실래요?”
성교수가 책장을 뒤지더니 포스터 하나를 펼쳐 보였다. 한 눈에도 낡고 옛스러운 디자인으로 도색된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피아노 3중주의 밤. 베토벤 피아노 3중주 No.7 대공, 슈베르트 피아노 3중주 no.2 D.929, 브람스 피아노 3중주 no. 1 op.8/ 주최: (사)한국 실내악 연구회. 협찬: 서울특별시. 바이올린 성주영(서울대 강사), 첼로 정동진(경희대 교수), 피아노 디누. 1988년 10월 1일 목요일 19시30분.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와, 생각만 해도 멋진 공연이네요.”
“그럼요. 얼마나 멋진 공연이었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연주회를 매달 두 번씩 여섯 번이나 열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매달 여섯 작품씩, 반년 만에 작품 열 여덟 개를 공부한 셈이에요. 베토벤 일곱 곡, 슈베르트 세곡, 브람스 세곡, 슈만 세곡. 이게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이런 대작들은 한 달에 하나 마스터하는 것도 어렵거든요.”
“정우라면 가능했을 겁니다.”
“그렇죠? 그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네요. 처음에는 불가능한 계획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디누가 가능하다고 했고, 우리도 디누가 있다면 가능하다고 믿었죠.”
“아, 저 공연시리즈를 정우가 기획했다는 말씀이시죠?”
“우습죠? 학부생이 교수들을 이끌고서 연주회를 기획한다는 게? 하지만 우리는 학부생 정우가 아니라 피아니스트 디누와 함께 작업한 거니까. 그래서 동등한 자격으로 연주에 임했죠.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나하고 정동진 교수 - 음, 이 사람 지금 제 남편인데-는 디누가 리드하는 대로 연주했죠. 우리가 레슨을 받은 셈이죠. 실망했죠? 도리어 내가 배웠다고 하니?”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조금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 “교육학 박사로서 말씀드리는데, 배움과 가르침은 분리된 행위가 아닙니다. 잘 배웠다고 느끼는 사람이 잘 가르칠 수 있죠. 교수님은 분명 정우에게 좋은 선생님이셨습니다. 정우에게 판을 열어 주셨으니까요.”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가 디누 덕을 많이 봤죠.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무슨 돈으로 그렇게 많은 공연을 할 수 있었겠어요? 디누가 나서 준 덕분에 스폰서가 붙었고, 여섯 번 공연이 모두 매진되었죠. 그 많은 사람들이 누구 보러 왔겠어요? 아 참, 이거 말고도.”
성교수가 다른 포스터도 펼쳐 보였다. 먼지들이 마치 살아있는 미생물처럼 연구실 안에서 자유 비행을 했다.
“이것도 있어요.”
포스터에는 젊은 성주영 교수와 아직도 미소년 티를 벗지 못한 정우가 나란히 서 있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연주회 1987년 10월 4일 no.1,2,3,5번’봄’/ 11일 no.4, 6, ,10번/ 18일 no. 7, 8, 9’크로이처’ 19시30분.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바이올린 성주영, 피아노 디누.’
“와, 이것도 엄청난 연주회네요?”
“그러게요. 지금 생각해 봐도, 어떻게 이런 게 다 가능했나 싶어요. 사실 이 시리즈가 트리오 연주회의 초석이 되었죠. 이거 마지막 공연하고 꽃다발 들고 사진 찍어주러 왔던 정동진 선생하고 디누가 쿵짝이 맞아 다음엔 꼭 첼로 끼워서 하자 어쩌자 이런 말이 오가면서 아까 그 트리오 기획이 나왔죠. 이제 내가 왜 웃었는지 아시겠죠? 아무리 봐도 내 디누가 날 가르치고 교수로 만들어 준 셈 아닌가요?”
진상이 밝혀졌다. 정우는 실내악 교실에 배우러 간 것이 아니라 연주하러 갔다. 하지만 덕분에 엄청나게 많은 공부를 한 것도 틀림없다. 함께 연주하고, 함께 공부하고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과정에서 공부했다. 언제나 누군가의 스승이었고, 언제나 누군가의 제자였다.
그런데 정우는 왜 성교수에게 그렇게 많은 도움을 주었을까? 친구 진이의 사촌누나라서?
“궁금하시죠?”
느닷없이 성교수가 먼저 물었다.
“네?”
“디누가 나를 왜 밀어주었는지 궁금해 하신 거 아니었어요? 아, 놀랠 필요는 없어요. 다들 그걸 물어보니까요. 심지어 응큼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응큼한 생각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시 성교수가 강사였다고는 하지만 스물일곱 밖에 안 되었으니 따지고 보면 젊은 아가씨였고, 친구 누나 판타지에. 아니지 아니야.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불쾌한 한국 드라마적 감각을 떨쳐버렸다.
성교수는 내가 그런 불측한 생각을 했는지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평온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냥 앙상블이 즐거웠기 때문에, 새 작품 하나하나 깨쳐 가는 게 행복해서 계속 했을 뿐이랍니다.”
“네?”
“아까 그 트리오 연주회요. 원래 우리는 한 번만 할 생각이었어요. 그 포스터에 나온 프로그램으로 말이죠. 그런데 디누가 ‘그 동안 저는 바이올린이랑 2중주만 했는데 트리오가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어요. 한 번으로 너무 아쉬우니 베토벤 트리오 일곱 곡 다 하면 안 될까요?’ 저는 주저했는데, 정교수도 꽤 진취적인 분이시라 둘이서 맥주 몇 잔 마시면서 슈베르트, 브람스, 슈만이 추가 되었죠. 만약 내가 브레이크 안 걸었으면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까지 가서 여섯 번이 아니라 한 스무 번쯤 공연 하자고 했을 걸요?”
“그런데 정우도 정우지만 교수님이나 정교수님도 참 대단하시네요.”
“저희가요?”
“그래도 두 분은 교수이셨는데.”
“아, 그때 나는 강사.”
“그럼 선생님으로 하죠. 두 분 다 선생님들인데, 아무리 디누라도 학부생인데, 그렇게 흉허물 없이 대해 주셨잖아요? 내가 아는 우리나라 교수님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아주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엄청 집착한다는 느낌이었는데.”
“저희도 별로 다르지 않아요. 저희가 겸손하거나 개방적인 게 아니고, 디누가 저희를 그렇게 만들었죠. 음악만 느껴졌고, 경외감마저 느끼게 하는 힘이 있었죠. 꼼꼼하게 분석해 놓은 악보의 메모들을 보면, 악보 속에 들어가서 한바탕 탐험을 하고 온 것 같았어요. 그런데 막상 연주해 보면 청중한테는 임프로바이젼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들렸거든요. 놀랍지 않나요? 이 이율배반의 아름다움이? 참, 그러고 보니 이제 생각이 났네요. 이 책 꼭 보여드리고 싶은데, 한 권 가져 가실래요?”
성교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관악산의 작은 봉우리 하나가 살포시 들여다보이는 창문 옆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책들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갈색 톤으로 양장이 되어있는 두꺼운 책이었다. 게다가 막상 책을 받고 나니 온통 영어로 되어있었다. 책 제목은 이랬다.
‘Planned Improvisation: The Piano- centered interpretation of romantic Trios written by Dinu (edited by J. Sung & D. Chung)’ 굳이 옮기자면 ‘계획된 즉흥성: 낭만주의 3중주곡에 대한 피아노 중심적 해석. 디누 짓고 성주영, 정동진 엮음’ 정도 되겠다. 책을 넘겨보니 온통 악보와 악보에 달려있는 주석들로 빽빽했다. 음악가, 그것도 실내악을 전공한 음악가가 아니면 구태여 사서 볼 필요가 없을 책이었다.
“아니, 정우가 언제 이런 책을 썼어요? 정우가 책 쓴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었거든요?”
나는 놀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해서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디누가 직접 쓴 책은 아니예요. 1988년에 연주했던 트리오 열 여덟 곡에 대한 디누의 해석과 노트를 엮었어요. 그때 디누가 남겨 놓은 악보들을 보고. 거기에 연주회 준비하면서 우리한테 해 준 이야기, 지시사항 이런 것까지 다 정리했죠.”
“정우가 메모한 악보들은 어떻게 구했는데요?”
“그냥 두고 갔어요.”
“네?”
“수많은 메모가 깨알같이 적혀 있던 그 많은 악보들을, 디누는 공연 끝나자 그냥 두고 갔어요. 잊어버렸거나 다시 볼 필요가 없었거나. 저희가 양심 없는 사람들이었으면 그걸 밑천 삼아 우리 업적인 양 꾸몄을 거예요. 그냥 잘 간직했죠. 디누가 이렇게 빨리 갈 줄 몰랐죠. 서른 다섯이라뇨. 우리 부부는 너무 슬프고, 심지어 원통해서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통곡했어요. 그러다 그 메모와 해석을 정리해 출판하기로 했답니다. 기념비 세워주는 기분으로.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출판하려 하지 않더군요. 할 수 없이 미국에서 출판했어요. 책을 보면 디누의 음악관이나 작품을 해석하는 원리, 연주 방식이나 스타일 같은 것을 잘 알 수 있어요.”
나는 입을 귀에 걸고 계속 고개를 숙여가며 인사를 했다.
“이런 책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꽤 전문적인 책인데, 괜찮으시겠어요?”
“공부해 가면서 볼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 그런데 궁금한 게 또 있는데.”
“네.”
“가르치지는 않았다 하셨는데, 그럼 음악 관련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나요?”
“그거야 뭐. 내가 특별해서라기 보단, 디누가 원래 그렇잖아요? 음악 이야기 밖에 안하잖아요? 상대가 누구건.”
“그럼 정우가 몬테카리니한테 어떤 레슨 받았는지는 혹시 말 안 하던가요?”
“아, 했어요. 우리가 베토벤 소나타 시리즈 연주 할 때가 막 몬테테카리니 레슨 마치고 스위스에서 들어왔을 때거든요. 당연히 물어봤죠. 그런데, 같이 알프스 산에 오르고, 스키 타고, 그리고 낚시랑 자동차 운전 배웠다고 하던데요?”
“음악은 안 배우고요?”
“지휘 공부를 했다네요. 디누가 스위스에 와 있는 걸 알고 볼프강 지히발 선생이 와서 살다시피 했다더군요. 지히발이 디누를 많이 아낀 건 잘 아시죠? 그래서 지휘 공부랑 작곡 공부 엄청나게 많이 했다고 하더군요.”
“아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또 봬도 괜찮겠죠?”
“권 박사님이야 언제든지 환영이죠.”
인터뷰 성과가 없진 않았다. 일단 정우가 어떤 식으로 공연을 기획했고, 작품을 해석했는지에 대해 현장 스케치성 증언을 많이 들은 것은 큰 소득이었다.
그렇게 잠시 깊은 감격에 잠겨 있었는데, 느닷없이 문자 메시지를 알리는 진동이 바지 주머니를 뒤흔들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전화기를 꺼내 보니 성교수가 보낸 문자였다.
‘아 참. 아까 잊어먹고 말씀 못 드렸는데, 그때 비올라 전공하는 신유미란 아이가 디누랑 아주 가까운 사이였어요. 디누 연습실에 종종 들어가곤 했는데.’
중요한 정보였다. 어떤 연주자의 음악세계를 그 뿌리부터 알고 싶다면 공연이 아니라 연습시간을 봐야 한다. 몬테카리니의 그 차가울 정도로 완벽한 연주의 비결이 꾸준히 날마다 시간을 정해놓고 했던 연습에 있었음을 사람들은 이외로 잘 모른다. 그의 문하생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레슨을 받는다기 보다는 몬테테카리니가 평소에 어떻게 연습하는지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의미다. 정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몬테카리니의 일상적인 연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배울 것은 다 배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우의 연습 장면은 어땠을까? 의외로 정우의 피아노 연습 장면의 목격자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어떻게 연습하지 않고 연주할 수 있겠는가?
신유미라면 나도 잘 안다. 프로뮤지카 서울의 비올라 수석이니까. 이하람 간사로부터 신유미의 주소와 연락처를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 나는 그 날 바로 신유미가 살고 있는 잠원동으로 달려가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더욱 고마운 것은 이하람이 지네트의 아시아 투어 일정에 맞춰 타이페이 왕복 항공권과 숙소까지 구해주었다는 점이다. 타이페이 국립 콘서트 홀에서 열리는 지네트의 공연 티켓도 구해 주었다. 프로그램은 지네트가 타이페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브람스의 D장조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지네트 선생님하고 통화도 다 했어요. 그날 공연 끝나고 나서 10시 반에 셰라튼 호텔에서 뵙자고 하시네요. 호실은 제가 문자로 넣어 드릴테니 그리로 찾아가심 되고요. 인터뷰 시간은 따로 정하진 않았는데, 잠들 때 까지라고 하셨어요. 졸리면 바로 중단하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