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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김무명 Jan 22. 2021

#4. 초등학생 알바생

평범함의 범주에 들어가기 위한 필사의 노력

내가 지나온 길에 대해 기록하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다. 기억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통해 내면의 나를 좀 더 깊이 알아가는 중이다.


평범함의 범주에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나의 시간들이, 나와 같은 처지의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오늘도 이야기를 이어간다.





초등학생 알바생



취업 전까지 콜 센터, 택배 상하차, 화장품 물류 센터, 술집, 엑스트라, 건설 현장, 피시방, 비닐하우스, 과외, 편의점, 생동성, 전단지, 시험 연구원, 대형마트 판촉, 선거 관련 사무직, 홈쇼핑 회사 사무직, 각종 음식점 등 대략 20가지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르바이트에서 했던 일들과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몇 편의 글이 될 것 같다.


아르바이트를 처음으로 시작한 것은 초등학생 때였다. 초등학생 때 용돈이 따로 없었기에 먹고 싶거나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부모님 식당의 잔돈 통을 뒤적여서 샀다.

© nmqseps, 출처 Pixabay


삼만 원이 넘어가는 비싼 장난감이나 손목시계가 갖고 싶을 때는 친구와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500장을 붙이는데 오천 원을 받았다. 학교가 마치면 5층짜리 아파트부터 복도식, 계단식 고층 아파트까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당시엔 집이 어려워서 그랬다기보다는 나름의 놀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끝나면 오락실도 많이 갔다.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진정한 아르바이트 라이프가 시작됐다. 맥줏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시급이 삼천 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열심히 안주를 만들고 한 달에 40만 원을 받으면 부모님께 20만 원을 드렸다.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의 가스나 수도가 끊길 위기가 많았기 때문에, 그 당시 나에게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스무 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다. 서울로 옮겨오면서 거주지뿐만 아니라 학비부터 생활비, 학원비 등 경제적인 부분까지 완전하게 독립했다.


© franki, 출처 Unsplash


학기 중 평일에는 과외를 하고 주말에는 편의점이나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방학 때는 대형 식당이나 물류센터 등 시급이 높은 알바를 하면서 틈틈이 단기 아르바이트도 했다. 늘 바쁘고 시간이 부족했다.





가난도 습관이다



자의든 타의든 무언가 오래 지속하게 되면 습관이 된다. 돈을 모으는 소비와 저축 습관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가난도 습관이 된다.


대학 시절 이렇게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냈는데, 왜 나는 그 돈을 모아 학비를 갚지 않고 이천만 원의 학자금 대출을 받게 되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는 대출이 두려우면서도 너무 익숙했다.


가정폭력이나 알코올 중독처럼 가난한 환경도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기가 쉽다. 끔찍하게 혐오하면서도 그런 환경에 너무 익숙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가게를 운영할 때 부모님은 수중에 단 돈 십만 원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모으려고 하면 갚아야 하는 외상과 대출이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돈은 항상 눈 녹듯 사라졌다. 통장에는 돈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 Free-Photos, 출처 Pixabay


이러한 상황에서, 부모님께 소비와 저축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돈을 모아본 경험도 없었다. 돈이 있으면 써버렸고, 돈이 없으면 쓰지 못했다. 대출은 내가 갚아야 할 돈인데도 마치 남의 일처럼 여겨졌다. 나에게는 대출이 불편하지 않았다.


선배들은 좋은 직장에 들어갔고 연봉을 들어보니 취업하면 학자금 대출 정도는 금방 갚을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이 조금이라도 모아지면 충동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했다. 잔고가 0원이 될 때까지 무계획적으로 지출했다. 여행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쇼핑도 하고, 버는 돈을 족족 다 써버렸다.


친구들을 만날 때도 계산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중, 고등학교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가난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지 않은 것 같았다.


장학금을 받은 적도 몇 번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비는 학자금 대출로 충당했다. 거기에 생활비까지 추가로 대출했다. 학자금 대출 시 생활비 항목으로 한 학기당 100~150만 원까지 추가로 대출받을 수 있었다.


© mmi9, 출처 Pixabay


어릴 때 그렇게 고생했으면서 어떻게 또 대출의 구렁텅이로 들어서나 싶겠지만 졸업하면 나도 잘 풀릴 줄 알았다. 그러한 기대로 대학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왔었고, 졸업하면 내 인생도 어느 정도 보장받을 거라는 착각을 했다.


대학 시절 학자금 대출 외에도 대출을 받아본 경험도 있다. 2013년 3학년 때 집안 사정이 극도로 안 좋아졌다. 아버지의 요청으로 집의 파산을 막기 위해 2 금융권에서 1,400만 원을 대출받아 급한 불을 껐다. 간신히 집이 팔려 빚은 바로 갚았지만, 아찔했던 경험이다.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공부해서 장학금 타는 게 낫지 않냐'는 말



학자금 대출을 받더라도 생활비는 필요하니 아르바이트를 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장학금과 취업을 생각하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다.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늘 바쁘고 피곤했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막연하게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물론 지칠 때도 있었지만 하소연하거나 도움받을 사람은 없었다. 모든 선택과 결정, 그에 따른 책임까지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아르바이트할 노력으로 공부해서 장학금 타는 게 낫다는 말이 쉽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나름 성실하게 공부하고 일했지만, 졸업과 동시에 2,000만 원이 넘는 학자금 대출이 생겼다. 어깨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인간은 어떠한 환경이든 적응한다. 어떠한 환경이든 삶의 가치를 찾아내서 생존해 나간다. 살아가기 위해 작은 것들에서 행복을 찾아내고, 더 고통스럽지 않은 현재에 감사하며 버텨낸다. 하지만 견딜 만한 고통은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상황을 유지시킬 뿐이다.


나에겐 가난이 점점 익숙해졌다. 불편하지 않은 환경은 개선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까지 여러 아르바이트를 해보면서 경험한 바를 말하자면, 비정기적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은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나 또한 그랬다.


하루에 10만 원 20만 원을 버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조금만 모으면 쉽게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비정기적인 수입은 들어오고 나가는데 계획이 없다. 하루 일당은 크게 느껴진다.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일단 소비하고 저축해도 되겠다는 안일한 생각을 갖게 된다.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소비한다. 돈이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쓴다. 힘들지만 버틸만하다.


가난한 사람은 힘들게 벌어서 쉽게 쓴다. 그래서 더 가난해진다.




... 5편에서 이어집니다.


#5. 고백에 의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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