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수암골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려 본다. 이모는 아이가 생기질 않아 다섯 남매의 막둥이인 나를 잠시 데려다 키웠다. 어릴 적 기억 속에 그 집은 언덕에 있었고, 경사진 좁은 길로 다녀야 했다. 작은 출입문이 있었고, 그 문을 열면 작은 마당이 간신히 정오의 햇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잔칫날이었는지 부엌에서 고기로 구슬 같은 완자를 만드는 이모의 손이 신기해 보였다. 안타깝게도 그것을 먹었던 기억과 맛은 생각나질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는 다시 수암골에 올랐다. 수암골은 한국 전쟁 직후 피난민들이 야산의 언덕에 정착하여 살게 된 마을이다. 수암골 입구에 커다란 바위가 이 마을 이름의 기원일까 생각하였는데 수암골은 수동과 우암동의 경계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수암골은 종로구 혜화동 마로니에공원에서 낙산공원에 이르는 길처럼 좁은 골목과 벽화가 이어진 길로 가꾸어졌다. ‘추억의 골목 여행’을 주제로 충북의 화가와 대학생들이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왕관을 쓴 닭과 병아리, 샤워하는 여인의 실루엣, 심순애의 선택을 기다리는 이수일과 김중배, 그리고 그대로 남아서 벽화가 된 새마을운동 마크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특별한 소재의 그림을 구경하는 재미에 좁은 골목길을 천천히 걷는다.
수암골은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골목 입구에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아트홀이 들어섰다. 작가가 저술한 수천 권은 됨직한 책과 드라마 대본이 전시되어 있다. 어떻게 이런 많은 인기 작품을 만들어 내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전시관 옆 적벽돌 단층집, 김수현 작가의 작업실에 작가의 그림자가 머무는 듯하다.
거리에 새로 들어선 것처럼 보이는 작은 화랑이 눈에 띈다. 갤러리가 골목에 주는 효과는 특별하다. 카페나 식당, 물건을 파는 상점과 달리 갤러리는 내부와 외부가 주기적으로 바뀌는 공간이다. 시간이 지나면 갤러리는 또 다른 예술품으로 가득 찬다. 그런 바뀜으로 인해 거리에 활기를 준다. 호기심과 기대로 갤러리의 문을 열었다. 직각의 공간을 채운 예술품, 작가의 혼을 담은 작품들이 짙은 물감의 향기를 뿜어낸다. 미술은 잘 알지 못하지만 느낄 수는 있다. 남몰래 한 가지 창작의 영감을 얻어간다.
카페골목을 지나 수암골 전망대에 이르렀다. 어떤 연인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고, 어떤 사람은 풍경을 담는다. 노을에 물든 청주의 하늘 아래로 하나둘 민가의 불빛이 켜진다. 저녁 빛의 절정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