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계곡이 쌍천을 따라 내려오다가 평지와 만나는 지점에 작은 마을이 있다. 500년 전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상도문 마을이다. 키보다 낮은 돌담과 단층의 기와집은 들뜬 마음을 쉽게도 가라앉힌다.
느리게 걸어야만 할 것 같은 마을에는 이미 가을이 들어섰다. 감잎은 반쯤 떨어졌고 주황빛으로 물든 감들이 나무에 매달렸다. 비선대와 저항령의 계곡물을 합수한 쌍천도 먼 길을 가려고 상도문 마을에 물길을 내어 갈 길을 묻고 간다.
많은 집들이 현대식으로 개량되었지만 고성의 왕곡마을처럼 북방식 형태의 집도 여러 채 남아있다. 기와 대신 슬레이트로 지붕을 올린 집도 있다. 이곳이 사람들에게 고향이 아닐지라도, 이 마을에 들르면 한 번쯤 고향을 그리고 갈 만한 곳이다. 나지막한 담벼락 너머로 집안의 텃밭과 마당을 살며시 들여다보며 길을 걷는다.
이 마을에는 사람들에게 친숙하기로 이름난 길고양이들이 산다. 사람을 보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 곳곳의 담장에 고양이를 그린 호박돌이 얹어있다. 이 마을의 고양이들은 초상화가 한 점씩 가지고 있다. 참새, 강아지, 부엉이, 달팽이 등을 그리거나 표현한 돌들도 상도문 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구실을 하고 있다.
마을의 공터 한쪽에는 콸콸 물이 쏟아지는 약수터에 들렀다. 약수터라고 하기에는 흘러나오는 물의 양이 상당하다. 작두로 펌프질할 때 나오는 만큼의 물이 계속 흘러나온다. 이 물은 마을 뒷산 주봉산에서 솟는 물을 끌어온 것이라고 한다. 마을의 모습이 배와 닮아서 직접 우물을 파지 않았다. 배를 닮은 마을의 형상이 구멍이 나면 풍파가 닥칠 것이라는 금기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물에서 단맛이 난다. 어떻게 물에서 단맛이 나지? 신기할 정도로 단맛이 강하다. 주봉산에서 자란 풀과 나무의 뿌리를 돌고 나와 그런 맛이 나는 듯하다. 외지에서 온 듯한 사람이 물통 여러 개에 물을 받아 차에 싣고 떠나간다. 물의 양도 많고 외지 사람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허락되는 곳이다.
상도문 마을은 신선이 설악산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신선이 설악산 가는 길을 모를 리 있을까? 어떤 이유로 물었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유래가 그렇다는 것이다. 의상대사가 깨달음의 문이 열린 곳이라는 이야기도 또 한 가지 유래이다. 산을 울리는 새의 지저귐과 개천의 물 흐르는 소리, 돌담을 따라 걸으면 곧 뒤따르는 낙엽 뒹구는 소리, 산은 병풍처럼 둘러있고 드문드문 사람들이 구경 오는 마을, 신선이나 승려가 아니어도 머무는 시간만큼 잡생각은 사라지고 싱그러운 생각이 돋아나는 마을이다.
마을 주민들은 사라진 방앗간을 되살려 공동 운영한다. 선조들이 고된 농사를 지으며 불렀던 속초도문농요도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끊이지 않고 전해 내려온다. 아직도 이 마을에는 농사를 위한 농촌 마을 공동체문화가 유지되는 곳이다.
이 작은 마을에 속초 8경으로 선정된 곳이 있다. 마을 곁의 소나무 숲속에 강돌로 놓인 계단을 오르면 학무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지어진 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마을의 풍경보다 더 먼 과거로 들어온 듯하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 매곡 오윤환 선생이 1934년 건립하였다. 독립운동에도 활발히 활동한 그는 이 지역의 농사와 관혼상제, 항일투쟁 등의 기록뿐만 아니라 마을의 삶의 이야기를 적은 55년간의 매곡일기를 남기신 분이다. 19세였던 1891년부터 74세였던 1946년 소천 전날까지 쓴 기록이다. 상도문 마을의 돌담길을 걸으면 매곡 선생이 지은 구곡가가 이정표처럼 곳곳에 적혀있다. 구곡가는 마을 주변의 경치가 수려한 아홉 곳의 노랫말이다. 구곡가를 읊으며 길을 걸으면 매곡 선생의 가사에 음이 저절로 붙어온다.
처마에 걸려 있는 노란 옥수수는 마당을 환히 비춘다. 김장철이 되면 동네 사람들로 분주해질 고추밭과 배추밭이 파릇하고, 참새는 기와지붕 빈틈을 들락날락한다. 길고양이가 제집을 찾는 시간 상도문 마을의 가을 해가 넘어가는데 감나무 아래 어느 어르신이 피워놓은 모깃불이 굴뚝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매곡 오윤환 선생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