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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차중 Feb 17. 2024

묵호의 시간


허름한 좌판들이 늘어선 좁은 시장길로 바위를 스친 파도가 넘어 들었다. 십여 년 전 묵호를 찾았을 때의 풍경이다. 까막바위는 속의 이정표로 여전히 존재했다. 묵호를 찾은 것은 이름처럼 조용한 마을에서 잠시 머물기 위함이었다.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 위로 갈매기 떼가 나는 것은 파도가 뱉어낸 먹이를 잡으려는 것일까? 지친 새들이 묵호 까막바위 위에 자리를 잡는다. 고독한 남자 까막바위는 파도 위를 나는 하얀 물보라만 바라본다. 먼 옛날 해일로 피해 당한 마을을 수습하기 위해 부임해 온 관리는 이곳을 묵호라고 이름을 짓는다. 물도 검고 바다도 검고 물새도 검어 검은 호수 같다는 그의 말은 그 당시 피폐했던 묵호 주민의 삶이었을 수도 있다. 까마귀가 새끼를 낳았다는 까막바위는 묵호라는 이름에 검정을 덧칠한다.


미로처럼 생긴 논골담길을 오로지 걸음으로 둘러보는 것은 얼마나 걸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논골담길에는 논이 없다. 포구에서 배가 들면 주민들은 오징어와 명태를 말려 다시 시장에 팔아 생계를 꾸린다. 이때 지게에서 떨어진 바닷물이 땅에 떨어져 길바닥은 논바닥처럼 진흙이 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논골이다. 예전에 작은 논들이 있어 그리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마을에는 남편과 부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생겨났다. 장화가 없으면 질퍽한 길을 걸어 다닐 수 없고 생계를 위한 일도 할 수 없으니 나온 말일 것이다. 1930년대 묵호항의 개항으로 무연탄을 배에 실어 나르던 검은 얼굴 아버지의 삶이 묻힌 곳이다. 생필품을 사기 위한 전표 한 장을 얻기 위해 묵호등대를 만들 모래와 자갈을 지고 언덕을 올랐던 어머니의 가쁜 숨소리가 스며든 곳이다. 그때의 판자촌은 길가에 조형물로만 간직되었고 그들의 삶은 골목을 따라 벽화로 그려져 있다. 닦여진 길과 지워져 가는 길, 그 갈림길에 머물러 바람이 전하는 묵호의 이야기를 듣는다.


묵호항이 개항하고 태백과 삼척에 실 온 무연탄과 시멘트를 배로 나르는 일로 사람들은 묵호에 몰려들었다. 항구가 생기면서 어업의 인구도 늘어 점점 바닷가 언덕에는 하나둘 판잣집이 들어섰다. 아랫마을에는 어부들이, 윗마을에는 생선을 말려 파는 사람들이 살았다. 젓갈로 유명한 강경과 인삼으로 유명한 금산에서도 개가 돈을 물고 다니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는데 이곳 마을벽화에도 개가 지폐를 물고 있는 그림이 있다. 묵호등대가 불을 밝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안가 마을에 영화관이 문을 열었고 근사한 백화점도 들어섰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나지막한 소리만 도는 묵호에도 무성했던 황금기가 있었다.


신명 났던 시절 묵호를 찾던 사람들처럼 파도가 북적이며 밀려든다. 왜군을 무찔렀다는 문어와 거센 파도를 다스리는 까막바위는 묵호의 상징이 되어 바닷가 한쪽을 차지했다.


묵호의 언덕을 오르는 논골담길 이외에도 태풍이 몰아치면 대게와 홍게가 마을로 걸어 들어온다는 게구석마을과 도깨비불이 자주 출몰했다는 도째비골의 이야기에 미소를 흘린다. 도째비는 도깨비의 이곳 사투리다.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언덕의 모든 길을 걸어보겠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하지만 오르는 길이 만만치 않아 한 길만을 선택해야 한다. 나는 논골담길을 따라 등대가 있는 곳으로 태풍에 밀려온 홍게처럼 어기적어기적 언덕을 오른다.


오징어를 이고 나르는 주민의 모습도 석탄을 나르던 사람들의 풍경도 사라졌지만, 담벼락에는 그때의 마을 사람들의 삶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그림을 마주하면 마을의 이야기가 담장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오랜 걸음이어도 그림과 풍경이 있어 힘겹지 않다. 언덕에 자리를 튼 집마다 따사로운 햇살이 한 다발씩 들어있다.


언덕 꼭대기에 올라와 있어야 할 교회 첨탑은 묵호등대에 자리를 내주었다. 묵호등대에 올라 파도가 뭍으로 밀려드는 방법과 바람이 바다를 스치고 어디로 떠나가는지 살펴본다. 

어느덧 언덕마을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별빛 같은 전등이 점점이 켜진다. 옆 동네 도째비골에도 무지갯도깨비불이 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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