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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주 Feb 05. 2021

어쩌다 벤쿠버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어학연수를 제안했다.

그러니까 조국에서도 안 하는 공부를 굳이 구만리 타국에서 하고 오라는 뜻이었다. 당연히 싫었다. 그래서 꼭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엄마가,


“내가 너를 키울 때 워낙 싸게 먹혀서...”


라는 납득은 둘째치고 이해조차 가지 않는 대답을 하셨다.


 “내가 너 키울 때 돈이 안 들어갔어. 니가 학원을 다녔니, 과외를 했니? 남들 다 다니는 학원도 못 다니고. 옷도 맨날 거지같이 입고 다니고, 신문배달에....”


오케이, 거기까지.

오해가 있을까 봐 얘기를 해두자면, 우리 아빠는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셨다. 학원이야 내가 공부하기 싫어서 안 다닌 거고, 옷은 나름 신경 써서 입은 건데 엄마 눈엔 그리 거지같이 보였나 보다. 그리고 신문배달은 호기심에 딱 삼일 했다. 저런 신파극이 나올 이유 전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아무튼 그래서 내가 맴이 아파. 그러니 캐나다로 어학연수 다녀와라.”


그러니까 맘이 아플 이유가 전혀 없단 말이다. 나는 공부가 싫었고 특히 영어는 더 싫었다.


“공부 안 해도 된다. 대충 일 년만 살다 와라. 니가 너무 싸게 먹혀서 내 맴이 별로 안 좋아. 안 가면 죽을 때까지 맴이 안 좋을 거 같아. 이러다 속상해서 병날 거 같여.”


아하! 저 소리를 그만 들으려면 일단 가는 척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몇 달 버티다 돌아오지 뭐….


그렇게 느닷없이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어학원도 대충 예약하고 홈스테이도 대충 예약하고 날짜도 대충 잡았다. ㅇㅇ. 그냥 관심이 없었다. 다만 유일하게 맘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율군, 나의 그였다. 두고 가자니 불안했다. 원래도 내 것은 아니었지만 뺏길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여 급하게 모임을 소집했다.


 “저 다음 달에 캐나다에 가게 되었어요.”

 “갑자기? 왜?”


내가 너무 거지처럼 살아서 엄마가 지금 마음이 몹시 아프신데, 안 가면 죽을 때까지 아프실 꺼고 병까지 나실 거 같다고 협박하시는 통에 할 수 없이 다녀와야 한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조차도 이해가 안 가는 저 내용을 남에게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무시하고 그에게 말했다.


 “선배님, 나 없어도 조용히 잘 지내고 있어요. 밖에 너무 나돌아 다니지 말고요.”

 “후배님만 없으면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딱히 뛸일도 없을 것 같고요.”

 (ㅇㅇ. 진짜 그 뒤로 20년간 한 번도 안 뛰셨음.)


오케이, 그렇다면야… 그러자 미주 언니가 말했다.


 “너... 캐나다 가면 거기 사람들이 너한테 ‘한국 사람들은 원래 다 그래요?’ 라고 물어볼 거야.”

 “왜 그런 질문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어. 들어와.”

 “.......”

 “어쨌든 그런 질문이 들어오면 0.1초도 지체하지 말고 ‘아니오’ 라고 즉시 대답해야 한다. 알았지?”

 “그러니까 그런 질문이 왜 나한테…”

 “반드시 들어와. 자, 우리 연습해보자. 한국 사람들은 다 너 같아요?”

 “........”

 “대답해야지!! 꾹! 명심해. 이건 국가의 위신이 달린 문제야. 알았지?”


그렇게 국가의 위신이 달린 주의 사항도 들었고, 준비는 완벽하게 마친 것 같았다.


드디어 디데이, 밴쿠버행 비행기를 탔다.

10시간을 어찌 버티나 고민하다가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놀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다소 헷갈렸다. 그래서 물어봤다.

 

 “어디까지 가세요?”

 “밴쿠버요. 그리고 이건 밴쿠버행 비행기고요.”


ㅇㅇ. 한국 사람이었다.

까칠군은 더 이상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밴쿠버에 도착할 때쯤 나는 까칠군과 짱친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나 같은 이상한 친구를 만나서 10시간 동안 즐거웠다며 고맙다고 했다.

나도 고마워, 까칠군.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사람들은 홈스테이 마마, 파파였다. 아니, 내 엄마 아빠도 아니고, 심지어는 나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을 도대체 왜 그렇게 불러야 하는지 궁금했지만 영어를 못 해서 못 물어봤다.


마마는 나에게 비행기에서 뭘 먹었냐고 물었다.

비행기에서 뭘 먹긴 먹었는데 뭔지는 모르겠고, 그냥 내가 아는 영어 단어가 치킨 뿐이어서 치킨을 먹었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마마가 그 비행기에선 왜 아침부터 치킨을 주느냐고 몹시 의아해했다. 내가 사는 나라에서는 아침부터 치킨 먹어도 되는데… 왜 여기서는 그게 그리 놀랄 일인 건지… 그때 나는 구만리 타국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곳은 그 외에도 많은 것이 달랐다.

나는 지금까지 봄이면 그냥 대충 다 좋은 줄 알았다. 그런데 밴쿠버의 5월은 그 급이 달랐다. 금가루를 뿌린 듯한 햇살. 끈적이지 않는 따뜻함. 게다가 밤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느낌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진짜로 안 왔다. 밤 10시가 다 되도록 눈부신 해는 지지 않았고, 태양보다 술집 사장님들이 먼저 퇴근했다. 10시에 문 닫는 건 너무하잖아….


그래서일까 몽환적인 5월의 밴쿠버 시민들은 굉장히 여유로웠다. 신호등 녹색 신호가 켜지자 마자 냅다 뛰는 나에게 ‘녹색 신호가 켜져 있는 동안은 차들이 절대 덤비지 않으니 뛰지 않아도 된다.’라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셨다. 차 때문이 아니라 나의 내적 불안감 때문에 뛰는 것이라고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영어를 못 해서 못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속도를 즐기는 군중이 있었으니 바로 인라인족이었다.


오케이, 이거다.

밴쿠버에는 영어를 배우러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해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보다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덕분에 밴쿠버 시민들은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햄버거 주세요. 라고 하면 햄버거를 줬고, 손가락을 두 개를 펼치면서 두 개 주세요. 라고 하면 두 개를 줬으며 커피 주세요. 해도 커피를 줬다.

그리고 인라인 주세요. 하니까 인라인을 줬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인라인을 탈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냥 여태껏 인라인을 신어본 적도 없었다. 뭐… 상관없었다. 알잖은가. 운동은 뭐다? 자신감이다!! 나는 그 첫 인라인으로 어학원 전단지 돌리기 알바를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감이고 나발이고 전단지를 손에 든 상태로 주구장창 앞으로 엎어지고 뒤로 자빠졌다. 그러자 그 꼴을 본 친절한 밴쿠버 시민들이 엎어져있는 내 손에서 전단지를 직접 빼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그 전단지가 필요 없었을 텐데도 그렇게 해줬다. 나는 친절한 밴쿠버 시민들 덕분에 땅바닥에 누워서 전단지를 다 돌렸고 그 일은 삼일 만에 때려쳤다.


아!! 물론! 당연히 공부도 했다.

어학원 첫날, 내가 들어갈 반을 결정하는 레벨 테스트라는 것을 치렀다. 시험장에는 나를 포함해서 4명이 있었다. 감독관은 시험지를 배분한 후에 교실에서 나갔다?! 어이 teacher? 우리만 두고 나가면 안 될 것 같은데? 10분 후, A군이 시험지를 자신 있게 뒤집더니 팔을 베고 엎드렸다. 그걸 본 B군, 쭈뼛쭈뼛하더니 A군을 툭툭 치며 시험지를 좀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것 봐 teacher…. 나가면 안 된댔잖아. A군은 자신 있게 B군에게 자신의 시험지를 쓱 내밀더니 도로 푹 엎드렸다. 그걸 본 C군이 자기도 보여달라고 했다. 다 베낀 B군은 C군에게 A군의 시험지를 넘겼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너도 필요하냐 물었다. 지것도 아니면서 베푸는 그 패기가 맘에 들었지만 거절했다. 수준에 안 맞는 반에 들어가서 버벅대고 싶지는 않았다.


일주일 후, 나는 그들을 레벨 D반에서 목격했다.

어학원 레벨은 A~E까지 존재했으며 A가 가장 높은 레벨이고, 레벨 D의 수준은 아이 엠 어 걸, 유 아러 보이. 이 수준이었다. 레벨 E는 그냥 알파벳 반이다. 나라고 딱히 다를 건 없었다. 나는 레벨 C에 배치되었으며, 그 수준은 마이네임 이즈 김국주, 아임 프럼 코리아. 아이 라이크 율군. 뭐 이 정도 레벨이었다.


그런데 시작점이 뭣이 중할까.

알잖은가!! 언어는 뭐다? 자신감이다! 인라인을 처음 신은 날 전단지 돌리기를 시도한 그 자신감이면 영어도 쌉가능하다고 믿었다.


나는 그렇게 또 다른 아름다운 객지에 떨어졌다.



최종적으로 제일 높은 통번역반까지 올라갔습니다.

nice 김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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