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후첩이 될뻔했다
벤쿠버는 어학연수의 성지이다.
덕분에 나는 다채로운 국적의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첫 친구는 홈스테이의 마마와 파파였다. 그들은 늘 나의 영어 학습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 일환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예를 들면,
“꾹쮸! 한국 사람들은 다 너 같아?”
ㅇㅇ. 타국에 간지 한 달 만에… 저 질문을 받았다.
고국에서 연습한 덕분에 곧바로 ‘No’ 라고 대답할 수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내가 딱히 별다른 짓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 질문을 받았던 걸까?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그게 궁금하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밤낮이 없었다.
그들은 매일 밤 나를 불러다가 소파에 앉혀놓고 드럽게 재미없는 영국 시트콤을 강제 시청하게 했다. 보아하니 내 수준에 맞춘다고 몸개그가 충만한 걸로 고른 모양인데 도저히 웃어줄 수가 없는 퀄리티였다. 그리고 그 망할 시트콤이 끝나고 나면 마마는 또 질문을 했다.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뭐였어?”
아… 진짜 곤란했다. 등장인물들이 단체로 엎어지고 자빠지고 물에 빠지는 바람에 주인공 파악도 여태 못 했는데… 무슨 수로 거기서 재미있는 부분까지 찾는단 말인가. 내가 답을 못 하면 마마가 또 이런 질문을 했다.
“이제 영어가 좀 들려? 아직 안 들려?”
일단!! 저 젠장할 시트콤에는 영어가 나오지 않았다. 모두 빽빽대면서 엎어지고 물에 빠지느라 말을 할 시간이 없었다. 하… 보아하니 젊디 젊은 신혼부부 같은데 나한테 애쓰지 말고 파파랑 둘이 놀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영어를 못 해서 말을 못 했다. 섣불리 말했다가 굉장한 오해를 살 거 같아 더더욱 말을 못 했다. 영어를 하게 된 이후에는 이미 저 고마운 마마는 내 마마가 아니었다.
나를 돌보겠다는 열정은 파파도 마마 못지않았다. 하루는 파파가 나를 불러다가 앉히고 물었다.
“그 남자, 누구야?”
사실 영어가 반말인지 존댓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들이 나를 한참 어린애 취급한 건 사실이었다. 자기들도 어렸으면서…
그런데 그 남자라니, 그 남자가 누군데?
“그 남자가 꾹쮸 너 좋아하는 거 같은데?”
오!! 그래? 그래서 그 남자가 누군데?
“그런데 남자들은 다 조심해야 해. 특히 타국에서 만나는 남자는 더더욱 조심해야 해.”
Ok!! Got it! 그런데 그 남자가 누구냐고?
“그럼 꾹쮸가 알아들은 걸로 생각하고 더 이상 말 안 할게.”
아니, 잠깐만!! 그래서 그 남자가 누구냐고?
그는 자기 의무를 다 했다는 듯 쿨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라졌고, 나는 지금까지도 그 남자가 누군지 모른다. 대체 나는 누굴 조심했어야 했던 걸까.
그다음으로 사귄 친구들은 일본인 친구들이었다.
이 친구들은 참으로 카테고리가 극명하게 갈렸다. 딱 봐도 늬들은 일본에서 좀 놀았겠구나 싶은 친구들이 있었고, 늬들은 정말로 공부하러 왔구나 싶은 친구들이 있었다. 중간은 없었다. 나는 당연히 두 부류 모두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공부하는 친구들이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는 친구들과 친해졌다. 하루는 이 자유로운 영혼의 친구들 중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How many 브라자쓰 do you have?”
이 자유로운 인간이 도대체 내 브라자 개수는 왜 궁금해하는 걸까. 의아했지만 지구는 둥글고 세계는 넓으며 너는 자유로우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기로 했다. 그래서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May be six or seven?”
그랬더니 그 친구가 대놓고 경악을 했다.
“히이이익!! You have lots of 브라자쓰!!”
어? 내 브라자가 많은 거야? 내가 좀 사치스러웠어? 그런데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내 나라에 있는 내 친구들은 훨씬 더 많이 갖고 있는데?
“보통은 다 이 정도는 갖고 있지 않아? 내 친구들은 더 많던데... 오히려 나한테 적다고... 사실 나도 세어본 적은 없어서 정확히는 몰라. (영어로).”
그 친구는 너무나도 놀라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고 그 사이로 희미하게 모국어가 튀어나왔다.
“이에... 스고이네...”
그래서 나는 그 친구 생일 선물로 브라자 세트를 선물했고, 그 친구가 말한 브라자가 brassieres 가 아니라 brothers 였다는 사실을 안 건 그 뒤로 몇 달 후였다. 못 알아들어서 미안했다. 근데 친구야, 다시 들어도 브라자더라.
그 외에도 다양한 친구들이 있었다.
내가 끓여준 라면을 먹고 얼굴이 시뻘게지면서도 완전 괜찮다고 우겼던 중국인 친구. 역시 대륙의 기개! 미안해. 고추 살짝 넣었어. 이 캐나다 라면이 너무 맹숭맹숭해서 말이지.
멕시코도 ‘핫. 베리 핫, 베리베리 핫, 베리베리베리 핫.’ 이렇게 어엿한 4계절이 있다며 초가을에도 목도리를 하고 다니던 멕시코 친구. 한국 한번 오렴. 기온 차가 50도를 (-15~35) 넘나드는 진정한 카리스마의 사계절을 보여줄 테니.
툭하면 나한테 ‘너는 그렇게 많이 먹으면서 왜 살이 안 찌냐.’ 항의했던 프랑스 친구. 허, 참, 내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러니. 섭섭하게.
나한테 맨날 배 타러 가자고 졸라댔던 스페인 친구. 왜 싫다는 말을 못 알아듣니? 친구야. 그리고 나한테 스페인어 하지 마. 난 영어도 힘들어.
그리고 지네 집에 피아노 치러 오라던 브라질 친구.
나 피아노 칠 줄 모른다고! 왜 내 말들을 못 알아듣냐고! 이쯤 되면 나한테 문제가 있었던 같기도…
어쨌든 이 범국가적인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뇌리에 박힌 친구가 있었으니, 바로 사우디에서 날아온 친구였다.
이 친구는 엄청 부자였다. 지가 지 입으로 지가 엄청 부자라고 했다. 아무튼 이 부자 친구는 내가 맥주를 마실 때마다 민원을 제기했다.
“무슨 여자가 맥주를 everyday 먹냐.(영어로)”
와우, 거기서 여자가 왜 나오지? 여자는 간이 없나?
“야! 맥주에 남녀가 어딨고 왕후장상이 어딨냐? 너는 마시면서 왜 나한테 먹지 말래? you suck.”
“나 맥주 안 마셔.”
“what? 왜? 너도 마셔! 맛있어.”
“우리나라에선 술 안 마셔.”
“여긴 니네 나라 아니야. 캐나다야. 괜찮아.”
“종교 때문에 안 먹어.”
“괜찮아. 내가 비밀로 해줄게. 쉿! secret!”
“......”
그 친구는 ‘니가 누구한테 무슨 수로 비밀로 해줄 거냐.’ 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난 어메리칸식 제스처로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고 어깨를 으쓱해줬다. 신한테만 고자질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거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고…
그리고 며칠 후, 그 친구가 나한테 기가 막힌 제안을 해왔다.
“나는 내 나라에 부인이 두 명이 있다.”
“와우, 좋겠는데?”
“내가 부자라서 가능하다. 나 엄청 부자다.”
“부러운데? 그런데 니가 아니라 니네 아빠가 부자인 거 아냐?”
“그렇다. 그리고 내 아들도 부자일 것이다. 나에게 불확실한 미래는 없다.”
그렇구나. 좋겠구나. 그럼 난 바빠서 이만...
도망가려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막 떼려는 순간,
“니가 내 셋째 부인이 되어줬으면 좋겠어.”
what the...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나는 도로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 한 자세로 엉거주춤 서서 그 정신 나간 친구를 쳐다봤다. 내가 방금 뭔 소리를 들은 거지?
친구야, 너 방금..... 나한테 청혼한 거니?
“첫 번째, 두 번째 부인은 아버지가 선택했다. 세 번째 부인은 내가 선택해도 된다고 아버지한테 허락받았다. 그래서 괜찮다.”
what? 괜찮아? 나는? 내 의견은?
나는 안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옵션은 없는 거야?
“니네 나라 맥주 못 마신다며.”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뇌에 렉이 걸렸었지 싶다. 바로 딱 거절했어야 했는데. 나도 청혼받는 건 처음이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눈동자가 흔들리던 그 친구는 일단 물러났다. 그날은.
다음 날 그 친구는 다른 카드를 들고 왔다.
“너만 맥주 마실 수 있게 해 줄게.”
“너네 나라 술 금지라며.”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으니까.”
와우, 너무나도 손쉽게 종교의 신념을 버리는 그의 패기에 살짝 흔들렸지만, 보아하니 내 맥주를 허락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같았다. 저걸 어떻게 효율적으로 거절하나, 고민하는데 그는 나의 침묵을 망설임으로 읽고 설명을 첨가했다.
“우리 집 엄청 부자야. 니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몰라도 나랑 가면 훨씬 풍요롭게 살 수 있어. 산책할 수 있는 정원도 줄게.”
what?? 잠깐. 나 맥주만 못 먹는 게 아니라 외출도 못 하는 거야? 내 정원이라니... 고국에 돌아가면 대한민국 전체가 내 정원이란 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단호하게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친구야, 나는 남자를 볼 때 얼굴만 봐. 그리고 한국에 겁나 잘생긴 애인(이었으면 하는 놈) 이 있어. 이미 결혼을 약속했어.”
물론 거짓말을 살짝 섞긴 했다. 율군이 (아직은) 내 애인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그 친구는 그 뒤로 두어 번 더 시도를 하긴 했지만 빠르게 포기했고, 몇 달 뒤에 사우디로 홀로 날아갔다.
잘 가, 부자 친구야. 청혼해줘서 고마웠어.
타국에서 내 약혼자가 되어버린 사실을 알리 없는 나의 율군은 한국에서 꽤 잘 지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 나와 종종 화상 채팅을 했던 걸로 봐서 그도 내가 살짝 보고싶었 던 것도 같다.
순수 일방통행만은 아니었던 듯… 그지? 여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