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반존대의 섹쉬함이란…
“후배님, 오늘은 뭐 먹을까요?”
하… 그 넘의 후배님…
나는 도대체 언제까지 너의 후배님인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너는 나만 보면 식사 메뉴를 묻는 것일까. 왜때문에 내 배가 늘 공복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사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저 극존대를 떼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나를 실제로 어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 나를 한참 아랫사람 보는 듯하였고, 입으로만 극존대를 썼다. 그야말로 언행 불일치 아니, 언면 불일치였다. 그래, 뭐 딴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거슬리는 존댓말이라도 떼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랬다. 정말로 그래서 그 일을 벌였다.
나는 영화건 소설이건 좋아하는 장르가 명확했다. 공포, 스릴러, SF, 판타지 등,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영화를 볼 때마다 기꺼이 나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는 나와 취향이 많이 달랐건만… 그는 내가 고른 영화를 대부분 별 불만 없이 함께 봐주었고, 나는 우리가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그도 한사코 거부했던 장르가 있었으니, 바로 공포 영화였다. 이유인즉슨 “시시해서” 라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였지만, 사실 그가 유독 공포에 약하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도 매번 거절을 당하니 오기가 발동했다. 아니, 오기라기보다는 장난기에 가까웠다. 당시 내가 그에게 오기를 부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미리 변명을 하자면 나는 그때 불타는 20대였다.
갓 20대에 진입한 청년들은 국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성인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어른이라고 착각했고, 그런 나의 행동은 늘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었다. 한번 장난기가 발동하면 뇌의 양방통행이 불가능해졌으며, 판단력은 일방으로 질주했다. 설사 그것이 역주행일지라도… 한번 시동이 걸리면 뭔가를 들이받기 전까지는 제동이 불가했다.
그날 나는 다시 한번 203호에 잠입했다.
ㅇㅇ. 시동이 걸린 것이다. 그의 방은 그때와는 사뭇 달라져있었다. 일단 포로롱 김가루들이 사라졌다.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애인 때문에 방바닥을 닦고 있을 그를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인 대가리 잘린 페트병들도 사라졌다.
그런데… 다른 건 다 사라졌건만, 왜 저 놈은 그대로 있는 것인지… 저 놈… 김회욱은 아예 지네 집마냥 이불을 깔고 누워있었다. 나는 체중을 실어 놈의 종아리를 지그시 밟았다. 놈은 끄응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야. 욱쓰. 여기가 노숙자 쉼터냐?”
“아오, 꾹. 또 너냐? 너 내 스토커야?”
이 새끼가 미쳤나?
“욱… 여기 203호다. 빨리 니 방으로 꺼져.”
“아... 맞다. 너 이 형이랑 사귄댔지. 그런데 꾹… 너 이러는 거 이 형도 알아?”
“이 형? 내 율군? 당연히 모르지.”
“너!! 내가 다 이를 거야!!”
“어. 그래. 그렇게 해. 다음번에는 203호가 아니라 응급실에서 눈 뜨고 싶으면 그렇게 해봐.”
놈은 투덜대면서 사라졌다. 아니, 저 자식은 왜 지 방 놔두고 툭하면 여기 와서 처자는 건지… 또 한 번만 더 여기서 발견되면 저 놈의 다리몽둥이를 어케 한다는 둥… 척추를 어케 한다는 둥… 온갖 나쁜 말들을 중얼거리며 그의 컴퓨터를 켰다.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지만 절대로 <직박구리> 이런 폴더를 뒤져보려고 컴을 켠 것은 아니었다. 그런 종류의 프라이버시는 침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겐 다른 계획이 있었다. 나는 조용히 왜가리 폴더를 만들어 또 다른 새폴더에 은밀히 숨겼다. 그리고 본체에 usb를 꽂아 준비해 둔 사진들을 나의 왜가리에 다운로드했다. 원래는 그 사진들을 그의 컴 바탕화면으로 설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좀 더 레벨을 높이기로 했다. 한번의 풀악셀로 또 폭주해 버린 것이다.
나는 그 사진들을 바탕화면이 아닌 화면보호기로 설정했다. 그가 컴을 계속 사용한다면 내가 설정한 사진들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몇 분이라도 모니터가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사진들은 화면 가득 뜨게 될 것이다. 그것도 아주 다채롭게 움직이면서… 그리고 그 충격은 컴을 켜자마자 나오는 것보다 조금(?) 더 클 것이다. 그 사진들은 잔인하기로 유명한 B급 공포 영화 <쏘우>에서 스샷을 뜬 사진들이었다.
그런 짓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내가 너무 했나? 그가 화내면 어떡하지? 나 같은 거랑은 더 이상 못 사귀겠다고 헤어지자고 하면 어떡하지?”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하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도로 사진을 삭제하러 갔다가는 컴 앞에 앉아있는 채로 그와 마주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전혀 다른 카테고리의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건 더 싫었다.
정확히 두 시간 후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뒤늦게 공포에 질려있던 나는 울리는 전화를 보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냥 이 전화를 씹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오늘만 살 것도 아니고… 전화를 안 받았다간 더 큰 사달이 일어날 것 같아서 일단 무릎을 꿇고 전화를 받았다.
“네, 선배님. 어쩐 일이신가요?”
“뭐? 어쩐 일? 하아.... 김국주, 너 어디야?”
어? 그가 나한테 반말을 했다?!?
심지어 나를 ‘후배님’ 이 아닌 내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와… 기뻤다. 기뻤는데… 지금은 내가 막 기뻐하고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선배님. 저는 집입니다.”
5초간의 침묵.
“김국주... 너..... 나와.....”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나오란다고 순순히 나갔다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시간이 좀 흐르면 그의 화가 좀 가라앉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요. 안 나갈래요. 선배님.”
“....... 뭐? 싫어? 왜?”
“선배님, 화나신 거 같아요.”
“…… 후배님, 나 화 안 났어.”
다시 돌아온 ‘후배님’이라는 호칭과 분노를 누르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서 덜컥 겁이 났다. 할 수만 있다면 두 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가서 그의 집으로 향하는 나 자신을 백드롭하고 싶었다. 어떻게 생각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가 싫어할 거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는 늘 뇌를 프리패스하고 사고를 치고 나서야 후회를 하는 것일까. 그와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나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헤어지자고 할 거잖아요!! 절대 안 나갈 거예요!!”
“뭐? 하아… 후배님… 그런 짓을 해놓고 곱게 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럼… 안 헤어져요?”
“김국주… 너는 그것만 중요해?”
“네…”
5초간의 정적이 흘렀고 피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피식? 웃었어?
“너네 집 앞이야. 당장 튀어나와.”
창 밖을 내다보니 정말로 그가 와있었다.
나는 이 사건을 그냥 지나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무거운 발걸음을 한발 한발 내딛으며 내려갔다. 그는 검은색 티셔츠에 검은색 캡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반성하는 자세를 보이기 위해 두 손은 공손히 모으고 고개는 푹 숙인 채 그의 앞에 섰다. 그는 태평양 같은 양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감싸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울어서 퉁퉁 부은 내 눈을 보더니 또 피식 웃었다. 그의 햇살 같은 미소에 나의 불안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하, 이 사람… 검은색은 또 왜 이렇게 잘 어울리는 거야.
“가자.”
“선배님… 화 안 났어요?”
그는 내 말을 씹고, 내 손목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근처 정류장에 도착한 그가 슬쩍 물었다.
“근데 그런 건 도대체 누가 알려주는 거야?”
“뭘요?”
“후배님이 하는 그런 짓들…”
“그런 짓… 누가 알려준 건 아닌데…”
“그렇다면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는 몰라도 그의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나 또 어디로 끌려가는 걸까?
“선배님, 우리 어디 가요?”
“후배님이 좋아하는 영화 보러.”
그날 나는 처음으로 그와 공포 영화를 봤다. 그리고 그가 왜 캡 모자를 쓰고 나왔는지 깨달았다. 그는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나올 때마다 모자를 푹 눌러썼다. 이 날이 사랑스러운 내 애인이 나에게 처음으로 존댓말을 뗀 날이었다. 하… 반존대의 섹시함이란…
그런데 이 사람 표 값은 환불해주세요. 영화를 거의 안 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