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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청년의 다이어리

2019년 12월 26일 '이별'

by 콩지
며칠 전 동기모임에서 한 친구가 일기 쓰기를 추천했다.

친구는 그동안 일기장이 아닌 위클리 스케쥴러에 하루를 한 줄로 꼭 기록했고, 연말이 되어 돌아보니 그 전과는 자신의 일상이 확 달라져 있었다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달리기나 책 읽기였다면 반짝이는 눈이라도 무시하고 내가 뛰고 싶고, 읽고 싶을 때 해야지 하고 넘겼겠지만 일기 쓰기는 나도 꼭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기고 싶은 하루와 남기기 싫은 하루가 있었지만 한 번도 일기를 써본 적은 없었다. 나도 길게 쓰지 않을 요량으로 동기가 인스타그램으로 보여준 스케쥴러와 비슷한 위클리 스케쥴러를 샀다. 매번 빨간 가죽으로 덮여있고 속지가 심플한 다이어리를 추구했던 나는 아크릴 커버에 어색한 폰트로 'with U'라고 쓰인 다이어리는 취향에 맞지 않았지만 속지가 꼭 한 줄 일기를 쓰기에 좋았다. 물론 결정 장애인 나는 크리스마스에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옆에 남자 친구를 세워 놓고 30분을 고민했지만, 그리고 빨간 가죽 커버의 다이어리의 3분의 1 가격이었지만 어쨌든.


스케쥴러를 산 지 하루가 딱 지났는데 한 줄이 아니라 한 페이지도 모자라는 쓸게 가득한 하루가 시작됐다. 이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스케쥴러를 펼쳤다. 일단은 정리가 필요했다. 물론 3시간의 눈물 콧물 쇼, 맥주 한 병과 스트링 치즈, 이상순 이효리 커플의 달달한 영상도 다 본 후에.


그렇게 스케쥴러의 칸이 모자라 브런치를 열었다. 다이어리의 제목을 '비정규직 청년의 다이어리'라고 쓰면서 청년의 뜻이 정확히 뭐더라 찾아보니 'young pepole'이란다. 왜 나에겐 '청년'이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되는 단어에 분류되어 있었지? 비정규직이 더 그래야 하지 않나.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를 제목에서 뺄까? 근데 내 인생에서 저 단어를 뺄 수가 없다. 오늘만 해도, 내가 매 달 꼬박꼬박 돈을 받는 사람이었다면 이별을 하지 않아도 됐을까 하고 생각했으니 말이다(물론 그게 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젊고, 가끔 돈을 버는 비정규직이며 이제부터 일기를 쓸 생각이다. 한 줄로 끝나는 하루가 있으면 스케쥴러에, 그렇지 않으면 브런치에. 당장 오늘은 4시간을 무시한 내일 보자는 카톡에 답장도 해야 하고, 다운로드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봐야 한다. 내일 오전에 학생을 만나 레슨을 해야 하기 때문에 너무 울진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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