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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쯤은 복어로 살게요

by 콩지

4일을 연속으로 촬영하고 쉬는 날 아침을 맞았다. 눈은 다 녹았는데 춥고, 머리가 띵하게 피곤했다. 생각해보니 어제 촬영 끝나고 세수는 했지만 샤워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니 장하다. 촬영장에서 주워온 이마트표 쌀과자를 부셔먹었다. 몽쉘도 가져올걸.


휴차에는 다가올 촬영을 대비해서 몸과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더 좋게도, 더 나쁘게도 아니고 그대로 나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손톱도 자르지 않았고, 갖고 있던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기 위해 다른 대본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평소에는 먹지 않는 음식이 땡겼다. 촬영장에서도 과하게 먹지 않으려고 주의했는데 집에서는 엄마가 사다둔 꼬깔콘 두 봉지를 훔쳐 먹고, 냉동실에 반년은 넘게 있었던 초콜릿을 녹여 먹고, 밤에는 편의점에서 맥주도 한 캔 사 왔다. 내 돈 내고 사 먹는 맥주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런 날은 꼭 한 캔을 다 마신다. 그리고 시위하듯 이도 닦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며칠 전에 코인 세탁소에서 힘들게 토퍼와 이불까지 빨아와 놓고 더러운 몸뚱이를 올려놓고 있자니 돈도 아깝고 찝찝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오늘 왜 이러는 거지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8시에 알람을 맞춰 놓고 일어났다. 한 캔으로도 다음날 충분히 속이 쓰렸고, 빈 과자 봉지를 보니 마음이 찔려서 아침은 굶었다. 연기가 힘든 건 아니었다. 현장에서 연기하는 건 늘 어렵고, 힘겹고, 부끄럽다. 이런 감정이 처음은 아니었으니 패스. 관계는 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휴차인데 놀러 가고 싶을 만큼 모두가 보고 싶었다. 생계에 대한 걱정도 아니었다. 내년 2월까지 약속된 촬영이 있었고, 소소하게 재테크도 시작했다. '어우씨 그럼 뭐지?'


다 필요 없다. 책을 읽어야지. 판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미라클 모닝을 하며 읽을 것과 아껴놨던 황정은 씨의 책도 한 권 빌려왔다. 저녁을 굶기엔 배가 고파서 샐러드를 포장했다. 옆 좌석에 책 세 권과 샐러드를 두고 집으로 오는 길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판교 도서관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 테크노밸리에 들어섰다. 분명 퇴근 시간인데 길은 어둑했고, 빌딩 로비에 크리스마스 트리들만 반짝인다. '누구 보라고 참 예쁘게도 꾸몄네.' 종종 사람들이 보이는데 마치 주말 출근이나, 야근을 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그 수가 적다. 문득 저 사람들을 태워주고 싶단 생각이 든다. 이렇게 추운 날, 사람도 적은 이 날에 버스는 또 언제 올 거며 집은 또 언제들 가실까. 정말 추운데.


오늘 아침 친한 오빠가 친한 동생에게 나보고 복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건드리면 독을 뿜는다고. 그 독이 치사량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웃기려고 한 말이지만 나는 발끈했다.

'복어는 비싸!'

내가 독을 뿜는다고?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나인데. 그렇기 때문에 늘 미움받는 게 두려울 정도로 관계에 집착하는 나인데. 내가 왜 독을 뿜지? 책을 한 권 들었다. 그러다가 감독님하고 내 캐릭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휴차 중에 다른 인물에게 한눈팔 순 없지. 다시 책을 내려놓았다. 생각해보니 눈도 좀 뻐근하다. 차에 두고 온 안경을 가져오려다 생각했다. 내 안경은 다리 한쪽이 없다.


두 달 전쯤에 운전석에 놓여있던 안경을 엉덩이로 깔아뭉개서 안경다리 한쪽이 부러졌다.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곧장 안경을 들고 안경점에 갔더니 주말이 껴서 수리하려면 2-3일이 걸릴 거라고 했다. 그 안에 스케줄이 있었기 때문에 난 안경을 콧등에 얹고서 운전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다. 다리가 하나라 안경은 늘 위태롭게 콧등에서 덜렁거렸다. 그동안은 나름의 요령도 터득했고, 다리 한쪽인 안경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늘 갑자기 그 안경이 너무 싫다. 독이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다. 노란 배를 부풀려서 가시까지 돋치게 하고 싶지만 샐러드로 채운 배는 겨우 볼록이다. 걷고 싶은데 춥고, 자고 싶은데 이르다.


내일 안경을 사야지. 그리고 오늘 허공에 뱉은 독침도 수거할 거다. 이름 모를 감정에 이도 저도 아니게 흘려보낸 오늘이지만 나는 그래도 오늘을 잘 살아내려 애썼다. 최고의 동선으로 외출 한 번에 밀린 업무를 보았고, 건강하게 먹었다. 그리고 다 안다.

'나도 다 안다! 내가 왜 그러는지. 그니까, 트리 꺼라. 사람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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