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취향 공동체

중고 거래 홀릭

by 도시 언니

시작은 미미했으나,


요즘 가볍게 시작한 중고 거래에 홀딱 빠졌다. 사실 자취하기 전에는 중고 거래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그 바닥에 터줏대감이라는 모 카페는 다양하고 황당한 에피소드들로 유명해 괜히 뭣도 모르는 초짜가 얼쩡거렸다가는 눈 뜨고 코 베이는 사기나 당할까 두려워 감히 이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귀여운 중고 거래 앱. 토끼 먹이를 대표 이미지로 쓰는 귀여운 중고 거래 앱에 입문하여 요즘은 여타 다른 중고 거래 앱까지 섭렵 중이다. 시작은 동생이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쓸모 없어진 가구들과, 내가 원룸 자취 시절부터 소소하게 구매했던 생활 가전이었다.


특히 1~2년 정도 사용해 사용감은 있지만 버리기에는 매우 아까운 책상, 서랍, 침대가 타깃이다. 이것들은 부피가 커서 혼자 처분하지도 못하고 그간 숙제처럼 끙끙 짊어지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저것들 얼른 처리해야지, 처리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처분하려하면 아무리 밥 잘 먹는 성인 여성이지만 혼자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이걸 어쩌지......' 싶어 한 숨만 폭폭 쉬었는데 앱에서 시세를 살펴보고 적당한 가격에 내놓으니 순식간에 구매 문의가 쏟아졌고 거래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구매자분들이 직접 방문 해 뚝딱뚝딱 순식간에 물건들을 가져가니 조그만한 공간에 한층 여유가 생겼다.



쿨 거래의 온기


내 중고 거래의 으뜸은 주변 동네 거주자끼리 직거래가 가능한 '토끼 밥' 마켓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매번 물건을 구매하러 오시는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라는 기대감에 약속 장소에서 내심 혼자 설렌다. 때로는 나이가 지긋한 아버지뻘 분이 나타나시기도 하고, 젊은 청년들이거나, 어떨 때는 내 눈에는 마냥 애기같은 귀여운 학생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마치 영화 '뷰티 인사이드'의 주인공처럼 내가 원래부터 아는 사람이지만 매일 새로운 얼굴로 바뀌어 나타나는 존재들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그분들은 '혹시 돈도 못 받고 사기나 당하거나 험한 꼴 당하는 것 아닐까?' 싶었던 내 안전 염려증을 단박에 날려버리셨다. 준비한 물건을 현장에서 재빨리 살펴보고 정중히 물건 값을 내어 주시는데 자연히 마주한 나도 허리가 굽고 구매자들이 건네는 돈을 공손히, 두 손 모아 받게 된다.


깨끗하게 썼지만 그래도 엄연히 '헌 물건'인데 기꺼이 구매해주시고, 오히려 좋은 물건 감사히 잘 쓰겠다고 말해 주시는데 정작 판매자인 내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요즘 말로 '쿨 거래'라고들 하던데 내가 경험한 거래는 모두 온기가 넘쳤다. 내가 운 좋게 매너 좋은 거래자분들만 만나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아직 세상은 참 따뜻하고 살만한 곳이라며 마음 한 구석이 몽글몽글해진다.



우리는 취향 공동체


부피가 큰 가구들을 처리하고 내친김에 미니멀리즘을 실현해 보겠다며 패션아이템들도 판매 목록에 올렸다. 한창 멋 부리고 다닐 때 사모았던 주옥같은 아이템들이지만 막상 구매하고 소유하게 되니 오히려 관심이 시들해진 옷, 신발, 가방, 모자 따위가 처분 대상이다. 실착용이 3회 이하인 정말 새 것 같이 상태 좋은 상품들만 모아 매물로 내놨다.


패션 용품 거래는 가구나 가전들과는 느낌이 또 달랐다. 사실 패션 아이템들은 지극히 '개인의 취향'이 많이 반영된 물건들이 아닌가! 솔직히 '한 개성'하는 내 패션 아이템들의 가치를 단박에 알아봐 주고 선택해 주는 분들에게 마음속으로 찐한 유대감을 느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모 신진 디자이너의 바지를 팔 때였다. 사실 그 바지는 살을 빼면 반드시 입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반품의 유혹을 싹부터 잘라버리고자 과감히 택부터 제거하고 보관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바지다. 게시글을 올린 지 3분도 안되어 바로 지근거리에 거주하시는 분이 구매 의사를 표했다. 30분 뒤에 만나기로 하고 산책 겸 가볍게 걸어 직거래 장소로 향했다.


상대방은 한눈에 척 봐도 멋쟁이 포스를 풍기는 스타일리시한 20대로 추정되는 여성분이었다. 그분은 상품을 상품을 보고 거래 감사하다며 돈과 마스크까지 한 장 건네주셨다. 속으로 '아이고~ 바지가 드디어 제대로 된 주인 만났네!'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초면에 두 손 맞잡고 "제 과분한 욕심에 햇빛도 못 보고 장롱에서 썩을 것 같았던 멋쟁이 바지를 구원해 세상에 나오게 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오지랖 넓은 동네 언니의 주책 같아서 말을 삼켰다. 대신 "정말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말씀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귀가 길 내내 나와 '동일한 취향'을 가진 것 같은 그녀에게 혼자 무한의 친밀감을 느꼈다. 회사-집-회사-집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을 하며 직장 동료들과 가족이나 편한 친구들과 주로 시간을 보내는 요즘. 중고 거래는 나와 같은 '취향 공동체'분들을 발견하고 만나는 재미로 근래 내 나름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1인 가구로 공간을 한 뼘이라도 넓게 쓰고자 시작한 중고 거래인데 요즘 내게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됐다.


어떤 물건을 보고 나와 똑같이 '멋있다! 가지고 싶다!' 라고 느끼는 유사 취향의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어딘가 연결된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에 흠뻑 빠졌달까!


<독립하면 저절로 되는 줄 알았어>
제 3장. 어른이의 성장일지- 2번째 글
도서 출간: 2021년 1월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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