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돌보려고 부지런해졌다

홀로서기

by 도시 언니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다.


매우 당연한 소리라 두 말하면 입 아프겠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 문득 '어떤 물건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때' 보면 나는 왠지 모르게 어딘가 좀 이상한 기분이 든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어질러놓은 물건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때' 그런 기분이 든다.


급하게 나가느라 바로 치우지 못하고 두고 간 유리잔 하나, 갈아 입은 옷가지와 흐트러진 침구들, 먹고 나서 바로 설거지 하기 귀찮아서 싱크대에 담가논 그릇들과 숟가락 한 세트, 심지어 테이블 위에 빈 약봉지와 어제 먹은 과자 부스러기까지, 모두가 그대로인데 어째 영 휑덩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인 가구인 내가 집을 비우는 동안 남겨둔 물건들이 누군가의 손을 탈 일도 없고 동화 속 마법처럼 저절로 움직이지도 않을 테니 외출 전 그 자리 그 모습 그대로 있다는 것이 지긋히 당연한 일인데. 대체 왜, 이리도 생경한 느낌이 드는 걸까.


돌이켜보면 부모님과 살 때 나는 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보살핌의 손길 아래 생활했다. 그건 주로 집안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엄마의 손길이었지만 때로는 투박한 아빠의 손길이도 했고, 때로는 잔망스러운 동생들의 손길이기도 했다. 차마 내가 치우지 못하고 급하게 뛰쳐나가다 남겨둔 흔적들도 외출하고 돌아오면 대게 엄마의 손길로 말끔해져 있었다. 어딘가 부실해 보여 '이제 저건 수명이 다 됐구나' 싶던 물건들도 '부모님 매직'로 소리 소문 없이, 마치 언제 고장이라도 낫던 양 스르륵 멀쩡해져 있었다.


독립하니 중요한 자리에 입고 갈려고 미리 꺼내놓은 옷들의 깃이라도 살짝 어루만져 주던 손길도, 칠칠치 못하게 밥 먹다 식탁에 반찬 국물이라도 흘리면 쓱 닦아주던 손길도, 쨍쨍한 햇빛에 배게를 팡팡 털어 말려주던 손길도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귀가 후 1mm의 오차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는 물건들을 볼 때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 나를 보살피던 손길'의 부재를 느끼며, 동시에 내가 지금 온전히 혼자임을 무의식적으로 알아채는 것 같다.



Move! Move!!


그러나 센치하고 외로울 틈이 없다. 제대로 된 따순 밥 한 끼라도 챙겨 먹고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빳빳이 다려진 옷을 입고 출근하려면 움직여야 한다. 쓰레기를 비우고, 분리수거를 해야 하며 물때가 끼지 않도록 락스 뿌려가면서 화장실 청소도 해야 한다. 꾸물꾸물 미루다 방안이 온통 젖은 빨래 천국이 되지 않으려면 빨래 양도 잘 조절해야 하고 세탁소 문 닫기 전에 서둘러 드라이클리닝 맡긴 옷들도 찾아와야 한다. 냉장고가 텅 비어 비싼 배달음식이나 즉석식품에 의존하게 되지 않도록 틈틈이 장도 봐야 하고 배달 주문하는 김에 부족한 생활용품들도 같이 한 번에 싹! 알토란같이 주문해야 한다.


그 외에도 일일이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개미지옥 같은 집안일이 차고 넘친다. 어릴 때 엄마가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며 푸념하시던 상황을 이제 온몸과 머리로 느끼며 하면 중박, 안 하면 쫄망 집안일들을 처리하느라 바삐 동분서주한다.


지금은 나름대로 자취 내공이 좀 쌓여서 그나마 계획적이고 기계적으로 이 모든 일들을 처리하지만 독립하고 1~2년 차에는 요령이 없어서 애를 좀 먹었다. 엄마에게 전화로 왜 화장실 바닥이 점점 빨개지는 거냐며, 붉은 곰팡이의 존재를 해맑게 묻기도 했고 냉장고에 들어간 음식은 안 썩는 줄 알았다. 수건을 냄새나지 않게 빨고 보송보송하게 말리는 법도 몰라서 조금만 이상한 냄새가 난다 싶으면 다 버리고 새로 샀다.



확 그냥 다 놔버려?


한창 직장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며 개인적인 인간사도 괴로웠을 때 종종 '그냥 다 포기할까? 대충 할까?' 싶었다. 내가 좀 꾸질 꾸질 하고 구겨진 옷 입고 다닌다고, 쿰쿰한 냄새나는 수건에 얼굴 닦으며 생활한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 분리수거 열심히 안 하고 대충 다 종량제 봉투에 때려 넣고 줄행랑 쳐도 남들은 모르잖아.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에서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한테 관심 없을걸? 싶어서.


'내가 알잖아'


그러나 내가 알고 있다.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있는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알고 있다. 아무리 남 일에 관심 없는 세상이라지만 생각해보면 어릴 때도 묘하게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친구들은 어렸던 내 눈에도 다 티가 났다. 그러니 성인이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면 그것도 분명 다 티가 날 것이다. 비단 남의 눈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거울을 봤을 때, 신경쓰지 못한 까칠한 피부와 푸석한 모발을 보면 자존감이 지하 100층으로 끝까지 추락하는 기분이 든다. 그러니 힘을 내야 한다.


남들처럼 얼굴에서 번질번질 광이 날 정도는 안되어도, 어디서 피죽도 못 얻어먹고 다니냔 소리를 들지 않도록 힘을 내야 한다. 명품으로 휘감지는 못해도 단정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당당할 수 있도록.


빡빡한 인생에서 그렇게 오늘 하루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스스로를 돌본다.


<독립하면 저절로 되는 줄 알았어>
제3장. 어른이의 성장일지- 10번째 글
도서 출간: 2021년 1월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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