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 서막: 샴푸 전쟁

독립 프롤로그

by 도시 언니

사춘기를 능가하는 전쟁


아직 미혼으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이래저래 볼 맨 소리가 많다. 부모님이 '주말에 집에 있으면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다고 잔소리' 그렇다고 밖에 나가면 '대체 뭐하고 돌아다니길래 이렇게 늦게까지 안 들어오냐며' 잔소리 삼매경이시라고. 그 와중에 소비 생활, 돈 관리, 하다 못해 옷차림새까지 잔소리. 잔소리. 그놈의 잔소리 때문에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고 울상이다.


본인들도 이제 서른이 훌쩍 넘은 어엿한 성인인데 사사건건 일상을 간섭하는 부모님 때문에 더부살이 신세가 매우 고들프다고 하소연이다. 곧이어 '독립해서 자취하는 내가 너무 부럽다'며, 특히 가까운 미래에 결혼 계획이 없는 친구이 더 성화다. 결혼과 동시에 독립이라는 로망이 요원해진 지인들은 인생에서 대체 언제 나타날 지 모를 반려자를 기다리며 대체 언제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지 답답한 눈치다. 이제라도 독립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며, 현재 내 자취집의 전세보증금이 얼마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친구들이 점점 늘고 있다.


물론 각자의 가족사를 일일히 세밀하게 내게 전부 말했을 리 없다. 하지만 지근거리에서 그들을 지켜본 바로는 지인들은 최근 몇 년간 부모님과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지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조용히 친구들의 푸념들을 듣다 보면 그들은 10대 사춘기 때보다 일상에서 부모님과 더 극렬히, 자주 부딪히는 것 같았다. 차라리 앞뒤 안 보고 맹렬히 부모님과 싸우던 어린 때는 속 편한 시절이었다. 이젠 한 눈에도 자식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고 주름 가득한 부모님의 얼굴을 보면 마냥 어릴 때처럼 속 시원하게 내지르지도 못하고 그저 속으로 참고 삭히느라 더 스트레스를 받는 눈치다.



왜 그럴까,


돌이켜보면 나도 독립하긴 전 부모님과 참 많이 다퉜다. 이유를 반추해보면 취업과 동시에 생긴 내 '독립적인 소득'이 가족 내에서 '경제력=힘(Power)'을 가지게 해줬고 그것이 바로 갈등의 씨앗이었다. 부모님 입장에서 스스로 돈벌이를 하는 머리 굵은 자식을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령 배달 음식이 먹고 싶으면 더 이상 부모님께 '치킨 한 마리 사달라'고 온갖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간단히 배달앱으로 주문하고 결제하면 그만이었다. 본방사수를 위해 부모님과 지긋지긋한 TV 채널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됐다. 꼭 보고 싶은 드라마는 방에서 혼자 핸드폰이나 노트북으로 VOD를 결재했으니까. 내 눈에는 그렇게 예쁠 수가 없는데 부모님 눈에는 어디서 저런 천 쪼가리 같은 걸 돈 주고 사 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옷들도 월급으로 턱턱 구매했다.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쓰는데 뭐'라는 생각에 부모님 잔소리쯤이야 사뿐히 즈려밟았다.


사회생활을 하며 활동 반경이 학생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넓어졌고, 버젓이 내 이름으로 된 신용카드까지 쥐고 있던 마당에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 부모님은 사춘기도 별 탈 없이 무난히 넘겼던 모범생 딸이 하루 아침에 한 마리 통제되지 않는 크레이지 어린양처럼 느껴졌을 것 같다. 당연히 부모님은 적잖이 당황하셨을 것이고, 사사건건 나와 대립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부모님과 갈등이 더 첨예해지기 전에 자연스럽게 독립할 수 있었던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 나름대로 내 인생의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엄마 나 이거 싫어,


성인이 되어 나타난 갈등의 또 다른 원천은 내게 '부모님과 다른 확고한 취향'이 생겼다는 데 있다. 삶의 영역, 그러니까 옷이나 신발 같은 것들을 넘어서서 샴푸, 샤워젤, 바디로션부터 섬유 유연제, 커피 원두, 기타 자질구레한 생필품 등에도 취향이 생겼다. 그전에 엄마가 '엄마의 취향대로' 구비해둔 일상 용품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향'과 '내 피부 타입, 두피 타입'에 맞춰 최적화된 욕실 용품들은 가족 개개인의 취향보다 '위생'과 '가성비'에 초점을 맞춰 구비해둔 엄마의 욕실용품들과 첨예한 갈등을 일으켰다. 아직 최애 바디용품을 찾지 못했을 때라 이것저것 다양한 샤워젤과 바디 로션을 잔뜩 사모으고, '이건 내 것 = 나만 쓰는 것'이라고 가족들에게 못 박는 내게 엄마는 '왜 이렇게 혼자 유난을 떠는지 모르겠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셨다. 일상의 모든 자잘한 영역에서 번번히 부모님과 삐그덕 거렸다. 짐작건데 아직 부모님과 살고 있는 친구들도 내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로 부모님과 매번 극렬하게 싸우고 집을 나올 고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확실히 독립하고 부모님과 더 이상 소모적인 다툼을 하지 않게 되자 삶이 제법 매끄러워 지긴 했다. 이제 더 이상 부모님 눈치 볼 일 없이 내 취향대로 살림살이들을 장만하고 삶의 방식도 온전히 나 스스로 결정한다. 그러나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부모님과의 전쟁을 피한 대신 나는 1인 가구의 가장으로서 또 다른 유형의 난관에 봉착했다.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독립하면 저절로 되는 줄 알았어>
제1장. 아무것도 쉽지 않았어- 1번째 글
도서 출간: 2021년 1월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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