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보고서
코로나가 막 번질 무렵, 공개된 확진자 동선에 현재 재직 중인 회사 건물과 주변 일대가 포함되자 조직은 빠르게 재택근무를 공지했다. 이미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던 터라 갑작스러운 공지에 분위기가 제법 어수선해졌다. 나도 뉴스에서만 보고 들으며 그저 남 일 같이 느껴졌던 코로나가 나도 모르는 새, 슬그머니 내 지근거리까지 바짝 다가온 것 같아 조금 무서워졌다. 아직 치료제도 없다는데, 예고도 없이 내 삶에 훅 치고 들어온 코로나가 두려웠지만 조직 생활에 찌든 월급쟁이 개미는 일단 집으로 가라니까 신이 나서 얼른 노트북을 챙겨 바람같이 귀가했다. 그렇게 나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혹시 몰라 동네 마트에 들려 식료품과 간편식들을 조금 샀다. 아니 평소보다 '조금 많이' 샀다. 외국은 벌써 음식과 생활용품 사재기에 난리라던데 혹시 예상보다 장기전이 될까 봐 평소 좋아하던 간편식들을 1+1인 것처럼 2개씩 구매했더니 생각보다 짐이 무거웠다. 커다란 종량제 봉투에 식품들을 담아 회사 노트북까지 짊어진 채 낑낑대며 집에 왔다.
집에 돌아와서 '이제 됐다!' 싶었는데 문득 섬광처럼 든 생각.
"Water!!! 무우우우울!"
정수기가 웬 말이요, 2L짜리 생수를 주기적으로 배송시켜 먹는 나는 문득 집에 남은 생수가 고작 두 병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같았으면 클릭 몇 번으로 간단히 주문했겠지만 서둘러 들어간 쇼핑 앱은 생수를 포함해 대부분 생필품이 벌써 품절대란이었다. 그래도 일단 침착하게 아직 재고가 있어 보이는 곳에서 생수 두 박스를 주문하고 급한 대로 바로 동네 편의점으로 뛰어가 생수 몇 병을 사서 돌아왔다. 제발, 물이 늦어도 일주일 이내로는 꼭 와야 할 텐데. 지금이라도 다시 편의점으로 뛰어가서 생수를 조금 더 사와야 하나? 고민하다 일단 참았다.
노트북을 토닥거리며 아무 말 없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너무도 조용한 이 집이 조금 무서워졌다. 재택근무의 안온함과 편리함보다 고요함이 주는 공포에 크게 압도됐다. 재난 영화와 각종 디스토피아 마니아인 나는 '이렇게 집에 나 혼자 있다가 세상이 뒤집어지면 나는 영락없이 여기 혼자 고립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마냥 편치 않았다. 혹시라도 재난, 전쟁, 폭동 같은 천지개벽할 일들이 터지면 비실비실한 성인 여성인 나는 바로 먹이사슬의 가장 최약체일 텐데. 설상가상으로 SOS를 요청할 부모님 댁은 저 지방 시골 마을에 있어 걸어가긴 턱없는 거리라 도착하기 전에 벌써 뭔가 큰 사달 날 것 같았다.
이런 심란한 내 마음도 모르고 비교적 코로나 전파 초기에 빨리 재택근무를 시작한 우리 회사의 과감한 결단력에 여기저기 언론보도가 한창이다. 소식을 접한 지인들의 카톡 메시지가 속속 도착했다. 대부분 '부럽다, 집에서 편하게 근무하니 얼마나 좋으냐' 이런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 덮어놓고 '좋아! 좋아 죽겠다! 부럽지! 뇽뇽뇽!'이라고 농담처럼 응수하기엔 나는 제법 심각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처음에는 집에서 근무하는 것이 영 어색했지만 출퇴근 교통 지옥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근무 시간 바로 직전에 일어나서 재빨리 세수하고 편한 옷에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쌩얼로 일하는 루틴이 제법 익숙해졌다. 가끔 화상회의가 잡힌 날은 오래간만에 옷도 좀 갖춰 입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신나서 메이크업도 열심히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루 종일 혼자 일하다 째그만한 화상 창으로 보이는 직장 동료들이 세상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미리 사둔 식료품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원래 집순이라 집에 있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이렇게 강제 집순이가 되고 보니 처음으로 고독하다는 건 이런 것인가? 싶었다. 그와중에 여전히 디스토피아에 과몰입한 나는 새벽에 자다 눈이 스르륵 떠졌다. 그래서 오밤중에 혼자 비상 가방을 만들었다. 여차하면 들쳐 매고 기차역으로 달려가 부모님 댁 방향 기차 아무거나 꼬리칸에 매달리리기라도 할 요량으로 생존에 필요한 최소 물품들을 챙겼다.
작은 생수 몇 개랑, 초코바를 비롯한 간단한 비상식량, 몇 안 되는 소중한 금붙이들. 현금은 크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금 챙기고 속옷이랑 양말, 경량 패딩도 야무지게 말아 넣었다. 좀 더 고민하다 보조배터리랑 커터 칼도 챙겼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데 그 고요한 새벽녘의 나는 나름대로 진지했다. 비상약, 세안 도구와 화룡점정으로 숟가락과 젓가락 한 세트도 소중히 집어넣고 그제야 안정되어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비록 자가 격리 중인 사람들의 고충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1인 가구의 재택근무 생활도 자가 격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일어나서 일하고 혼자 밥 차려먹고 조용히 퇴근한다. 가뜩이나 조그만 생활공간이 온통 업무 공간으로 변했다. 답답한 마음에 점심시간에 바람도 쐴 겸, 집 근처의 커피전문점으로 원정을 떠났다. 한산할 것이란 예상과 다르게 동네 커피체인점 실내에는 사람들이 넘쳤다. 사람이 별로 없으면 노트북을 가지고 나와 오후 근무는 카페에서 해볼까? 싶어 미리 정탐해 본 것인데 실내가 만석이라 주문한 음료를 테이크 아웃해 얼른 나왔다. 커피도 맨날 집에서 혼자 셀프로 타 마시다가 오랜만에 남이 타주는 커피를 마시니 더 시원하고 청량한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간, 최근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커피도 앱으로 오더하고 바로 테이크아웃했으니 판매 사원과도 말 한마디 섞지 않은 셈이다. 가뜩이나 재택근무 기간 내내 거의 묵언수행 중인데 이러다 모든 사회적 능력이 퇴화할 것 같았다. 이러다 "아메리카노 주세요"라고도 똑바로 말 못 하고 버벅거릴까 봐 혼자 소리 내서 "아.메.리.카.노.아.이.스.아.메.리.카.노.주.세.요."라고 중얼거리면서 집에 와 다시 오후 근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도돌이표 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일어나서 씻고 일하고 점심 챙겨 먹고 또 일하다가 로그아웃과 함께 퇴근.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보면서 좀 쉬다가 저녁 챙겨 먹고 뒷정리하고 청소하고 씻고 넷플릭스 보다가 취침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면서 간간이 세상천지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엄마 아빠나 지인들에게 카톡 조금 보내보는 일상이 이어졌다.
과거에는 재택근무가 현실화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고 막연히 '출퇴근 개미 생활보다는 낫겠지'라고 생각했다. 껄끄러운 사람들 얼굴도 매일 안 보고 일하니까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막연히 동경했는데 막상 혼자 사는 1인 가구의 재택근무는 상상했던 것과 전혀 느낌이 달랐다. 물론 집중력이 높아져 업무 효율이 높아지긴 했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라는 진리를 절절히 실감했다.
1인 가구의 재택 근무는 때로는 외로웠고 고독했으며 사회와 물리적으로 단절된 것 같아 순간순간 두려웠다. 다행히 얼마 안 있어 다시 출퇴근하게 됐다. 우리 회사 말고 재택근무를 시행한 대부분의 회사는 앞으로 재택근무가 일상화되면 조직원들의 근태 관리, 업무 효율 같은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같은 1인 가구 입장에서는 오히려 1인 거주자로서 고립감, 사회 단절로 인한 외로움, 안전과 생존에 대한 두려움 같은 부분들도 업무 효율과 근태 관련한 것들만큼 조직과 사회에서 진지하게 고민해 줬으면 좋겠다.
나 지금 일개 개미 주제에 너무 많은 걸 바라나?
<독립하면 저절로 되는 줄 알았어>
제 2장.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도서 출간: 2021년 1월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