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家長)의 자격

잠시만요, 저는 제가 가장(家長)인데요

by 도시 언니

또다시 언급되는 '라떼는 말이야' 신입사원 시절. 아직도 밤고구마 백 개 먹은 듯 가슴 한편이 답답해지는 평가 관련 기억 하나를 꺼내본다. 다소 규모가 큰 팀이었던 우리 팀은 파트제로 운영됐고, 인사 고가도 각 파트별로 배분되는 시스템이었다. 연말에 S-A-B-C-D 순으로 평가 등급이 부여됐는데 직급별로 배분율이 조금씩 달랐다. 쉽게 말하면 사원은 사원끼리, 대리는 대리끼리 동일한 직급 내에서 상대평가를 통해 최종 등급을 부여받는 시스템이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부서는 조직 내에서 꽤 도전적인 목표를 받은 곳이었다. 일의 난이도도 높았고 환경도 열악해 당연히 타 조직보다 성과가 낮았고 높은 평가 TO는 늘 박했다. 눈치가 빤한 사람들이 스리슬쩍 기피하는 그곳에서 나와 후배는 1년 동안 정말 죽을똥살똥 열심히 일했다. 비록 실적 달성률이 낮아 정량 평가에는 별 기대가 없었어도, 남들이 기피하는 험지에서 꿋꿋이 열심히 일했다는 자부심에 정성 평가에서만은 제법 괜찮은 결과를 얻을 줄 알았다. 마침내 팀장님이 평가 결과 한 명씩 불러 알려주는데 내 차례가 되어 떨리는 마음으로 면담 장소로 향했다.


내심 속으로 A를 기대했는데 결과는 B였다.


솔직히 매우 실망스러웠다. 매일 밥 먹듯이 야근하고 나름대로 꽤 열심히 일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B면 앞으로 도대체 뭘 더 얼마나 잘해야 A나 S를 받는 건가 싶어 좌절했다. 그런 내게 팀장님은 '사원이 B정도면 과분한 결과니, 실망하지 말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며 격려하시길래 내심 '그래도 뭐 내가 좀 부족한 구석이 있겠지' 싶어 일단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얼마 후, 우연히 충격적인 소실을 접했다. 같은 파트 후배가 정성 평가에서 A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왜지? 왜 OO은 A고 나는 B지?' 싶어 머리가 띵했다. 물론 그 후배가 자격 미달임에도 불구하고 과분하게 A를 받았다고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후배의 노력과 성과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업적이 A의 자격에 부합한다면 나 역시 동등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오히려 어렵고 복잡한 일을 맡아왔다. 게다가 모래주머니 차고 경기 출전한 선수처럼 후배에게 선배로서 일을 가르치면서 업무 하는 이중고를 견뎠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가장(家長)의 자격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혹시 내가 인지하지 못한 후배보다 부족한 점이 있었는지 팀장님께 여쭤봤다. 그러자 팀장님은 한참을 머뭇거리셨다. 내 눈도 못 마주친 재 애꿎은 수첩 모서리만 바라보시다가 '사실은 나의 역량이 그 후배에 비해 뒤처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석연치 않은 대답에 왜 나와 그의 평가 등급에 차이가 있는지 재차 물었더니 그제야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원래 둘 다 A를 주고 싶었지만 우리 팀, 아니 정확히 내가 속한 파트 성과가 좋지 않아 사원 급에서 1명만 A를 줄 수 있어 내가 아닌 후배에게 A등급을 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팀장님이 덧붙인 말은 내 속을 다시 꽉 막히게 했다.


"OO는 가장이 될 꺼잖아. 그래서 OO를 A 줬어."


그 순간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싶어 또다시 머리가 띵해졌다. 사고가 정지되어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리자 팀장님은 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늘어놓으셨다. 'OO 이는 앞으로 결혼해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될 거고, 자신은 가장이 되어 보다 조직에 책임감을 가지고 다닐 사람에게 더 좋은 고과를 주었다'는 다시 생각해도 몹시 석연치 않은 논리를 너무 차분하게 말씀하시니까 되려 내가 할 말을 잃었다. 생각도 못한 답변에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 자리에서 날카롭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논리적이지 않은 말인데, 대꾸할 말이 없어 정적만 흘렀다. 팀장님은 '원래 평가라는 것이 상대적인 것이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고 올해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다소 황망한 격려의 말씀을 남기고 다급히 자리를 뜨셨다. 집으로 돌아와 팀장님 말씀을 곰곰이 곱씹어 보아도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후배보다 어떤 어떤 부분이 부족해서 더 낮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면 당장은 실망스럽겠지만, 그 이유가 나름대로 합리적이었다면 차츰 받아들이고 부족하다고 말씀 주신 부분을 개선하려고 더 열심히 했을 것이다.


그런데 둘 다 열심히 했고 심지어 내 역량이 절대 뒤지지 않는데, 한 명은 앞으로 가장이 될 거니까 A라고? 그럼 나는? 나는 가장이 안 될 건가? 나는 내가 가장인데? 나 혼자 스스로 먹여 살리는 엄연한 1인 가구 가장인데!


그 자리에서 "잠시만요, 저는 제가 가장인데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라고 단박에 내지르지 못한 것이 아직도 빈 벽에 맨주먹 날릴 기억으로 남아있다. 결국 조직에 오래 헌신하는 데 여성보다 남성이 낫다는 고리타분한 논리를 교묘하게 '가장'이라는 굴레의 핑계로 덮은 것뿐이다. 가장에 자격에 성별 따윈 필요 없다.



가장(家長)


최근에 글을 쓸려고 가장(家長)의 사전적 의미를 포털에 검색해봤다. 가장의 사전적 정의는 '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그것 말고 가장의 자격이 또 있을까? 한 가정의 가장이라고 하면 보통 '아버지' 혹은 '남편'이 연상된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다른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저희 집 가장이에요."라고 말씀하시는 경우를 나 역시 기억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놀랍게도 가장(家長)의 두 번째 사전적 정의가 바로 '남편을 달리 이르는 말'이라고 적혀있어 제법 놀랐다.


어쩆든'가장'에 대한 두 개의 뜻풀이는 분명 각각 독립된 정의인데 두 개의 뜻을 혼합해 '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 = 남편(아버지)= 남성'이라고 일반화하는 게 옳은 걸까? 나는 가장의 자격에 성별을 부여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한 가정을 이끌 가장이 꼭 남성일 필요는 없다. 편모 가정으로 어머니가 가장인 가정들도 많고, 나 같이 혼자 사는 사람은 성별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바로 가장이다.


'무릇 가장이라 불리는데 충족되어야 하는 마땅한 자격이 뭘까?' 싶은 의문이 들었다. 서류상 이름뿐이고, 허울뿐인 가장이 아니라 실제로 본인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가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에 마땅히 대표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가장의 자격이 아닐까.


나머지 성별이 어떻든, 나이가 어떻든 그런 것들은 가장의 자격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안녕하세요,
1인 가구로서 즐거움과 각종 애환, 독립에 대한 각종 귀여운 상념이 담긴 나머지 에피소드들은 2021년 1월, 채륜사에서 출간예정인 <독립하면 저절로 되는 줄 알았어>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그동안 1인 가구 이야기에 독자님들이 보내주신 많은 공감과 응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독립하면 저절로 되는 줄 알았어>
제 2장.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4번째 글
도서 출간: 2021년 1월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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