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어디쯤일까
<세이브더캣(SAVE THE CAT)>이란 시나리오 작법서를 뒤늦게 읽었다. 요즘 그간 쓴 글들을 묶어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개별 에세이지만 이야기들이 모여 하나의 영화같은 흐름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저자는 잘 만든 영화는 3막 구조이며, 1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했다.
(1) 오프닝 이미지
관객이 보기에 “재밌겠는데?” 싶은 무언가가 나와야 함. 앞으로의 여정을 이끌어갈 주인공의 ‘이전’ 모습이 드러나는 부분.
(2) 주제 명시
무엇에 관한 영화인지 드러나는 장면. 좋은 시나리오란 작가가 특정한 종류의 삶을 사는 것 혹은 특정한 목표를 좇는 것의 장점과 단점을 제시하는 논쟁. 내가 증명해보이겠다는 각오로 쫄지 말고 대사나 장면 등을 통해 선언할 것.
(3) 설정
주인공에게 어떤 결핍이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 설정할 것. ‘주인공이 고쳐야 할 6가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하자. (숫자는 임의로 정한 것이다) 시나리오의 마지막 부분엔 이 나쁜 습관들이 시한 폭탄처럼 폭발할 것이다. 그리고 치유될 것이다.
(4) 기폭제
나쁜 소식이 닥쳐야 함.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 이것은 분명 나쁜 소식이지만, 모험이 끝나고 나면 결국 주인공은 그것 덕분에 성장한다.
(5) 토론
기폭제를 맞은 주인공이 하… 그래서 어떡하지? 고민하다 결정함. 해보겠다고. (1막 종료)
(6) 2막 진입
자신이 내린 결정으로 새로운 사건으로 걸어 들어감. 어떤 사건에 의해 수동적으로 들어가선 안 된다. 결국은 스스로가 내린 결정에 의해 들어가야 한다. 주인공이 주인공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7) B 스토리
‘지금까지 앞선 얘기들에 집중하느라 고생했지? 잠시 쉬어가는 코너 줄게.’ 새로운 곳에서 누군가 만나 우정 및 사랑을 나눈다. 영화의 주제를 터놓고 얘기할 장소가 되기도 한다.
(8) 재미와 놀이 : 스토리를 전진시키진 않지만 재미있는, 영화의 예고편에 나올 법한 부분. 이를테면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짐캐리가 거리를 활보하며 신처럼 행세하는.
(9) 중간점
영화의 중간점. 주인공이 정점을 찍는 상승의 순간이거나 주인공 주변 세계가 무너지는 하강의 순간. ‘가짜 승리’를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자기가 원하는 걸 다 얻었다고 착각하지만, 겉보기에만 좋아보일 뿐 진정 필요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갈 길이 한참 남았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까지 읽다가 기분이 안 좋아졌다. 내가 ‘가짜승리’ 부분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잘 풀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갈 길이 한참 남은… 하지만 여기까지만 쓰면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뒤에 더 요약해보았다.
(10) 악당이 다가오다
주인공이 대적하는 적들이 (내면의 적이든 외적인 적이든) 그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대목. 주인공은 혼자 참고 견디며 더 큰 실패를 향해 나아가고.
(11) 절망의 순간
주인공의 삶이 산산조각나는, 모든 게 나빠보이는 순간. 시나리오 작가가 누군가를 죽이거나 하는 방식으로 주로 발현된다. 믿었던 멘토가 죽고, 주인공은 고통스럽지만 ‘난관을 해칠 능력은 사실 자신 안에 있었다.’ 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꼭 사람이 안 죽어도 오래된 사고방식의 죽는 곳이다.
(12) 영혼의 어두운 밤
고통을 겪은 주인공은 생각에 잠긴다.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자신이 보잘 것 없음을 깨닫고 모든 걸 운명에 맡기고 마침내 정신차림 (2막 종료)
(13) 3막 진입
B 스토리에 등장한 인물들 대화들과 A 스토리에서 보여준 주인공의 노력이 합쳐져 해결책을 얻음. 이제 이걸 현실에 적용할 일만 남았다.
(14) 피날레
주인공은 지금껏 배운 교훈을 적용하고 자신의 나쁜 습관을 극복한다. 낡은 세계는 뒤집히고 새로운 세계의 질서가 창조된다. 모두 주인공 덕택이다. 주인공이 승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드시 주인공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피날레는 이것이 일어나는 장이다. 이는 감정적인 만족을 안겨주며 이뤄져야 한다.
(15) 마지막 이미지
오프닝 이미지의 대척점. 변화가 일어났음을 확인시키는 증거.
끝까지 쓰다 보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다들 지금 몇 단계에 있을까? 아무리 내가 예측한다한들 그게 진짜 '승리' 혹은 '패배'일까. 너무 힘들 땐 자신이 해피 엔딩인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연기자라 생각하며 사는 것도 괜찮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