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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현 Jan 30. 2019

연애편지 #18



나는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는 마음 앞에 한참을 서서

방 한가득 들어오는 햇살이 사라지고

붉은 빛이 진하게 깔릴 때까지 생각을 지우다가

머리카락이 굴러다니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없이 울었던 날들을 지우려고

어둠이 내리고 새벽이 찾아오면 짐을 꾸렸어.


바지 두개와 티셔츠 세장, 그리고

집에서 입는 잠옷을 세트로 한벌

어디서 자든 침대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속내가 드러날 수 밖에 없으니까

어디로 가든 익숙한 촉감과 같은 냄새를 가지고 떠난다.


두 번 다시 도망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후로 다닌 여행은 모두 떠나는 것이었을 뿐

도망치는 게 아니야, 돌아올거야.

떠나서 이 곳을 그리워하자.

그렇게 아무런 사랑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어.


그렇게 떠난 곳에서도 밤마다 또 낯선 침대를 앞에 두고

향수를 세번 뿌리고 두번 숨을 고른 후에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사실 잠들고 싶지 않지만 하루를 끝내는 방법은 오직 잠드는 것 뿐이라

삶을 새롭게 사는 방법은 깨어나는 것 뿐인 것처럼

여행은 그게 쉬워, 나를 끝내고 태어나게 하는 것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과 같은 거야.


익숙한 잠옷에 몸을 묻고 베갯잎에 냄새를 묻히다가

팔 한쪽씩 들고 허리를 기울여 이불 밖으로 천천히 잠옷을 끄집어내

사람 냄새가 베인 이불속에서 맨 몸 어딘가에 볼을 기대고

사랑하지 않는 너를 그리워하며 잠을 청한다.


언젠가 네게 받았던 편지에는 영원히 나를 떠나지 말라는 말이 적혀있었지만

나를 떠난 건 너였다고 그렇게 너를 탓했었지만

네가 떠나고 난 뒤에도 그럭저럭 잘 사는 나를 보니

사실 떠난 건 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망치는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아서

필요할 때마다 이곳을 찾는 것일 뿐.

비겁하게도 도망칠 곳을 남겨두고 사랑하는 척하지

영원히 사랑한다는 거짓말처럼 영원히 머물 듯이.




/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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