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두달홍천살이 Sep 09. 2020

양곤 거리의 구걸하는 아이의 손에 쥐어 준 3만짯

가족의 빈곤을 짊어진 미얀마 어린이들의 삶  

양곤에서의 삶은 내가 진정 미얀마의 삶 속으로 녹아들어 가는 시간이었다. 언어 학습에서부터 시작해, 미얀마인들의 가족, 사랑, 우정, 노동, 문화 등 모두를 경험할 수 있었다. 양곤에서의 삶은 내게 자신감과 용기, 역량을 길러 준 학교와도 같았다. 이렇게 완벽한 현지 적응을 바탕으로 내 본 임지인 네피도에 파견되니 처음 OJT 때 기분만큼 막막하거나 두렵지 않다. 이제는 마음만 열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고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 그 감사함을 전하고자 가장 아끼던 분들에게 작은 선물을 나누고 왔다. 코이카 사무소 식구들에게 바나나 다발을, 모힝가 엄마와 닌수의 딸을 위한 장난감을 선물했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내가 가진 돈의 한계로 마음을 크게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내가 베풀 수 있는 모든 것을 베풀고 싶었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네피도로 떠나는 날 아침, 미얀마 플라자 백화점으로 돈을 출금하러 가는 데 10살도 안 되어 보이는 한 여자 아이가 머리에 벼 꾸러미가 담긴 바구니를 얹고 내 옆을 계속 따라왔다. 한 다발에 천원인 그 쌀은 미얀마 사람들이 아침에 사원 또는 길에서 새들에게 기부를 하는 데 쓰인다. 평소 같으면 요구받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며 피했겠지만 이 아이에게 마음을 내 주기로 하고 “안녕, 몇 살이야?” 하며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처음에 서로를 물건을 사고 파는 상인과 손님의 관계로만 보았지만, 대화 이어 나가며 인간적으로 연결고리를 느낄 수 있었다다. 


끈질기게 따라오는 아이를 귀찮게 여기기보다, 나를 따라올 만큼 뭔가 절박한 게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질문을 통해 아이가 내 기대보다 많은 10살이며, 집은 흘라잉 타운십(Hlaing Township)에 있고, 형제자매가 자그마치 9명이나 된다는 걸 알았다. 나는 아이에게 “아침밥은 먹었니?” 하고 물어보자 아이는 “아직 안 먹었다”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길가의 음식을 파는 곳으로 아이를 데려가 계란과 튀김을 사줬다. 부모님이 계시냐는 나의 질문에, 아이 말로는 현재 부모님이 많이 아프셔서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병원비가 3만 짯 정도인데 없어서 못 가고 있다고 한다. 미얀마에서 3만짯(한국 돈 2만 5천원 정도)은 정말 큰 돈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보장도 없었지만 나는 그 말을 믿고 아이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솟았다. 그리고 지갑에 남아 있던 3만 맛을 모두 아이의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이 돈을 가지고 집에 가서 부모님께 꼭 드려. 병원에 꼭 가렴.” 아이는 놀란 눈치였고 약간 울먹이는 것도 같았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그 뒤로 이 아이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돈을 쓸지에 대해서 의심과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냥 준 것에만 의의를 두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나만의 기대를 가지고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주었을 뿐, 그다음의 결과는 받은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마치 내 마음의 욕심 덩어리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 같다. 미얀마 어린이들에 대한 나의 특별한 관심은 훗날 NGO 활동가로 미얀마에 다시 파견되어 미얀마 어린이 결연 사업을 운영해 나가는데 동기 부여가 되어 주었다.  

이전 12화 4월은 미얀마의 새해, 물 축제 ‘띤잔’ 보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