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몽에이드 Oct 07. 2024

적당히 좋아하기가 쉽지 않네요

 

사람마다 적당히 좋아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원초적이며 어찌할 수 없는 욕구와 같은 거창한 것만 말하지 않는다. 인생이 그렇게 무겁고 심각하지 않으니까. 덕질과 같이 행복한 몰입에 빠지는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시작이 강한 끌림이든, 혹은 지나칠 수 없는 눈길이든 설렘과 함께 나와 일명 눈이 맞아버린 것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선을 넘어 버린다.



한 번은 다육이를 사러 갔다. (엄밀히 말하면 구경하러 갔다.) 분명히 5개만 사야지 했는데 10개를 사서 나왔다. 들고 나올 손이 없어서 그만큼 샀지 아마 더 샀을 것이다. "이렇게 살 줄 몰랐는데. 또 가야지." 나 빼고 아무도 관심을 안 주는 척박한 집에서 살고 있는 식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평온해진다. 하나도 같이 않는 그 초록의 각각의 색들이 아름다워서 좋을 지경이다. 물만 잘 주며 기특하게 새잎을 올려 보내는 식물, 죽어도 자연으로 보내는 마음으로 죄책감을 덜 수 있으니 나에게 딱 맞는 덕질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야구는 다르다. 어쩌다 야구에 빠져 버려서 이 끝없는 승패의 고리 안에서 번민에 빠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반응인가? 대응인가? 조벽, 최성애 박사의 <성장할 수 있는 용기>에서 인간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욕설, 폭언, 폭행, 갑질과 같은 공격이나 혹은 술, 게임 등과 같은 도피의 '반응'이다. 운동하기, 요가, 명상하기, 기도하기는 '대응'에 해당한다. 스트레스를 만날 때 의식적으로 바람직한 대응을 선택하는 것이 스트레스의 순환을 끊고 인간답게 살 수 있다. 물론 야구를 반응이라고 하지 않겠는데 도파민 폭팔 현장에서 더 인간 본연을 본다.



준플레이오프를 직관 1차전을 보러 온 가족이 나서면서 신나게 필승을 다진다. 질 것은 아무도 생각 안 한다. 그 50%의 확률에도 불구하고 승리만 보인다. 할 수 있는 모든 긍정의 힘을 끌어 담아 즐거우려고 행복하려고 그 두근거리는 현장에 들어선다. 마지막 9회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어이없이 잡히자 모든 응원석은 얼어붙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현장이 마치 엘사가 얼음 마법을 부린 것처럼 순식간에 굳어졌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었던가. 끝이 안 좋으니 즐거웠던 시간마저 휘발해 버린다. 이 분위기 어떻게 하면 좋아. 조용히 결과를 받아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며) 퇴장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극한으로 자신을 몰아붙여서 좋아하는 것을 더 이상 찾지 않게 자기를 만든다고 한다. 어느 날은 버찌가 눈에 아른 거려 아버지 돈을 훔쳐서 토할 때까지 먹었다. 조르바에게 있어 자기 원하는 바를 조절하지 못하는 나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옳은 말이다. 바라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자기 조절이 힘든 영역임이 분명하다. 오히려 종속이 되어서 나의 나 됨을 잊고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돼서 자유 점차 멀어지게 된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내가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도록 해버려요. (중략) 버찌를 한 소쿠리 샀지요. 도랑에 숨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넘어올 때까지 처넣었어요. 배가 아파 오고, 구역질이 났어요. 그렇습니다, 두목, 나는 몽땅 토했어요.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버찌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견딜 수 없었어요. 나는 구원을 받은 겁니다. 제 아무리 잘난 버찌를 만나도 말할 수 있었어요. 너 인제 필요 없다. 훗날 담배나 술을 놓고도 이런 짓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마시고 피우지만 끊고 싶으면 언제든지 끊어 버립니다. 나는 내 정열에 휘둘리지도 않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中에서-


나의 에너지가 바닥나지 않게 적절하게 좋아할 수 있는 그 선이 있다면 알려주길. 딱 그만큼만 좋아하게 말이다. 나 또한 자유를 갈구하는 인간이기에... 하지만 궁금하다. 조르바처럼 끝까지 가서 떨쳐버리거나 나의 의지로 조절할 수 있다면 과연 그것을 좋아한다고 볼 수 있을까. 마라탕의 맵기 단계처럼 좋아한다는 것을 그레이드로 나눌 수는 없지 않은가. 어제 뭐 했는지 카드 내역을 보면서 되짚어 보는 일상인데 마음을 뺏길 무언가가 얼마나 사람냄새를 나게 하는지 알려주고 싶다. 좋아하고 있다면 오히려 자유로움에 이르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전 03화 찬 바람이 불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