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제법 차가워진 공기에 이불을 당긴다. 잠결에 생각한다. 일어나면 따뜻한 이불을 꺼내야겠다고. 긴팔 옷과 긴 바지도 꺼내야 한다. '진작 꺼내놨어야 하는데...' 지난여름은 가을을 허락하지 않을 듯 지글지글 열을 올렸다. 찬 바람이 반가우면서 낯선걸 보니 그 더위에 시달리긴 했나 보다. 결혼 후 친정 엄마가 생각나는 순간이 몇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이렇게 계절 바뀌면서 옷과 이불을 교체할 때이다. 어릴 때 학교 다녀오면 엄마가 따뜻한 이불을 꺼내 깔아놓으시는 날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계절의 바뀜을 알았다. 그 순간은 모른다. (알 턱이 없다.) 20년이 지나며 (결혼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이게 얼마나 손이 가는 일인지. 여름옷을 정리하고 여름 이불 또한 빨아서 건조한다. 가을, 겨울 옷들을 꺼내 옷 상태를 체크한다. 작아진 것들을 골라내고 필요한 옷들을 파악한다. 그렇게 계절을 준비한 엄마 덕분에 먹고 자고 살아갈 수 있었다. 한 인간이 자라 가는 데 티가 안나는 것들이 참 많다. 그만큼 많은 관심과 도움이 오가는데 말이다. 이유가 있어서 감사한 것보다 인지하지 못한 이유 없는 감사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찌 되었건 이제는 계절을 준비하는 입장이다. 친정 엄마처럼 말이다. 겪어봐야 비로소 설명할 수 있는 것들 중의 하나가 이런 것 아닐까 싶다. 나도 이렇게 나의 관심과 도움을 나누며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을 행함으로 표현한다. (뭐 그렇다고 의미 부여해 본다.) 친정엄마는 빠르게 완료된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뭐든 각자의 방법이 있다고 본다. 아들 방으로 돌진하여 여름 이불을 걷어내며 순면 패드와 폭신한 이불을 꺼낸다. 가을, 겨울 옷들도 꺼내서 상태를 보며 행거에 걸었다. "아들, 이거 입어보고 작으면 엄마한테 얘기해. 작은 거 계속 입고 다니지 말고." 아들 방을 먼저 하는 것은 제일 간단하고 무엇보다 이것저것 묻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예상적중. 금세 끝났다. 아들은 누우면 몸에 폭 가라앉는 이불 감촉과 수면 잠옷의 보드라움에 푸바오처럼 굴러다니다 만족의 웃음을 띄웠다.
아들 방을 정리하기 전에 남편과 딸에게 미션을 주었다. 지금 현재 입지 않아 버릴 옷과 내년 여름에도 입을 옷을 따로 꺼내놓으라고 했다. (오늘이 온 식구가 집에 있는 공휴일인 게 감사하다.) 곧 부피가 큰 옷들이 나올 것이기 공간을 넉넉히 확보하지 않으면 옷장의 옷이 뒤엉켜서 쏟아지는 건 시간문제이다. 이게 입을 옷인지, 빨래인지 모를 옷무덤을 극히 혐오한다. (나만 혐오해서 문제지만) 어쨌든 빈 공간이 중요하다. 남편과 딸이 도와주어서 생각보다 빠르게 해결 됐다. 여름옷들은 옷장 안쪽으로 걸어두고 서랍 안으로 넣어두었다. 겨울 교복과 긴팔 옷들이 나오니 뭐랄까 든든한 나머지 뿌듯한 느낌까지 드는 게 오늘 숙제 끝이다.
돼지가 소풍을 가는데 본인을 세지 않은 것처럼, 핸드폰으로 통화하는데 핸드폰을 찾는 것처럼 아차차 내 옷을 꺼내지 못했다. 덩그러니 남아있는 리빙박스를 보며 지금 꺼내서 정리할지 차차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조용히 안방 문을 닫고 나왔다. 잠시 생각해 봤는데 다음부터는 내 것을 먼저 해야겠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내 것 안 챙기고 가족을 위해서 애쓰는 느낌으로 가는 것 같아서 말이다. 지금의 만족감이 피곤함으로 넘어가기 전에 멈춘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렇게 찬 공기와 함께 따뜻함이 올라오고 있는 계절이 시작되었다. (전기 매트도 깔았어야 했나.)
상단이미지: 픽사베이 (우리 집 옷장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