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둘째 아이는 또 시작이다. 물론 2학기에 전학 와서 적응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있다. 한 학기 내내 힘들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각오한 일이다. 하지만 매일 같이 달래서 보내야 하는 현실은 (물론 아이도 힘들지만) 나 또한 어렵다. 마음 같아서는 '학교 가는 건 당연한 것이다. 학교 생활은 너에게 주어진 사회이며 관계이다. 선택해서 참여하고 참여하지 않는 곳이 아니다. 낯선 선생님, 친구들 또한 시간이 지나면 편안해질 것이다. 시간을 견디지 못하겠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귀만 열고 있다 점심 맛있게 먹고 와라. 이 시간이 지나면 후에 무엇이든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나에겐 논리지만 아이에겐 잔소리라고 느끼는 것들을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말해도 지금은 모를 것이 분명하다. 내 입만 아플 뿐. 속 시원한 구석도 없기에 한 줄 요약한다.
"잘 다녀와. 파이팅!"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고 들어와 기도한다. "좋은 친구들과 친해지게 해 주세요. 또한 우리 아이가 좋은 친구가 되게 해 주세요." 코로나 시기에 학교에 입학해서 그런지, 아니면 그 시기 아이들만의 특성이 있어서 그런지, 혹은 예민하고 소심한 기질 때문인지 (기질이라고 규정하는 게 왠지 회피 같지만) 유달리 사회성이 떨어져 보인다. 활달한 친구들이 너무 다가와도, 놀리는 듯 말해도 다 놓치지 않고 반응하는 느낌이 드는 건 나의 과잉된 생각일까. 혹시라도 놓친 부분이 있지는 않은지, 읽지 못한 언어가 있지는 않은지 예민해진다. 멘털을 다잡아 보아도 이미 털려서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조선미 교수님의 영상을 찾아본다. 엄마가 만만하니까 실컷 자기 맘대로 휘둘러 놓고 학교에서는 잘 지내는 건 아닐까. 내가 아이의 널뛰는 감정에 같이 널뛰는 건 아닐까. 무엇보다 아이의 문제 상황(스트레스)을 번번이 내가 풀어주려 해서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주지 않는 건 아닐까. "오케이. 빙고. 너의 세상에서 네가 승부해라!"
웬일인지 깨우지도 않았는데 작은 아이가 일찍 일어나 등교 채비를 한다. 텅 빈 가방에 글러브를 챙기며 보이는 신난 얼굴이 반갑게 오랜만이다.
"뭐 오늘 체육이 있다고?8시 30분부터 시작해서 1교시 끝날 때까지 한다고? 빨리 가, 빨리 가. 가서 연습해서 홈런 쳐."
그래 티볼이었다. 세상에 티볼이 이렇게 감사할 일인가. 등교 수동이를 능동이로 바꾼 건 바로 티볼이었다. 매일 체육 시간에 티볼을 했으면 좋겠다. 인류의 기원부터 현대사까지 아우르는 공포의 사회 시험을 3개 맞아 오답 노트 3번씩 써도 좋으니 매일 티볼했으면 좋겠다. 영어 시험 재시험 봐도 좋으니 티볼 매일 했으면 좋겠다. 원고지 지우고 쓰고 지우고 쓰다를 반복해도 좋으니 매일 티볼했으면 좋겠다.
아휴. 이쯤 하니 부모의 평안의 8할이 아이들의 평안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결혼 전엔 나름 주관 있고 나 아닌 다른 이의 판단, 평가에 눈치 안 보며 주체적으로 살았던 인간이었는데 과거형이 되어 버렸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성장할 수 있는 용기>에 보면 인간이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웰빙(well-being), 힐링(healing), 빌리빙(beliving)을 거쳐 기빙(giving)까지 도달해야 진정한 행복을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려 합니다. -성장할 수 있는 용기-
전엔 나의 신앙과 가치관을 세우기도 벅찬빌리빙 인간이었다면 결혼하며 기빙의 인간에 발을 디뎠다. 아이들과 함께 하며 더욱더 그것을 느낀다. 내면의 저항과 현실의 벽을 매일 만나며 기빙마인드는 위태하다.진정 주는 삶의 기쁨을 터득하긴 아직 미약하다. 인지하든 인지하고 있지 않든 그렇게 기빙의 삶을 배운다. 실천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나를 더 인간답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