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울린다. 친정 엄마다. 잠시 망설인다. 지금 몸이 안 좋은데 받아도 될까. 이미 버튼을 누르고 통화를 한다. 때로는 머리보다 행동이 빠를 때가 있다.
내 코가 석자라는 말이 있다. 내 콧물이 석자나 흘러도 닦을 시간이 없을 만큼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남을 돌볼 여유도 당연히 없다. 엄마는 남이 아닌 가족이지만 가족도 나 아니면 남이라는 범주로 본다면 남이다. 나의 여유 없음에 들어온 엄마는 분명 상황을 모르고 있다. 결국 들어오려고 했을 때 조절할 수 있는 건 '나'인데 왜 나는 번번이 조절하지 못하는 것일까. 코를 질질 흐르면서 엄마를 챙기고 있으니 말이다.
친정 엄마는 모든 면에서 깔끔하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성격이다. 예를 들어 설거지를 한다면 그릇이 깨끗한 것은 당연하다. 설거지 후 뒷정리까지 완벽해야 한다. 이를테면 냄비, 프라이팬 정리하고 음식물 쓰레기 빼고 주변에 물기 정리하고 행주 잘 빨아 말리기까지 해두지 않으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매사가 이런 식이니 칭찬을 들을 수 없는 구조라고나 할까. 어릴 때 엄마는 늘 긴장하게 했고 무서운 존재였다. 어려서부터 엄마가 제시한 상황을 완벽하게 해내려 애를 썼지만 이는 언제나 불가능했다. 뭘 해도 서툴렀기 때문에 혼나는 게 일상이었다.
엄마가 아이들(나를 포함해서)을 결혼시키고 아버지와 두 분이 사시게 되면서 엄마의 이런 성격들은 아버지와 번번이 부딪쳤다. 매일같이 다투셨다. 엄마는 아버지가 자기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고 하시고, 아버지는 엄마가 너무 예민해서 뭐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두 분을 충분히 겪어봐서 잘 아는 문제이다. 무엇을 말하는지 너무 잘 알겠다. 그래도 이게 이럴 문제인가. 흔히 말하는 노년에 이런 일로 매일같이 에너지를 쓰면서 불화할 일인가 말이다.
"엄마, 아침부터 아버지가 뭐가 그렇게 못 마땅해요."
다른 날이면 30분이고 1시간이고 들어줄 수 있었는데 오늘은 못 견디고 한 마디 한 것이 한 마디로 안 끝났다. '힘들었겠네요', '아이고', '너무했다' 위로 3종 세트 돌려쓰면 되는데 도저히 오늘은 안 나왔다. 나도 그만 듣고 싶었나 보다. 사실 컨디션 안 좋은 건 나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다. 코를 닦는 게 먼저였는데 말이다. 어쩌면 이 상황을 조절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번번이 엄마가 버리는 감정 다 주어 담고 흔들리는데도 능력이 된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동안 엄마의 신세 한탄과 하소연들을 듣고 있었던 나 자신을 연민했다. 감정 쓰레기통이라고 생각했고 스스로를 참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 정도 들어주는 것은 딸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쯤 하면 이 사건을 직면해서 해결하기가 매우 피곤해진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님은 인간을 치밀하고 끈질기게 연구하며 직시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작업이라고 했다. 피하고 싶어도 돌아와서 마무리하려고 애쓴다고 했다. 어렵다. 가까이서 평생을 본 엄마의 서사를 이해하기도 이리 쉽지 않은데 말이다. 엄마와 나를 소설 속에 등장시키면 어떤 인물로 정형화시킬 수 있을까. 얼마나 인물에 가까운 성격으로 사건과 만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거리를 두며 상황과 감정에 빠지는 무기력에서 나와 객관화시켜 보려 애쓴다. 언제쯤 이 문제가 해소되려나. 세상에 좋은 이야기를 사랑하는데 사랑하기 어려운 아픈 이야기, 어려운 이야기들은 하마터면 묻힐 뻔한 이야기이던가.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다.
<어쨌든 나는 이 글을 완성하고 싶었다. 또 감정에 치우쳐 서랍에 넣어 막연한 힘든 기억에 넘겨버리고 싶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