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금 어디가?"
남편에게 목적지를 물었다. 백제 문화제를 가려고 나서는 참이다.
"부여"
"음. 공주로 가자. 공산성과 금강 주변을 걷고 싶네."
내 맘이다. 다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양 극단에 있는 두 가지 질문 중 선택하는 고뇌를 다룬 밸런스 게임처럼 더 좋아하는 것에는 딱히 이유가 없다. 왜 백제는 수도를 이전해서 선택을 하게 만드는 건가. 지금이야 놀러 가기 위한 관광이었지만 그 옛날 백제의 성왕은 웅진으로 온 지 60여 년 만에 사비 천도를 위해 얼마나 고심했을까 상상해 보니 피가 말리는 왕의 고뇌가 느껴진다. 어쨌든 오늘은 사비 말고 웅진으로 간다.
웅진천도(熊津遷都)는 475년 고구려군에 의한 불시의 한성(漢城) 공격에서 비롯되어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방어에 유리한 군사적 측면은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천도 직후부터 일어난 일련의 정치불안으로 왕권이 쇠약해지고 금강의 범람 등으로 인한 자연재해 피해가 잇달았다. 또한 도성(都城)이 협소하여 왕도(王都)로서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웅진천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538년(성왕 16) 성왕이 단행한 사비천도(泗沘遷都)이다.
사비 지역은 금강을 통해 중국이나 왜국과 연결되는 해상교통로 상의 중요한 요지였고, 특정한 세력이 없는 미개발지역이 많았다. 그리고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어서 왕권의 안정은 물론 새로운 백제국가 건설을 위해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 성왕이 백제의 중흥을 이루기 위해 이에 걸맞은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면서 사비로의 재천도(再遷都)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백제문화제가 2024년 9월 26일부터 10월 6일까지 공주 공산성, 금강신관공원과 부여 백제문화단지, 구드래, 정림사지에서 열린다. 날개와 뿔이 달린 상상의 동물. 무령왕릉을 지키는 수호신 석수 진묘수가 곳곳에서 환영한다. 가을바람을 맞고 있는데도 아직도 머리는 여름인 줄 알았나 보다. 저녁 시간이 되니 시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쌀쌀하다. 볼거리, 먹을거리가 굉장히 많았다. 얼핏 보기에도 공주의 가장 큰 연례행사임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어둠이 내려앉으니 불빛이 켜지고 낮과 또 다른 아름다움이 올라왔다.
남편과 아들과 유유히 빛 따라 물 따라 걸어갔다.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는 공연에 밤까지 북적거린다.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곳곳에 안전요원들이 길을 안내하며 붐비는 곳을 통제했다. 후에 알게 되었는데 백제문화제는 전국에서 공주를 찾는 대규모 행사로서 충남권 최대 역사문화축제라고 한다. 어쩐지... 동네 마실 나오듯 나왔는데 근처에 있는 축구장, 야구장을 주차장으로 해도 다 차서 주차하는데 애를 먹었다.
미르섬에서 보니 금강물에 수백 척의 황포돛배와 백제 유등을 띄워서 눈을 뗄 수 없이 아름다웠다. 미르섬에서 공산성까지 부표(배다리)로 연결하여 건너갈 수 있다. 해마다 금강에 조형물을 띄우고 배다리를 통해 건너가는 것이 백제문화제에 주 체험 코스였나 보다. 이 부분이 꽤 인상적이어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는데 해마다 환경단체와 지자체 간에 대립이 있었다. 이슈는 물이다. 저렇게 부표를 띄우려면 강물이 필요한데 어느 해는 가뭄이 심해서 바닥이 드러날 지경이고 올해는 폭우가 내려서 부표와 조형물이 다 떠내려갔다고 한다. 또한 축제 기간 동안 담수를 요청하는데 이때 번지는 녹조에 생태계는 위협받고 있다고 하니 대책이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밤엔 저렇게 아름다운데... 보고 느끼는 것 이면까지 살피는 것은 마음, 선한 양심을 어디에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소중한 것들을 소중하게 지키는 마음이 더 무겁기를. 환경을 함께 우리의 역사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은 관상용이지만 백제 시대에는 이 빛이 필요였고 생활이었겠다. 그들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에게도 이런 아름다움은 특별함이었을까. 낯선 거리에서 백제인들의 생활을 잠시 느껴본다. 금강 유역의 삶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을까. 웅진 천도 상황을 찾아 읽어봤다. 고구려 장수왕은 거침없이 한성으로 내려와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철수했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가 신라에 구원병과 함께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해서 백제를 일으키려 하지만 토착 지배 귀족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다. 흠. 정치적 지배 세력 싸움에 어려웠겠구나. 딱히 좋을 건 없었겠구나.
공산성 사적 제12호. 둘레 2,200m. 웅진성·쌍수산성으로 불린다. 표고 110m의 구릉 위에 석축과 토축으로 계곡을 둘러쌓은 산성이다. 475년 백제 문주왕 때부터 사비로 옮기기 전까지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다음 백과
공산성을 보면 고즈넉하고 소박하다. 야트막한 언덕을 둘러싸고 산성이 둘러싸여 있다. 한성 백제에서 웅진 백제의 시대의 시작은 적국에게 안전한 요새이지 않았을까. 지리적으로 볼 때 공주는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쪽에 위치한 계룡산은 고구려와 신라로부터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 웅진 백제에서 왕궁지에 대한 여러 견해가 있다고 하는데 이 공산성 안에 위치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국가 유산 미디어아트 공주 공산성 "무령의 나라, 찬란한 희망의 빛'
디지털 미디어 기술을 통해 1,500년 전 웅진 백제의 모습을 구현하고 세계 유산의 가치를 홍보하고, 백제 시대 문화 및 역사적 우수성을 전파하는 야간 경관 프로그램이다. 1,500년 전 위기에 놓인 백제를 새로운 도약의 길로 이끌었던 무령왕의 시대를 다채로운 빛과 감각적인 미디어아트로 풀어낸다. 무령왕의 환두대도에서 깨어난 두 마리 용을 비롯해 백제를 수호하던 갖가지 신비한 동물들이 희망의 빛으로 웅진성을 가득 채우고, 융성한 문화를 품은 채 큰 바다로 진출했던 웅진백제인의 꿈과 도전의 이야기가 성 안 곳곳에 펼쳐진다. -백제문화제 전시 프로그램-
배다리를 건너 공산성 내부 성안마을 터를 지나 공산성 앞까지 많은 인파를 헤치면서 온 것은 미디어 아트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서이다. 무령왕. 웅진 백제에 무령왕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혼돈의 시기에 그가 있어서 희망을 주었던가. 귀족 세력의 횡포를 막고자 행정체계를 개편하고 백성을 돌본 왕. 게다가 무령왕릉은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며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유적'이다. 무령왕은 백제와 공주의 아이콘일 수밖에 없다. 그는 그렇게 지금까지 기억되고 보존되는 백제 그 자체가 되었다.
백제의 시간과 함께 즐거운 밤 산책을 하였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시험이 없어서 그런가. 학창 시절 줄 치며 형광펜 그으며 외웠던 한국사가 흥미 있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