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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Feb 11. 2020

유은이가 건네 준 티켓

“엄마는? 엄마는 어땠어?”


이 문장으로, 나는 또 여행을 떠난다. 오늘은 무려 30년 전으로 떠나는 시간여행이 될 것 같다.

     

2020년 1월 24일, 이곳은 시댁 작은 방. 싱글 요 두 채와 베개 다섯  개, 차렵이불 두 개와 아기 이불 한 개로 방바닥은 다 메워졌다. 그 위에는 왼쪽부터 남편, 나 그리고 유은이 세 사람이 누워 꽉 채웠다. 밤 열 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시골의 밤은 유난히 깜깜하고 조용하다. 시댁 어른들은 모두 주무시고 옆에 누운 남편도 잠이 들었는데, 유난히 두 사람의 눈빛만 초롱초롱하다. 재잘재잘, 속닥속닥, 꺄르르륵... 잠들기 전에 가장 흥이 넘치는 수다쟁이 아가씨, 오늘 밤도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귓속말이 끊이지 않는다.

“엄마, 저기 벽에 있는 모자들은 뭐예요? 궁금해요~ 누구 거예요?”

“응~ 할아버지 모자랑 할머니 옷이지, 그게 궁금해?”

“응, 너무너무 궁금해~~ 신기해서 가슴이 콩닥콩닥해~ 엄마는 어땠어?”

“엄마? 엄마는...”


유은이의 물음으로 인해 생각나 버렸다. 아니 기억들이 쏟아져 내렸다는 편이 맞겠다. 부루마블 황금열쇠 카드를 받아들 듯, 유은이가 건네준 시간여행 티켓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1990년 1월의 어느 날, 서울 서대문구 한 주택의 안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져버린, 그리운 할머니 집이다. 대문 쪽으로 기다랗게 난 마당을 따라 여름이면 청포도 덩굴이 탐스럽게 열리던 작은 벽돌집. 작은 집 마당에 있던 평상에서는 사촌들과 소꿉놀이를 했고, 장독대에 올라 항아리 뒤에 숨어 숨바꼭질도 했다. 호랑이 나온다고 못 가게 했던 다락방도 수시로 드나들며 할머니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신나게 하루를 보내고 밤이 되면, 꼭 안방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 옆에 누워 잠들곤 했다. 온종일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놀던 집인데도, 밤이 되어 불이 꺼진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면, 왜 그리 생경하게 느껴지던지. 마치 멀리 외딴곳에 온 것 같았다. 옆에 누워있는 할머니를 보면서 다시 안심하기도 했다.

그날 밤 할머니 방에 누워 바라보았던 어둠 속의 가구와 소품들, 벽에 걸린 액자와 시계, 옷걸이는 모두 다 다르게 보였다. 밤이 주는 마법이었을까. 그런 마음들이 모여, 자려고만 누우면 들뜨고 설레였다. 엄마가 빨리 자라고 하는 말이 더욱 자기 싫게 만들기도 했고.  

   

할머니 집 작은 방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 유은이의 반짝이는 눈 속에서, 와르르 쏟아지는 기억의 홍수에 떠밀리듯 유년기의 지현이를 만났다. 그 시절의 내 작은 꿈들도 함께 따라왔다. 무엇도 알지 못했지만, 그래서 무엇이든 다 신기하고 알고 싶었던 그때, 모든 것이 다 새롭고 즐거웠던 그때. 유년기의 감정과 생각을 다시 하게 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자식을 통해 경험하게 될 줄이야.      


엄마를 가장 궁금해하는 유은이는 이야기 끝에 꼭 “엄마는?” 하고 묻곤 한다. 그리고 그 물음의 끝에 기대하는 대답은 지금의 내가 아닌, 어린 시절의 내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것들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 4~5살 시절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처음은 엄마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에피소드 몇 개를 얘기해주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다 일이 점점 커져서 어렸을 때 부르던 동요를 부르라거나, 유치원 다니던 시절을 얘기하라고 하거나, 심지어 외할머니 뱃속에서 뭘 했는지까지 물어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야기꾼’이 되어갔다. 아이는 훌륭한 방청객이었다. 무슨 이야기든 진짜로 믿고 충분히 놀라고 공감해주었다. 이런 아이의 반응은 이야기꾼의 길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고, 점차 우리 둘만의 즐거운 대화 방식이 되었다. 그래서 유은이가 내 어린 시절을 물으면, 조금의 거짓말을 보태어 즐겁게 화답해준다. 유은이의 모습과 흡사한 또 한 명의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그러면 유은이는 엄마도 자기와 다름없는 아이였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친근해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린 조금 더 가까워진다.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이로.


그리고 오늘은 조금 특별하게 진짜 유년기의 나로 돌아가 얘기를 해준다. 물론 이야기꾼 특유의 약간의 조미료는 첨가해서 미화된 이야기로.     


“응... 엄마도 그랬어. 엄마도 어렸을 때 할머니 집에서 누워 있으면, 할머니 방에 있는 것들이 다 신기하고 그랬지. 장롱도 신기하고, 액자도 신기하고~ 그리고 호랑이가 나올까 봐 무섭기도 했지~”

“엄마 애기였을 때?”

“응~ 그럼~ 엄마도 애기였을 때가 있었지. 유은아 이제 자자~”

“그래 자자~ 근데~ 잠이 하나도 안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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