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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May 19. 2020

잠자리 수다의 치명적 매력

눈, 코, 입, 눈썹, 이마, 볼.

모두 잠자리에서 배운 단어들이다. 자기 전에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었을 때 보이는 유일한 곳, 얼굴에 있는 단어들이기도 하고.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 바라보며 읊는 단어들은 시처럼 들려온다.   

  

육아에서 수면 교육은 중요한데, 아이가 잘 자주는 것만큼 엄마를 편하게 해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잠 잘 자고 밥 잘 먹으면 효자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유은이는 불효자에 속한다고 눈물을 머금고 단언할 수 있다. 예민한 아기였던 유은이는 재우기가 힘들었는데, 잠귀가 밝아 툭하면 깨서 울곤 했다. 덕분에 내 눈 밑은 그늘져 있는 날이 많았다. 다행히도 네 살 이후로는 잘 자게 되었는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겨버렸다.     


아기 때부터 초고속 옹알이로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유은이는 숨겨진 엄청난 수다쟁이였다. 유은이의 수다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활동하지만, 잠자리에서 더 폭발적이다. 잠자리에서 배운 말이 아마 절반은 될 것이다. 이젠 자기 전에 수다를 떠는 건지, 수다를 떨어야만 자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나저나 잠자리 수다에는 치명적인 매력 같은 게 있어서, 더욱 곤란하게 만든다. 정상적인 엄마의 루틴이라면, “인제 그만 떠들고 자라.”라고 말하겠지만, 난 같이 까르륵 웃고 소리 지르며 떠들고 있는 엄마다. 아이의 수면시간을 위해 자기 전의 수다는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늘 밤만’ 하며 끊지 못한 시간들이 지나갔다. 하트가 뿅뿅 나오는 눈으로 사랑한다고, 귀엽다고 지치지 않고 말해주는 사람 옆에 누워보시라. 치명적이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웃긴 얼굴, 웃긴 얘기를 해가며 아이 장단에 춤을 추고 마는 것이다.     


코로나 여파로 유치원에 갈 수 없는 강제 방학 시즌이 이어지면서, 증상은 더 심해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으니, 우린 1시간, 2시간이 다 되도록 불 꺼진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수다를 떤다.   

  

어젯밤도 이불 속 동굴 놀이를 하며 떠들던 중이었다. 어두운 밤 익숙하지만 불편한 소리가 울려왔다.

“응애응애응애응애” 윗집 아기의 울음 소리였다. 밤에 자주 들려오는 소리였지만, 어젯밤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불현듯 3년 전, 유은이의 아기 시절이 떠올랐다. 잠이 전혀 오지 않는 내가 억지로 자는 시늉을 해가며, 1시간이 넘도록 아이 옆에 누워있던 기억. 아이를 재우는 시간은 고행의 시간이기도 했고, 명상의 시간이기도 했고, 파란만장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고단했던 과거에서 빠져나와 보니, 유은이를 늦게 재우는 데에서 오는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지는 것을 느꼈다.     


유은이 재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지금 아이가 보여주는 귀여움을 마음껏 즐기면서 불안감 없는 행복을 느껴보자. 3년 전의 고생을 할부로 갚아나간다고 생각하면서. 이 달콤한 할부가 끝나는 날은 울면서 잠자리에 들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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