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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Mar 24. 2020

아이스크림이 가르쳐 준 것

“어떡해~~ 녹아 없어져 버리고 있어어~”

-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이거 봐~ 다 녹아서 없어져 버렸어 도와줘어어~ 흑흑.”     


울상인 아이의 손에서 녹아 없어져 버리고 있는 것은 레고 블록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점차 잃게 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기분은 어떨까?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소중한 것이었다면 깊은 슬픔에 잠기겠지만, 우린 살면서 많은 것들을 상실해 본 경험이 있다. 물론 경험한 만큼 견뎌낼 힘도 길러냈다. 그러나 상실감이라는 감정을 처음 겪었다면? 우리에겐 어떠한 감정을 처음 겪었던 순간이 있었다.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우리의 첫 상실의 감정은 어떠했을까?     


보통 사람들보다도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내가 첫 감정을 기억할 수 있을 리는 없고, 다만 타인을 통해 바라볼 기회가 있었다. 아이를 통해서.

그날은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처음 먹어본 날이었다. 아이스크림의 강렬한 달콤함과 부드러운 느낌에 아이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더운 날씨 탓에 아이스크림은 빠르게 녹았고, 이내 줄줄 흘러내렸다. 녹아 없어진다는 생각을 못한 탓인지, 아이는 조금씩 아껴 먹는 듯 했다. 어느 순간 아이스크림은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뒤늦게 아이스크림의 존재가 사라지고 있음을 알아챘고, 아이는 크게 울었다. 아이스크림을 찾는 두 눈엔 슬픔과 절망감이 가득했다. 나는 아이의 울음이 그저 귀여웠고, 웃으면서 아이스크림은 원래 녹아 없어지는 거라고 알려줬다. 이 일이 훗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 뒤로 한참의 시간이 흘러 아이는 말을 하게 되었고, 비로소 아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날들이 왔다. 베일에 싸여 있던 아이의 머릿속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미지의 그 세계는 나를 여러 가지로 놀라게 했는데, 그중의 하나는 ‘녹고 있다’는 표현의 쓰임새였다. 아이는 무언가 부서지고 찢어지고 무너져서 원래의 모습을 잃는 사물의 모습에 녹고 있다고 표현했다. 아이의 ‘녹고 있다’는 표현을 치환하면, 우리가 아는 ‘상실’이다. 아이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통해, 상실을 배운 것이다.      

이런저런 경험들로 마음의 굳은살이 제법 박힌 나로서는 여린 아이의 마음을 10%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책에서 한 글귀를 읽고, 아이의 마음에 대한 힌트를 발견한 것 같았다.     


왕창 냉동해두었던 ‘크로켓’은 서서히 녹아, 죽어가는 오필리아처럼 치명적인 모습으로 변해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크로켓과의 밀월” 속 한 문장이다. 크로켓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하루키가 냉동해 두었던 크로켓이 냉장고의 고장으로 녹고 있는 모습을 보며, 절망하는 장면이다. 하루키 역시, 녹고 있는 크로켓을 보고 죽음을 연상했던 것이다. 아, 이런 거였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의 상실로 인한 좌절감에 대처하는 의연함을 가르쳐 주었다면, 아이는 내게 상실이란 감정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느끼는 것인지를 본질적으로 보여줬다. 아이는 일상을 감각적으로 신체적으로 느끼도록 가르쳐준다. 내게는 감정 수업과도 같다. 난감하지만, 종종 연기도 필요하다.

아하하하 소리 내어 크게 웃는 연기부터 깊은 실망과 슬픔에 빠진 연기까지. 신기한 건 없던 감정도 노력하면 생긴다는 것이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참으로 낯선 경험이다.     


이제는 예전만큼 크게 좌절할 일도, 놀랄 일도, 슬플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점차 점잖아진다고 해야 할까. 슬프지만 사회화가 되어가는 거겠지. 그런 내게 날 것의 감정 그대로를 보여주는 작은 인간은, 나로 하여금 ‘아, 슬픔이란 이런 거였지, 상실은 이런 거였지, 기쁨은 이런 거였지.’ 하며 이마를 치게 만든다. 내가 그동안 감정의 맛은 보지도 않은 채, 소화부터 시키는데 급하지 않았는지 반성도 해본다. 감정 수업을 받는 요즘은 어떤 감정이 내게 들어왔을 때, 한 번 더 곱씹어 느껴보려 해본다. 배우들이 이렇게 연기 연습을 하는 것인가 하면서. 이것은 아이스크림이 아이에게 가르쳐 준 것, 동시에 아이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이다.



출처 : 무라카미 하루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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