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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May 19. 2020

가끔 대리를 부르고 싶을 때

일요일 오후 4시, 걸려온 전화에선 다음의 말이 흘러나왔고,

“오늘 너 자유시간이야. 너 하고 싶은 거 해.”

오늘 난 뜬금없는 자유를 통보받았다.     


신년회를 빙자한 2년 만의 동창 모임이었다. 5명 전원이 모인 귀한 자리였지만, 만남은 쫓기듯 끝이 났다. 수화기 속 목소리를 통해 들은 문장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이었다. 다만 기다림이 길었던 수신인은 기다렸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렸을 뿐이었다.     

“오오, 잘됐네. 이럴 때는 무조건 알았다고 해. 그냥 쉬어.”

“이제 뭐 할 거야? 영화 보러 가.”     

나보다 주변 친구들의 목소리가 더 들뜬 듯했다. 가족과만 지낸 시간의 두께 탓일까. 정작 혼자가 되어서는 뭘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종잇장처럼 가볍던 때가 내게도 있었는데.     


전화를 끊고 친구들과 헤어지고 나니, 한남동 사거리에 혼자 남았다. 시간은 오후 4시 20분. 어디든지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시간이었지만. 언덕 너머, 집으로 향하는 광역버스가 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어떡해야 하지.     


대리를 불러본 적이 없다. 예정 없는 술을 마시게 되어 자가운전을 할 수 없을 때 부르는 대리. 휴대폰 문자로 오는 대리운전 광고는 스팸 중에서도 가장 쓸데없는 스팸 광고라고 생각했다. 예정 없는 술을 마실 일은 내게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에도 예정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자의로든 타의로든 만들어놓은 그 제한은 한 번쯤 대리를 부르고 싶게 했다.     

누군가를 대신해 일을 처리해주는 사람을 대리라고 한다. 대리를 불러본 적 없는 내게는 대리도 허용되지 않았다. 괜찮게 지내다가도 가끔은 대리를 부르고 싶을 때가 있다. 횟수를 세어보진 않았지만, 살면서 문득문득. 잠시도 아이와 떨어질 수 없었던 그때, 말 못하는 아이를 옆에 두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때, 하루 종일 집 밖을 나가지 못해 베란다 너머로 아파트 주차장만 바라보던 그때. 밤마다 바람만 불면 울음소리가 난다는 아파트 전설 바위가 되어버리진 않을까 상상하던 때였다. 가끔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어지는 때. 그럴 때면 홈웨어와 앞치마는 대리님께 건네주고, 홀가분히 외출복을 입고 나가는 나를 상상한다.     


광역버스는 왜 이리 빠른 건지. 버스 탄 지 20분 만에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았다. 한 조각의 저녁 바람이 귓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점점 시간은 지나고, 해 질 녘에서 저녁 어스름이 드는 때로 바뀌어간다. 블루그레이 빛 하늘 아래 작은 보석처럼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들, 긴 선형의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이 내 곁을 감쌌다.   

  

자, 이젠 뭘 할까. 예전엔 밤에 뭘 하고 놀았었지? 아직 시간은 6시. 내겐 아직 4시간이 남아있다. 오늘 밤엔 대리마저 불러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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