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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Jan 31. 2020

내 귀여운 저격수

“졸려 죽겠는데, 왜 이렇게 늦게 와!”     


늦게 퇴근한 남편에게 잔소리하는 여자의 말이냐고요? 어젯밤 친구들과 술 한잔 하고 늦게 들어온 제가 들은 잔소리랍니다. 잔소리하는 그 사람 포즈는 어땠는지 아세요? 현관문 앞에 다리 벌리고 서서 양손은 골반에 걸치고 두 눈 부릅뜨고 얘기하는데, 학생지도 선생님 본 줄 알았다니까요.    

 

잔소리를 정~말로 듣기 싫어하는 저는, 저조차도 주변 사람들에게 잔소리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잔소리하는 사람은 엄마 외엔 없었는데, 이 사람이 그렇게 잔소리를 해댑니다. 미세먼지 심한 날은 “마스크 써야지.” 잠바 대충 걸쳐 입고 밖에 나갈 때면 “단추 꼭꼭 잠가야지.” 잔소리 폭격이 날아듭니다.     

그런데 이 사람 잔소리는 듣기 싫지 않더라고요.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잔소리하는 말투치고는 너무 귀여운 거예요. 그래서 하루는 직접 물어봤죠. “왜 그렇게 말해? 앵앵앵앵~ 하고?” 그랬더니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응~ 귀여우니까.” 래요.

자기가 귀여운 것을 알고 있더라고요. 이 사람, 귀여움을 총알 삼아 의도적으로 저를 겨냥한 거였어요. 괘씸하게도.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에 찬 근.자.감. 이 사람 자신감을 어쩌나요. 게다가 도도하기까지 한걸요. 하루는 하늘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어요.


“해님, 나를 방긋방긋 웃게 해줘요. 어떻게 할 거예요?”

이 고압적 자세. 세상 모든 피조물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나 봐요. 이쯤 되면 이런 자신감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궁금하기까지 합니다.

정답은 하나. 평생의 ‘을’ 일 수밖에 없는 제가 있기 때문이겠죠. 사랑하는 두 사람 중에 더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을이 된다는 슬픈 진실을 이 사람을 통해 절실하게 느낍니다. 저도 한때는 갑이었던 적도 있었어요. 사랑을 무기 삼아 연약한 마음을 저격했던 지난 연애들을 이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반성하기도 했지요.     


그래도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할 때가 있다고요! 저도 가끔은 참을 수 없는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나름의 반항을 해보기도 합니다. 귀여운 그의 눈빛도, 오종종한 입술도 보지 않으려 고개를 홱 돌려버리지요. 그랬을 때 제 귀여운 저격수는 어떻게 했냐고요?      

“날 사랑하지 않나 봐 라고 해봐.”

라네요. 뭐예요. 날 사랑하지 않나 봐 라는 말을 하라고 시키네요. 제가 삐졌다는 걸 다 알아채 버렸다는 거죠? 그래요. 제가 그 말 하면 안아주기라도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제가 그 말 할 줄 알고요?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거라고요.     


하지만 전 다시 “날 사랑하지 않나 봐.” 라고 했고,

그 사람은 “아닌데. 사랑하는데?”라며 안아주었죠. 그리고 상황은 반전되어 버렸죠. 그렇죠. 다시 을로 돌아가야겠죠.

지금 눈앞의 그 사람은 해맑게 웃네요. 귀엽게 코 찡긋해주고 눈웃음 지어주니, 제 마음 어느새 잠금 해제되네요.     


이렇게 제 마음 뒤흔들어 놓는 그 사람이 누구냐고요? 이젠 다 눈치채셨을 텐데...

아직 본인은 나이 먹기를 거부하고 있지만, 해가 바뀌어 현실은 다섯 살 먹은 김유은 양이랍니다.

귀여움을 무기 삼는다는 일. 저도 딸을 통해 많이 배우고 있어요.

이젠 저도 잔소리 좀 해주길 바라는 남편에게 잔소리 폭격 좀 해볼까 해요. 귀여움을 장착한 잔소리 폭격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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