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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Nov 08. 2021

하느님,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추석날 저녁의 풍경은 대체로 비슷한  같다. TV 앞에 모여 있는 풍경.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 저녁은 시댁 거실 TV 앞에 누워 나른하게 보내고 있었다. 아침 10 성묘부터 용문산 등산까지 다녀온 후라 노곤해진 탓도 있다. 그리고 오늘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거실 공기를 가르며 울려왔다.


“밖에 보름달 떴어. 보름달에 소원 안 빌어?”


마당에 있던 남편이었다. 모두들 잊고 있던 마지막 행사를 알려주었다. 추석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지만, 깜빡 잊어버리기 일쑤인 보름달에 소원 빌기를 말이다. 우린 모두 부지런히 일어나 신발을 신고 마당에 나갈 채비를 했다. 유은이와 사촌오빠인 우진이도 소원을 빌러 나가겠다며 씩씩하게 따라 나섰다. 다급하기만 한 아이들의 발에 신발을 신기고 함께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 서서 달을 바라본다. 유난히 동그랗게 보이는 것은 시골집 마당이라 그런 걸까. 왠지 소원을 더 잘 들어줄 것 같은 달이다. 정성스럽게 소원을 빌어본다. 소원을 비는 순간만큼은 마음가짐을 경건히 하게 된다. 소원을 빌다 보면 마음 구석에 자리 잡은 바람들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소원을 빌 때마다 자신에게 놀라는 편이다. 옆을 보니 남편과 어머님, 형님도 열심히 각자의 소원을 열중해서 비는 듯했다.


“우리 아빠 시험에 꼭 합격하게 해주세요!”

의젓한 소원의 주인공은 다섯 살 우진이었다. 당시 아주버님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어, 온 식구가 아주버님의 시험 합격을 소원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어린아이의 소원으로서는 조숙한 소원이 아닐 수 없었다. 우진이의 의젓함에 어른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그리고 익숙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 하느님, 동아줄을 내려주세요오~~”


그렇다, 유은이었다. 네 살 유은이도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하늘을 보며 나름 진지하게 소원을 빌고 있었다. 자세는 나무랄 데 없었지만, 웬 하느님과 동아줄인지. 아무래도 <해님 달님>을 많이 읽어준 탓일까. 유은이의 엉뚱한 구조요청에 가족들은 빵 터졌다. 이에 질세라 우진이도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달님, 달님, 제가 흔들흔들 해적선 게임을 갖게 해주세요.”


그래, 이게 바로 아이다운 소원이지.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순수한 소원. 그리고 질 수 없다는 듯 또 다른 소원이 이어졌다.


“달님, 나능~ 응~ 꼬, 꽃, 꽃 장난감을 사주세요오?”


유은이의 다급한 소원을 들으며, 우리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조용히 소원을 빌던 진지한 분위기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아이들에게 무대를 넘겨주어야 할 차례다. 아이들은 마치 랩 배틀이라도 하는 듯 소원을 빌어댔다.


우진 : 달님, 로봇 장난감을 갖게 해주세요.

유은 : 나느응~~~ 집 장난감을 사주세요오.

우진 : 달님, 친구랑 내가 엄청 친해지게 해주세요.

유은 : 나느응~~~ 나무까지가 뿌서진 걸 붙여주세요오?


소원 배틀은 삼십 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처음엔 갖고 싶은 장난감이나 친구 이야기를 하던 아이들은 점차 소재가 궁해진 모양이었다. 흥만 남은 어린 작가들은 점차 아무 말 대잔치로 만들어갔다. 이제 마무리를 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진짜로 빌고 싶은 한가지씩만 비는 거야.” 어머님의 마무리 멘트가 이어졌다. 마지막 소원은 아빠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 것이라며, 어머님과 형님은 기대감으로 우진이를 바라보았다.


우진 : 달님, 제가 한글을 많이 알게 해주세요.

유은 : 나느응~~~ 에비씨 잘하게 해주세요오?


한글공부를 시작한 유치원생 오빠의 진지한 소원과 어린이집 재원생 동생의 장난기 가득한 소원을 마지막으로 배틀은 종료됐다. <해님 달님> 속 한 장면을 연기하듯 소원을 빌던 유은 배우는 주체하지 못한 흥을 결국 춤으로 표현했다. 유은이의 작은 LED 운동화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 빛이 고요한 시골 마당을 번쩍이며 수놓았다.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던 저녁이었다. 정작 내 소원은 뭘 빌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게 뭐 대수이랴. 두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에 푹 빠져있다 나오니, 공기마저 부드럽게 바뀌어있었다. 가족들이 함께 한 가지에 푹 빠진 모습은 또 하나의 추석의 풍경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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