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남자와 한국 여자가 영국에서 만났다

by 민토리

스페인 남자와 한국 여자.


같은 년도에 스페인, 한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같은 년도에 스페인, 한국을 떠나 타지로 유학 간 두 사람.

그렇게 5년을 타지에서 떠돌던 두 사람이 영국에서 만났다.


학생회 활동을 하다가 만난 남편은 낯을 많이 가렸고, 유럽인 친구가 많았던 그는 처음에 나를 꽤 대하기 어려워했다. 그동안 만났던 스페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대체로 유럽인 혹은 남미인들과 스페인어를 사용하며 어울리는 모습을 많이 봐왔기에 대충 그러려니 하며 나 역시 눈치껏 거리를 뒀었다.


그랬던 우리가 2년 뒤에 연인이 되었고, 2년이 더 지났을 때는 부부가 되었고, 이제는 결혼 생활 10년 차를 넘긴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남편과 만나기 전 내게 스페인은 무지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영국 생활을 하며 유럽 여행도 꽤 많이 다녀봤지만, 이상하게 스페인과 포르투갈 쪽으로는 갈 일도, 마음도 없었기에 관심도 없었다.


단 한번 스페인에 간 적이 있긴 한데, 그때는 스페인 남쪽 도시 근처에 영국인 친구네가 머물고 있던 별장에 놀러 갔던 거라, 스페인 여행을 했다기보다는 스페인 날씨만 즐기다 왔었다. 별장 근처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국인이었고, 솔직히 2주 동안 스페인 현지인을 만난 적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참고로 스페인은 유럽인들에게 휴양지로 유명해서 특히 남쪽 지역은 마을 단위로 영국인, 독일인, 네덜란드인 등, 국적별로 끼리끼리 모여 사는 구역이 있다)


그나마 내게 있는 스페인에 대한 인식이나 이미지도 표면적이고 스테레오 타입에 부합하는 그런 것들이었다. 정열의 나라, 스페인. 좋게 말하면 활달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여유가 넘치지만, 나쁘게 말하면 시간 약속도 잘 안 지키고, 직설적이다 못해 좀 무례한 감이 있는 사람들.

물론 제대로 된 깊이 없이 단편적인 만남으로만 얻어진 인식이니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생각이긴 했다.


남편은 그렇게 미지의 영역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스페인의 이미지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오랜 해외 생활로 희석된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그가 입을 열지 않으면 스페인 사람이라고 짐작하기 어려웠다. 영어에 깃든 악센트 역시 그를 스페인 사람이라고 단정 짓게 하긴 어려워, 사람들은 그가 프랑스, 아니면 북유럽 출신일 거라고 오해할 정도였으니까.


그는 독일인 친구가 반가워할 정도로 시간 약속이 철저한 사람이었고, 규칙을 중요시 여겼고, 드라이했다. 클럽에서 여자들 귀에 'pollo con patatas' 혹은 'jamon serano'를 속삭이는 능글맞음은 없었고, 도리어 숫기가 없이 조용했다. 그러다가도 춤을 추는 걸 보면 아, 스페인 사람이긴 하구나 싶었다.


우리가 연인이 되고 반년 정도 지났을 때, 스페인 코르도바 (Cordoba)에 학회 일정이 잡힌 그가 내게 함께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당시 나는 박사 논문을 막 제출한 상황이라서 휴가가 절실했기에 냉큼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원래 현지 여행은 현지인과 하는 게 가장 좋으니까.


코르도바 일정 뒤에 스페인에 간 김에 자신의 가족들이 있는 발렌시아 (Valencia) 에도 들리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했는데, 논문 쓰느라 절어있다가 휴가 간다고 들뜬 마음에 그때는 그 제안을 가볍게만 받아들였다.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 될 거란걸 알지도 모르고.


그렇게 그와 함께 간 코르도바는 색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고대 로마시대와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절묘하게 섞여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도시였고, 골목들을 누비며 건물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그가 학회에 있는 동안 나는 시장에서 산 체리를 들고, 때론 아이스크림을 들고 코르도바의 골목들을 누비다가 나무 그늘에 앉아 스페인의 이른 여름을 만끽했다. 학회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내게 스페인의 온갖 요리를 맛 보이고 싶어 했고, 환하게 피어나는 저녁의 불빛을 그와 함께 손잡고 거니는 건 그 자체만으로 취할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우리는 장소를 여러 번 바꿔 가며 다양한 요리와 와인을 맛봤고, 그날 밤 나는 크게 체했다.


스페인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거냐며 걱정하는 남편을 보고, 영국의 샌드위치에 길들여진 속이 맛있는 음식이 갑자기 많이 들어오니 놀라서 그런 거라며 그를 달랬다.


그렇게 짧은 코르도바에서의 휴가가 끝나고 우리는 차를 빌려 함께 발렌시아로 향했다.


스페인 내륙을 가로질러 여행한 적은 처음이기에, 그제야 새삼 스페인이 큰 나라라는 걸 실감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문화권이 혼재된 곳, 드넓게 펼쳐진 땅 위에 심어진 포도들과 올리브 나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는 태양. 같은 유럽이라지만, 확실히 이제껏 가봤던 북/중 유럽의 나라들과는 다른, 심지어 이탈리아와도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나라.


발렌시아를 가는 동안 내 머릿속은 이렇게 드넓은 꽃밭을 헤매며 휴가를 만끽하고 있었다. 환한 색감의 여름 드레스를 입고, 차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감상하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과 처음 스페인에 갈 때도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휴가가 고팠고, 막연히 남편이 현지인이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도 했었다. 일정에 대한 고민도 크게 하지 않았고, 코르도바나 발렌시아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었다.


막연하게 발렌시아도 동쪽 바다에 인접한 도시니까, 말라가 (Malaga)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푸른 바닷가와 한적한 주택가를 상상했다.


내 순진하다 못해 무지함의 산물이었던 상상도는 발렌시아에 들어서면서부터 천천히, 그리고 착실하게 부서져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깨달았어야 했다. 국제결혼 역시 내 상상과는 다를 거란 걸. 내 앞길에 놓인 게 햇살 찬란한 휴양지가 아닐 거란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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