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에서의 첫날.
모든 게 낯설었고, 나는 여전히 남편의 가족 사이에 끼어든 이물질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영국에서도 혼자서 잘 살아남았는데, 여기서 살 것도 아니고, 혼자도 아니니 이 정도쯤이야.
발렌시아의 유명 관광 명소를 찾아보며, 난 여전히 내가 휴가 중이란 사실을 강제로 머릿속에 주입시켰다.
그의 집에서는 내가 방 밖으로 나서서 어슬렁 거리기만 해도 내가 길을 잃은 거라고 생각하신 건지, 아니면 뭘 잘못 건드려 고장이라도 낼까 봐 걱정하신 건지 내게 뭐라고 말씀하시다가 통역사로 당장 남편을 불러왔기에, 집 밖으로 나가는 게 가장 속 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남편이 좀처럼 시간이 비질 않았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To do 리스트라도 만들어 놓으신 건지, 그는 뭔가 해야 할 게 많았다. 부모님의 컴퓨터도 고쳐야 했고, 뭘 옮기는 것도 도와야 했고, 인터넷으로 뭘 주문해야 했고, 하여간 뭐가 많았다.
시간이 나질 않아 무척 미안해하는 그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나는 햇빛이 차단된 방 안에 앉아 그를 기다리다가 결국 못 참고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고, 로밍도 비싸서 못했던 시기라서, 길을 잃을까 봐 나는 처음에는 가까운 곳만 돌다가 서서히 구역을 넓혀갔다. 그중 가장 내가 애용했던 곳은 발렌시아의 구 시가를 감싸 돌고 있는 Jardin del Turia (원래는 Turia 강이 흐르는 곳이었지만 홍수 때문에 도시 외곽으로 물길을 돌리고, 그 자리에는 대신 공원을 만들었다.)였는데, 구역마다 볼거리가 꽤 있었기에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지리에 대충 익숙해진 나는 어느 날 공원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며칠째 쌓인 스트레스로 그의 집으로 일찍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끝에 있는 Ciudad de las Artes y las Ciencias (City of Arts and Sciences - 예술과 과학의 도시 - 눈에 띄는 하얀색 건물들로 손에 꼽히는 랜드마크 중 하나)에 다다랐다. 시간을 보니 거의 2시간쯤 걸은 것 같았고, 사람들은 점심을 먹으러 갔는지 주위는 한산해져 있었으며 진이 빠질 정도로 더웠다.
그늘에 앉아 쉬면서 내가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혼자 여행을 자주, 많이 다녀봤지만, 그때만큼은 여행이 아닌 쫓겨 나온 기분이 들었으니까. 내가 선택한 여행지도 아니었고, 내가 오고자 했던 곳도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나는 발렌시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건축물을 보고 있었다.
그건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것과 같은 뜻밖의 행운일 지도 몰랐다. 나는 안내 책자에서 그 건물을 보긴 했지만, 어떻게 가야 할지는 몰랐으니까. 다만 그때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밟아버린 쥐 때문에 도리어 심정이 불편한 상태였다.
어쩌다 여기까지 와버린 건지. 왜 이곳에 오게 된 건지, 왜 이렇게 더운 건지, 저 아름다운 건물을 보면서도 왜 내 기분은 그렇게도 칙칙하게 가라앉는지.
그렇게 잠깐 쉰 후에 다시 2시간을 걸어 그의 집에 도착했다. 도착하자 나를 반기는 건 남편의 걱정 서린 타박이었다. 왜 연락을 안 했느냐, 길도 모르면서 도대체 어딜 다녀온 거냐, 왜 이렇게 늦었느냐, 등등.
솔직히 좀 서러웠고, 그에게 화도 났다. 누군 나가고 싶어서 나간 줄 아나. 누군 거기까지 가고 싶어서 간 줄 아나. 내게 계속 미안해하길래 일부러 걱정하지 말라고 자리를 비워 준 건데. 점심까지 거르고 밖에서 헤매고 다녔던 건 나라고!
그래도 그가 걱정한 건 사실이었으니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의 부모님은 점심 식사 후 쉬고 계셨기에 방해도 하기 싫어 밥 생각도 없다고 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참고로 스페인에는 Siesta라고, 낮잠이라고 부르지만 늦은 점심 뒤에 쉬는 시간이 존재한다. 아무래도 햇빛이 가장 뜨거우니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생겨난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 까닭에 보통 스페인에서는 오후 1-2시부터 4-5시까지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는다.)
그리고 그날. 나는 처음으로 더위를 먹었다.
머리가 아팠고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려서 뭘 먹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꼬박 이틀 동안 앓아누웠다. 결국 남편과는 발렌시아를 떠나기 하루 전날 오후에 시내를 같이 조금 걸었던 게 다였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던 휴가의 끝이었다.
참고로 나는 지금도 스페인에 갈 때마다 한 번씩 크게 앓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