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남편과 나를 홀로 떠도는 섬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한 번도 외국을 나와보지 않은 가족들 사이에서 자라나 혈혈단신으로 해외 생활을 시작한 나였고, 남편이었다.
우리는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철저히 이방인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아 나름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모난 송곳처럼 자꾸만 튀어나와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내 가족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대화는 어긋나 종종 다툼으로 끝을 맺곤 했다. 나는 떠날 날만 기다렸고, 그런 나를 말리는 사람도, 내 새로운 시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사람도 없었다.
떠나온 뒤에 나는 자연스레 가족들과의 연락을 줄였고, 그렇다고 그들이 먼저 내게 전화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으니 우리는 점차 일 년에 몇 번 전화하는 사이로 바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거리를 둔 체 몇 년을 보내고 나니, 표면적일지라도 우리는 나중에 꽤 괜찮은 가족 관계를 꾸며낼 수 있는 사이가 되긴 했다.
그렇게 혼자 시작한 유학생활은 가난하고 외로웠다. 온갖 상위층들이 몰려 있는 케임브리지에서의 유학생활 동안 겉으로는 나 역시 그들과 동류인 양 여유롭게 굴었지만, 실상은 혼자 있을 때 시리얼이나 사과 하나로 배를 채우는 철저한 이중생활이었다.
영국에서의 유학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돈을 주는 일이라면 뭐든 찾았다.
학비 장학금은 당연하고, 그 외에 학회 참여 장학금, 논문 보조 장학금 등 뭐든 준다면 일단 다 지원해서 학비를 충당했다. 그 외 파트타임으로 조교일도 하고, 시험 감독도 하고, 학부생들 지도와 과제 채점은 물론 소액의 사례금을 주는 심리학과에서 주최하는 실험에도 지원하곤 했다.
그 뒤 박사과정과 병행할 수 있는 외부 회사에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궁핍하나마 경제적 자립을 이룰 수 있었지만, 그래봤자 한 달에 겨우 5파운드를 저금할 수 있는 정도의 삶이었다.
그런 나와 달리 내가 본 남편은 슈퍼마켓에서 굳이 가격을 확인하지 않고 물건을 고르는 남자였다. 심지어 슈퍼마켓 포인트 적립 카드도 없는.
무심하게 물건을 손에 잡히는 데로 골라 카트에 담아 계산하고 나가는 남자를 보다가, 나는 소심하게 그에게 다가가 혹시 영수증을 내게 줄 수 있느냐고 물었었다. 대신 내 포인트 카드에 적립하려고.
그는 내 요구를 의아해하면서도 흔쾌히 영수증을 내밀었고, 영수증에 적힌 금액을 보고 나는 표정 관리도 잊을 정도로 기뻐했다. 지금도 그 영수증의 금액이 기억날 정도로. 그래봤자 고작 몇 파운드로 환전될 포인트일 뿐인데.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저 남자와 어떤 관계로 발전할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세상에 속한 사람 같았고, 신데렐라의 꿈을 꾸기에는 내 희망회로가 무척 부실했으며, 당시 우리는 적당히 아는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남편은 처음에 나를 봤을 때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렸다고 했다. 내가 낯설고, 달랐고, 이상했고, 좀 미쳐(!) 보였기 때문에. 그래서 심지어 그는 나를 인터넷에 검색해보기까지 했다고 했다. 하긴 그때의 나는 학생회 활동은 물론 조정(rowing)을 비롯한 운동, 클럽 활동에 파티 등 마치 울분 터트리듯 미친 듯이 사회 활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접점이 없을 것 같았던 우리는 서로의 친구 관계가 얽히면서 서서히 가까워졌고, 그러다가 알게 되었다. 그 역시 혼자 외롭게 타지생활을 이어온 사람이란 걸.
그의 가족들은 물질적으로 풍족했을지 몰라도, 외국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그를 찾아올 만큼의 수고를 감수하진 않았다. 게다가 그가 장학금으로 모든 유학 비용을 충당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집에서의 지원도 끊겼다고.
우습게도 그는 그렇게 고생했던 시간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박사과정 졸업과 함께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는 쓰는 것에 여유를 두게 되었다고 했다. 하긴 나도 처음으로 두둑한 월급봉투를 받았을 때, 한국 가족 앞으로 무려 이백파운드 가까이 되는 선물을 보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돌아온 반응에 나는 곧 내 선택을 후회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정반대에 서있는 줄 알았던 우리는 그 거리를 돌고 돌아 등을 맞대게 되었다. 여전히 서로가 자라온 환경도, 성격도, 사고방식도, 모든 게 다르지만 적어도 등을 맞대고 기댈 수 있는, 그런 관계.
우리는 그렇게 만나기 시작했고, 같이 살기 시작했고, 약혼했고, 혼인 신고를 했다.
혼인 신고를 한 날, 내 가족들은 '어, 그러냐'라고 말했고, 남편이 말하길 그의 가족들 반응도 별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었던 것 같지만).
별다른 축복도 없이 우리는 건조하게 문서상으로 부부가 되었고, 주문한 반지를 찾아서 나눠 꼈으며, 신혼여행도 없이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씁쓸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자만, 그래도 두 개의 떠돌던 섬이 하나가 되었으니, 그것 만으로도 우리는 괜찮았다.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순진하게도 말이다.
결혼이라는 현실은 누가 설거지를 하냐, 빨래를 돌리냐, 그런 것에 있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 결혼이란 현실은 남편이 걸려있던 거미줄에 나도 걸려 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