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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Oct 15. 2023

그렇다고 사랑하지 말란 소리는 아니다

그에게 벌써 몇 개의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었다. 

출장을 간다기에 그럼 다녀와서 간단한 연락이라도 남겨 달라고 했는데도 그는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꾸만 늦어지는 응답. 얼마 전에 했던 말인데도 기억하지 못하고 되묻는다.

함께 있을 때는 평소와 다름없이 웃고 있지만 자꾸만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있냐고 대놓고 물어도 봤지만, 그런 거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저 피곤해서 그렇다고, 요즘 일이 많아서, 생각할 게 많아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던 그가 늦은 오후에 먼저 연락해 왔다.


"Can I talk to you?"


어쩐지 싸한 느낌이 들어 왜냐고 물었지만,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나중에 시간 괜찮을 때 연락해 달라는 말만 돌아왔다. 마지막 남은 회의 일정을 마치면서도 머리 한편에서는 물음표가 몇 개씩 피어올랐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쩐지 한 가지 결론으로 치달아갔지만, 생각이 그 방향으로 더 달려 나가기 전에 일단 붙잡아 두었다.


"I can talk now"


그 말 한마디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통화음이 울렸다.


어색한 웃음과 인사말. 어딘가 불편하고 불안해 보이는 표정. 말을 꺼내기 곤란한 듯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꾸만 머뭇거리는 그였지만, 나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자, 불렀으면 말을 해. 네가 먼저 말하기 전에 내가 알아서 그 용건을 대신 꺼내줄 생각은 없으니까.


5분가량 버벅거리던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I got offered a job"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심지어 그의 다음 직장이 어디일지도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요즘 그 회사와 딱히 새로 거래할 것도 없는데 어쩐지 미팅이 잦다 했다. 심지어 내년에 있을 재계약을 위해 그 회사에 미팅하러 간다고 하루를 잡아먹고 가더니 프로젝트 재계약이 아니라 자기 고용계약서 내용을 흥정하고 왔나 보다.


그 부하직원은 내가 그 거래처 이름을 말하자 마치 바람피운 걸 숨기고 이별을 통보하려다가 여자친구에게 바람피운 상대녀의 이름까지 까발려진 남자친구처럼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


그러면서도 원래 이직하려고 일부러 그 회사와 만난 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갔고, 내게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지금 회사나 일이 싫다는 건 아니다, 하는 온갖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그저 얼굴에 미소를 띤 체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맞장구 쳐준 뒤 알았다고, 그럼 퇴사 일정에 대해 인사팀과 이야기 한 뒤 다시 대화하자는 말을 한 뒤 화상통화를 종료시켰다. 통화를 끝낸 뒤 내 윗상사와 그 얘기를 하다가 말했다.


"I knew it" 

왜냐면 그 태도의 변화가 눈에 보였으니까.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한 번씩은 있을 거다. 나를 향하던 누군가의 애정, 열정, 관심이 사라져 가는 걸 목격해 본 경험. 그걸 알면서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마음. 못 겪어 봤으면 당신이 인생의 승자다.


당사자는 눈치채지 못할 변화인지 몰라도 그 애정의 대상이 되었던 상대방은 애정을 준 사람보다 변화를 더 빨리 알아챈다. 고양이 밥 주는 사람은 자신이 밥 주는 걸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었을지 몰라도 배고픈 고양이는 그 사실을 잊지 못하니까.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떠나면 어떤 공통점이 나타난다.


떨어진 집중력, 건성으로 하는 대답, 지키지 않는 약속, 혹은 자주 잊어버리는 약속, 멍한 표정, 잦은 실수, 숨기지 못하는 귀찮음, 자꾸만 밀리는 일정 등등.


함께 한 대화의 내용도 기억 못 해 몇 번이고 되묻고, 말수도 줄어든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딴생각을 공유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괜히 의심 살 빌미를 주기 싫으니까. 거짓말이 늘어나거나 아니면 교묘하게 말이나 전달방식을 바꿔 반쪽짜리 사실만을 말하고, 같이 있는데도 자꾸 시간을 확인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 한다.


우리는 연인이 바람을 피우는지 아닌지 하는 디테일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연인이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상대방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눈치챌 수 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가 억지로 밭에 끌려온 소 같은 모습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지, 누가 회사를 시간 때우기 용으로 쓰고 있는지, 누가 벼룩처럼 다음에 피 뽑아 먹을 수 있는 손쉬운 먹잇감을 찾아 눈치만 보고 있는지 대충은 다 알고 있다. 


결국 바람피우는 사람이나 회사에게 마음 떠난 직장인이나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건 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거나 그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파생될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덜 되었거나 귀찮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마음이 떠났다는 걸 알아도 헤어지자는 말을 꺼냄으로써 닥쳐올 상황들. 주위 사람들에게 헤어졌다는 걸 알리고, 그 사람과의 익숙한 흔적들을 지우고,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체력과 심력 소모는 어지간한 다짐이 아니라면 감당하기 부담스럽다. 


회사에서도 누군가를 해고하려면 명분이 필요하다. 그 명분을 증거로 남기기 위해 performance management 계획을 세우고, 업무 내용을 일일이 모니터링하고, 안 그래도 마음 떠난 사람과 몇 번이고 불편한 회의를 가지고. 그런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썩은 살을 도려내려다가 도리어 그 과정을 담당하는 멀쩡한 사람까지 오염시켜서 전체적인 팀의 사기와 의욕을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니 정말 그 사람이 큰 문제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대규모의 해고를 진행시켜 수량으로 밀어붙일게 아니라면 그 과정에 들어가는 에너지와 시간, 돈을 쓰고 싶지 않아 회사는 상황을 방치한다. 


물론 회사가 방치한다고 해서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동료나 다른 팀원들까지 모른 척하지는 않는다. 실연당한 사람이 내뿜는 파장이 다른 것처럼 일에 마음 떠난 사람이 내뿜는 부정적 파장도 무시하기는 힘들 정도니까. 


개인에게는 나름의 상황이 있겠지만, 실연당했다고 회사를 무단 결근하는 게 허용되지 않는 것처럼, 회사에 마음이 떠났다고 일을 대충 하거나 남에게 일을 미루는 것도 허용되지는 않는다. 


타인과 관계를 맺기로 시작한 이상 우리는 그 의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연인이 되기로 했으면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하고 연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그 회사에 취업해서 노동을 대가로 돈을 받기로 했으면, 거기에 맞는 일에 대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그게 싫으면 관계를 맺지 않거나 서로에게 최소한의 영향력만 미치는 관계를 맺으면 된다. 기대치를 낮추고 적당한 선을 타협할 수는 있겠지만, 계약을 불이행할 수는 없다. 만약 당신의 연인 혹은 회사가 당신에게 그 선을 넘는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계약과 상관없이 무례하게 군다면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이별의 미학을 떠올리면 된다. 


시간에 따라 상황은 변하고, 우리의 마음도 변한다. 온갖 금은보화로 장식된 보물도 시간이 지나면 색 바래지고 먼지가 쌓이는데, 매일 유기적으로 변하는 일상에서의 선택 정도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그 당시 상황에 맞춰 최적의 선택을 하고, 상황이 바뀌면 다음에 주어질 선택지들을 향해 도약하면 된다. 그게 연애이든 직장 생활이든. 


대신 발이 닿은 그 순간에는 최선을 다하자. 조금의 후회나 미련도 남기지 않게, 그 순간만큼은 상대방에게 최고의 연인이 되고, 그 회사에서 인정받는 인재가 되자. 그래야 우리가 내딛을 다음 선택지가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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