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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Oct 15. 2023

사랑은 카멜리온처럼

처음으로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 나란 인간은 전체적으로 참 미숙했다. 


가족과의 불화와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그 안에서 단편적으로 내게 내려지는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이었고, 그게 싫어 나는 빗장을 걸어 잠그고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누군가 다가오면 지레짐작하고 밀어내기 바빴다. 어, 그래, 나란 사람 별로인 거 알겠으니까 굳이 다가와 말해줄 필요는 없어. 


그런 까닭에 당시 그가 내게 다가왔을 때는 좀 당황스러웠다. 내가 밖에 '접근금지'라고 내다건 팻말을 보지도 못했나 싶어 팻말을 그의 눈앞에 대고 흔들고, 문전박대를 하고, 외면하고. 

그럼에도 내게 고백하며 웃는 모습을 봤을 때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감동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별로인 인간은 아니구나 싶어 안도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연인이 된 우리. 

연애를 하게 되면 세상이 핑크빛으로 변할 줄 알았는데, 내 일상은 여전히 우중충한 회색빛이었고 그건 도리어 내 연인의 순수하고 무난한 일상을 오염시킬 정도였다. 그건 나이에 숫자 2조차 담기지 않은 내 연인이 어떻게 해결할 수도, 바꿀 수도, 나를 구원할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었지만, 나는 그가 내 연인이라는 이유로 폭력적으로 내 고통을 그에 쏟아부으며 나와 나눠 쥘 것을 요구했다.  


그 끝은 예상했던 대로 갈기갈기 찢어진 상처만 남은 이별. 

그렇게 첫 연애가 끝이 난 뒤 짙은 후회와 죄책감이 몰려왔다. 수없는 다툼의 끝에서 피폐해져 가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다음에 혹시라도 연애를 하게 되면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두 번째 연애 때 나는 예전의 다짐을 잊지 않고 내 어둠을 감춘 체 전적으로 그에게 맞추려고 노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에게는 나만큼 복잡한 어둠이 있었고, 그의 어둠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다 보면 도리어 내 어둠마저 평범해 보이는 것 같아 안심한 적도 있었다. 


대신 찾아온 건 지독한 외로움. 나는 서서히 지쳐갔다. 그가 원하는 걸 나는 줄 수 없었고, 결국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찾기 위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별을 고하는 약속조차 잡기 어려웠던 그와 마주 앉았지만, 딱히 바람피운 그가 원망스럽거나 하진 않았다. 조금은 홀가분했던 것도 같다. 


그렇게 나를 다 드러냈던 첫 번째 연애와 나를 숨겼던 두 번째 연애를 끝낸 뒤, 이어진 연애들은 실험의 연속이었다. 조금은 나를 드러냈다가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고 적정선을 가늠하는 그런 연애. 

그건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상처를 더 받지도, 더 주지도 않는 적정선을 찾아 나와 내 연인을 서로로부터 적당히 보호할 수 있는 선을 찾아내는 과정. 




영국에서의 생활은 롤러코스터의 연속이었다. 


영어가 아직 서툴렀던 때에는 말 못 하는 병신 취급을 받으며 울분을 삭이다가, 그래도 케임브리지 대학 입학 허가서를 받은 후 그 사실에 우쭐했다가, 그 재학생들 중에 제일 가난하고 바보 같은 건 나인 것 같아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가, 노력했던 것들이 하나씩 성과를 드러낼 때면 스스로의 독함을 칭찬했다가...


박사과정 마지막 반복되는 취업 실패에 자존감이 땅을 치고 부정적인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학회라면 신물이 났고, 영국인에 대한 일반화의 오류까지 적용시키며 치를 떨었지만, 뒷배도 없는 외국인 학생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 찾아온 취업의 기회. 

나는 열정이 넘쳐났다. 알아서 일찍 출근했고, 알아서 늦게 퇴근했다. 주어진 업무는 물론 다른 팀의 업무조차 먼저 나서서 도왔다. 고객 업체와 연락하기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을 하는 동안 위염과 허리통증도 얻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 내 노력을 알아봐 줄 거라고 기대했지만, 어느샌가 그런 내 노력은 내가 '으레 하는 일' 정도로 인식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란 인간은 원래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걸 좋아하며, 새벽에 일어나 일하는 것도 괜찮아하는 그런 사람으로. 


그래서 학회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진중한 이미지로, 선을 그어보기로 했다. 계약서에 적혀있는 대로 이 정도만 일을 하자. 업무 처리는 이미 끝났지만, 일부러 시간을 두고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관련 전공 학과에 교수 자리가 났다. 지원하려고 했지만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이유는 내가 업무에 소극적으로 보이기 때문. 


그 뒤 찾아온 육아 휴직. 아이를 돌보느라 몸은 바쁜 와중에 상대적으로 할 일이 없었던 뇌는 끊임없이 생각을 반복했다. 이미 지나간 일들에 대해 이랬으면 좋았을까 후회했다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 자신과 비교하며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나라는 사람의 수준을 의심하고, 불투명한 미래의 가능성에 미리 절망하고.  


몇 번이고 바닥을 치고, 반복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라는 사람이 가진 한계가 이 정도라면 나라는 사람 자체를 바꾸진 못해도 겉에 두르는 것 정도는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드디스크는 그대로지만, 매번 내 모든 걸 연산시키는 것보다 필요한 것만 꺼내서 거기에만 용량을 쓰면 되지 않을까. 


그런 결론을 내린 뒤, 연애할 때 내가 상대방을 살피고, 내 적정선을 조정했던 것처럼, 직장 생활에서도 나는 비슷한 과정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취업이나 이직을 준비하기 전에 그 회사에 대해 분석하고, 회사 분위기나 인재상까지 가능하다면 미리 조사해 둔다. 면접 일정이 잡히면 면접관들 이름을 알아내 인터넷 검색도 했다. 그 후 면접 때에는 그 회사에서 요구하는 인간상에 가능한 맞춰 재단한 옷을 입는다. 


면접에 들어갈 때는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는 걸 확인한 배우처럼 일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약간 높은 톤으로 'Hello'하고 인사를 건넨다. 안녕, 우리 초면이지만 어제도 만난 것처럼 친근하지 않아? 혹은 안녕, 나는 너와 만나게 돼서 정말 기쁘단다, 그런 의념을 잔뜩 뿌려대면서. 


마치 내가 원래 그들 중 한 명이었던 것처럼 그들 역시 내적 친밀감을 느낄 수 있도록. 


그 전략이 성공해서 그 회사에 취업한 뒤에는 사교성 넘치는 웃음을 얼굴에 내걸고 재빨리 눈을 굴려 가능한 많은 정보를 긁어모으고, 그렇게 조금씩 습득된 지식을 바탕으로 옷을 수선한다. 그 조직 안에 가능한 한 빨리 녹아들기 위해서. 


그러다가 다른 곳으로 이직하게 된다고 해도 내가 잃을 건 없다. 본체인 나는 바뀌지 않았으니까. 그간의 경험들은 내 일부를 숙련시켰고, 나는 그걸 바탕으로 다음 옷을 더 능숙하고 빠르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내가 잘 모르고 익숙하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것 자체도 크게 두렵거나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헬스 할 때 내게 부족한 부분을 알면 그 부분을 강화시키는데 더 노력하게 되는 것처럼, 내가 잘 모르는 분야나 업무는 도리어 그 부분을 단련할 수 있게 하는 기회로 다가오니까. 물론 하체 운동 처음 해보는 사람이 다음날 근육통에 시달려 계단도 잘 못 내려오는 것처럼 우리의 처음은 불안하고 고통스럽겠지만 말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장단점이 있고, 연인에게 더 사랑받기 위해서, 혹은 회사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굳이 우리의 단점을 다 없애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그저 그 사람에게만 좋은 연인이면 되고, 그 회사에서 원하는 스타일의 인재가 되면 된다. 그 외의 부분까지 내주거나 바뀔 필요는 없는. 


주위 환경에 바꿔 스스로의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스스로를 보호하되 새로운 환경에도 가능한 안전하게 적응해서 그 안에 어울릴 수 있도록. 그러다 상대방이 바뀌면 또 그 회사에 가장 맞는 인재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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