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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Oct 15. 2023

적당히 사랑하기

나는 연애를 여러 번 했지만 그렇다고 남녀 관계에 빠삭한 전문가는 아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외모를 가지고 있거나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내게는 '박사' 타이틀이 있지만 나는 내가 박사과정을 수료한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다. 학회에 몸담고 있을 때 나는 공학과 인문학, 경영학을 넘나는 과목을 여러 개 맡아 강의를 했고, 연구도 했다. 그렇지만 역시 나는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영국에서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다녔지만, 두 직종 사이에 공통점은 없다. 영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지금 있는 직장으로 헤드헌팅 당했지만, 그럼 내가 그 분야의 전문가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물론 다음 직업도 이쪽 분야로 선택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 내게는 '이 분야에서만 몇십 년 종사해 온 전문가', 하는 수식어가 붙지 못한다. '선생님', '연구원', '대학 교수', '분석가', '공무원' 같은 단어들은 내게 직업적 정체성을 주는 대신 한때 살았던 도시의 이름처럼 내가 과거에 가졌던 역할들을 설명하는 이름표 정도의 의미만을 가진다. 


직업과 직종, 분야를 여러 번 바꾸었던 이유는 내가 딱히 잘나서 그런 게 아니었다. 뇌용량이 넘쳐서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으니 그냥 다해보자, 하는 소리를 할 수준도 되지 못한다. 다양한 능력이 넘쳐나는 천재라서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면 금방 싫증이 나 혓바늘이 돋는 병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라서 그랬다. 


내가 뭘 잘하는지 몰라서. 내게 무슨 재능이 있는 건지 몰라서. 딱히 내세울만한 게 없어서.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한 길만을 가게 하는 그런 열정과 꿈이 없거나 부족해서. 평생 단 한 가지 분야에 집중해서 내가 먹고살 수 있는 돈을 제대로 벌 수는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그래서 나는 얄팍한 수를 쓰고 있는 거다. 

이것저것 찌르고 쑤시고 다니며 혹시라도 뭐가 걸리면 이게 생존에 도움이 될까 봐 일단 주워 담고 보는 거다. 딱히 '이거다!'하고 자랑할 게 없으니 이것저것 몸에 둘러서 시선을 분산시키는 거다. 깔끔한 검은 정장에 화려한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줘서 패션니스타로 주목받기보다, 나는 위장용 군복을 입기로 결정했다. 


어디 가서 눈에 띌 정도의 활약은 못하겠지만 어느 환경이든 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생존에 모든 전력을 쏟아부은 상태.   


그 분야의 전문가다, 천생 뭐 뭐 하고 살 팔자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분야에서만큼은 최고다, 몇십 년을 그 일에 종사한 노하우가 묻어난다, 그 회사에 뼈를 묻었다, 어디의 터줏대감, 등등 그런 소리는 절대 못 듣고 살지 몰라도, 어느 분야를 가든 대충 적응해 밥벌이는 할 수 있도록.   


그런 이유로 나는 누군가에게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법, 혹은 전문가가 되는 법 같은 걸 알려줄 수 없다. 


평생 후회하지 않을 직장 찾기, 회사와 오래도록 알콩달콩 서로 사랑하며 늙어가기, 같은 건 알지도 못하고 딱히 그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대신 내가 알고 있는 건 회사와 어떻게 적당히 사랑할 수 있는가.


나를 굳이 깎아내지 않고, 변형시키지 않고,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회사와의 연애도 적당히 즐길 수 있는 법. 

당장 회사가 내일 내게 이별통보를 날려도 어떻게 하면 충격을 덜 받을 수 있는지. 아니, 회사가 이별을 통보하기도 전에 내가 어떻게 먼저 사표를 날리고 나올 수 있는지.

왜 우리가 굳이 한 우물을 파지 않아도 괜찮은 건지. 

선택의 폭을 어떻게 넓힐 수 있는 건지.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딱히 내가 뭘 잘하는지 모르는 나 같은 분들과 나누는 생존 경험담이다.  


내가 어떤 걸 잘하고 좋아하는지 모르면 어떤 분야의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할 게 아니라 지금 내게 당장 필요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곳을 선택해야 한다. 


그건 게임을 시작할 때 초기 장비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 최고의 성능일 필요도 없고, 굳이 비싸고 멋지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나중에 다 갈아치우거나 업그레이드시킬 것들이니까. 


그렇게 초기 장비를 얻어 게임을 시작했으면 그때부터 한 분야에 특성화된 스킬이 아니라 열심히 기본 스탯이나 경험치를 모으면 된다. 즉, 'transferrable skill' (양도 가능한 기술)을 모으란 소리다. 


Communication (의사전달/교환), time management (시간 관리), task management (업무 관리), team work, leadership, flexibilty (융통성), efficiency (효율성), problem solving (문제 해결), adaptability (적응력), 등등. 


어디 직장, 분야에 가도 직장인인 이상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조건들. 쿠키를 구울 때 필수 조건인 버터, 설탕, 밀가루, 계란 같은 것들. 


그 외에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업무 관련된 특수 스킬도 하나씩 배우면서 늘려가면 된다. 회계, 프로젝트 관리, 코딩, 마케팅 같은 것들 말이다. 거기에 관련 지식도 습득해서 접목시키면 훌륭한 초콜릿 쿠키나 아몬드 쿠키를 구울 수 있다.  


그렇게 쿠키의 종류를 모으다 보면 '쿠키만 대를 이어 구워온 집'의 장인은 되지 못하더라도, 누가 찾아와 뭘 요구해도 대충 커버가능한 잡다한 쿠키점의 사장은 될 수 있다. 




내가 그렇게도 잡다한 인간인 까닭에 나는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한 직업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을 동경하고 존경한다. 50년 동안 함께 해로한 노년 부부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말이다. 


내 연애기간의 최고 기록인 2년을 넘기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나는 단 한 사람과 15년 동안 연애를 하고, 또 15년 동안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어떤 직업군을 가지기 위해 십 년 넘게 공부한 뒤, 그 직업을 가지게 된 후에도 정기적으로 시험을 쳐야 그 직업이 유지되는 삶이 어떤 건지도 모른다. 


대학 과정 4년 동안 배운 전공 지식 중에 떠오르는 건 글로 써도 한 페이지도 안 될 것 같고, 석사 과정 할 때 배운 건 인상 깊었던 강의의 인용 부분 몇 가지이고, 박사 과정을 할 때는 그 분야와 관련된 몇십 년 치의 논문을 읽고 정리하고 공부했지만, 내 머릿속에 남은 건 내 논문과 그 바탕이 되었던 논문 몇 가지의 중심 내용뿐이다. 당연히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되지도 않은 해묵은 지식. 


분명 내게도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기회가 과거에 여러 번 있었는데 그 길에서 꼭 삐딱선을 탔던 건 나 자신이었다. 타고난 반골 기질이 아니라, 그저 그 길에 대한 확신도, 그 길을 내가 제대로 걸을 수는 있는지 스스로에 대한 자신도 없었기 때문. 어쩌면 뻔한 실패가 두려워 미리 포기한 것일 수도 있다. 


혹시라도 원래 가고 있던 길과 전혀 다른 길에 들어선 분이 있다면, 아니면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분이 있다면, 조심스럽게 전하고 싶다. 


어느 길을 가던 상관없다고. 


잘못된 길은 없고, 다른 길이 있을 뿐이다. 

그 길을 향해 갈 때 필요한 건 종착지에 대한 걱정이나 그 길로 안전하게 가기 위한 나침반 같은 게 아니라, 지금 걷는 길 위에, 그 주위에 뿌려진 보석들을 가려낼 눈과 그걸 적극적으로 주워 담고자 하는 의지다.


어느 길을 걷고 있든, 어느 회사를 다니고 있든, 굳이 최선을 다해 전력질주를 하거나, 그 회사에 몸과 마음을 바쳐 나를 깎아내면서까지 사랑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지나칠 과정 중 하나니까. 


우리가 지나치고 나면 우리와 상관 없어질, 우리 없이도 잘 살아갈 회사. 

그들과 함께 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완벽한 파트너가 될 수도 있고, 서로를 향한 열렬한 사랑 고백을 할 수도 있고, 잔잔한 우정과 신뢰를 쌓아갈 수도 있다. 


동시에 수틀리면 우리를 당장 내쫓을 수도 있는 변덕스럽고 잔인한 연인이 회사다. 그 관계가 끝난 뒤에도 여정을 계속해야 하는 건 우리이고. 


그러니 어느 순간이든 내 모든 걸 내주면서 상처받지는 말자. 

적당히, 적당히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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