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토리 Oct 30. 2020

유학 생활의 첫발을 내딛는 너에게

주고 싶은 소소한 팁들

내 유학 생활은 9월 말, 쌀쌀한 케임브리지의 버스 정류장에서 시작되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슈트케이스 2개만 딸랑 들고 도착한 나는 대충 지도에 의지해서 미리 예약해둔 B&B까지 걸어가서 하룻밤을 보내고, 그다음 날 내가 속할 케임브리지 대학교 컬리지에 가서 작은 욕실이 딸린 방 하나를 배정받았다.


침구도 하나 없이 덜렁 침대와 책상, 작은 옷장만 놓인 휑한 방.


호텔룸을 예상했던 건 아니었지만, 좀 당황스러웠다. 내가 가지고 간 건 여벌의 옷과 세면도구, 공부에 필요한 필기류 같은 것 밖에 없었으니 당장 덮고 잘 이불도 없었고, 심지어 화장실에 쓸 휴지 하나 없었다. 처음부터 참 빈약한 출발이었다.


그리고 10월 (케임브리지의 첫 학기는 10월부터이지만, 대부분 영국의 대학들은 9월 중순부터 시작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던 첫째 날.


한국의 대학 때처럼 동기들이 처음 만나서 통성명을 하고 후에 환영회 같은 것도 하고 그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갔는데, 간략한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 사람들이 너무 순식간에 패가 갈리고 사라져 버려서 당황했었다. 그렇게 가야 할지 남아야 할지도 모른 체 우왕좌왕하던 나는 결국 어설프게 밀려 나와 신입생들로 북적거리는 케임브리지의 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었다. 그래, 그때는 정말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절실히 다가왔었지.


그렇다고 내 성격이 소심하다거나 내성적인 것도 아닌데 - 학부 때는 여학생도 별로 없는 공대에서 과 부대표를 할 만큼 활발하기도 했으니까 -, 이상하게 뭔가 답답한 막에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구겨 입은 것 마냥 내게서 나오는 언어가 낯설었고, 영어를 말하는 내 목소리가 어색했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기분인 건지 파악하기 어려운 건 물론, 심지어 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나를 보고 있는 건지도 확신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지루하고 갑갑하던 적응 기간을 보낸 후에야 마침내 나를 보는 시선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무표정 뒤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내 모습에 어색해지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매해 다른 입장에서 새 학기를 시작하는 이들을 보자니 이젠 이런 소소한 팁도 전해주고 싶어 졌다. 


혹시라도 네가 나처럼 외로움을 온몸으로 겪으며 스산해져 가는 타지에서의 가을을, 혹은 봄을 보내고 있을까 봐.




1. 새 학기 초기 한 달 동안 웬만한 행사는 다 참여하자


대부분 대학은 학기 초에 가장 많은 행사가 열린다. 그런 곳에는 혼자라 좀 민망해도 일단 다 가길 바란다 (물론 너의 목적이 사교와 거리가 먼 조용한 학문 탐구라면 이런 내 말 따위는 깡그리 무시해도 된다. 가장 중요한 건 네가 뭘 원하는가 하는 거니까).


아는 사람이 오라고 초대한 게 아니라도 게시판이든 뭐든 알아서 찾아보고 시간이 되는 건 그냥 다 가봐도 괜찮다. 특히 박사과정 학생들. 박사과정은 석사나 학부와 달리 그렇게 요란한 신입생 환영회마저 없을 때가 많다. 대부분 나이대도 다르고, 연구주제에 따라 일하는 시간대도, 방식도 다르니까. 박사 2년 차는 데이터 수집하러 가서 안보일 수도 있고, 3년 차 이상은 논문 쓴다고 너와 말 섞는 시간도 아까워할지도 모른다. 같은 1년 차라도 처음에 얼굴 좀 보이고 다음부터는 연구실에 코빼기도 안 비치는 유령들이 되거나, 혹은 밤에만 나타나는 부엉이족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너도 곧 연구방향 잡고 페이퍼들을 읽어내느라 그들처럼 집, 도서관, 혹은 연구실 지박령처럼 되어버릴지도 모르지.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네 안에 잠재된 사교력을 모두 끌어모아 처음 한 달 혹은 두 달에 털어 넣으라고 말하고 싶다. 돌아다니면서 동아리 활동도 알아보고, 저녁때 있을 술자리나 카레 나잇 혹은 주말의 바비큐 파티 같은 것도 가보고, 점심때 누구든 붙잡고 같이 점심 먹자고 하거나, 하다못해 샌드위치 사러 같이 걸어가자고 해도 좋다.


초반의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하고 물러서고 싶어 진다면, 그것만 기억하자. 나중에는 사람 한 명을 사귀기 위해 지금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거. 그나마 처음이라 사람들이 '열려' 있을 때가 사람 사귀기 가장 좋은 시기라는 것도 기억하고.


특히 박사처럼 혼자 공부해야 하는 기간이 긴 사람들에게 초반의 인맥 형성은 필수다. 몇 개월 뒤, 날 풀려서 다들 공원에서 피크닉 할 때 여전히 혼자 지박령이 되기 싫다면, 나중에 논문 다 끝나고 축하 파티하고 싶은데 누굴 불러야 하는지 모를 상황이 싫다면, 초반에 열심히 사람에 투자해 놓는 게 박사 기간 동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니까.


2. 맘에 드는 동아리나 모임이 생겼으면 꾸준히 우물 파는 기분으로 참여하자.


나 같은 경우는 새 학기 초반에 매일 별별 동아리 행사를 다 들쑤시고 다녔다. 영국이라 처음 보는 동아리가 많은 것도 호기심을 자극했고, 이왕 온 거 본전을 뽑고 가자, 뭐 그런 마음도 있었다. 하루는 카약 동아리에 참가해서 캠 강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했고, 하루는 합창단에 노래하러 가고, 하루는 등산 모임 신입생 환영 술자리에 가고, 하루는 승마 동아리에서 바비큐 한다길래 가고...


그러다가 분위기 보고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동아리를 몇 개 정해서 거기만 꾸준히 갔다 - 예를 들어, 승마는 돈이 너무 들어서 못하겠고, 카약은 시력 때문에 불편해서 못하겠고, 대신 등산 동아리는 공짜 여행 같은 분위기가 좋아서 계속 참가한다든지. 이렇게 몇 개의 우물만 파라는 이유는 이곳저곳 다니기에는 일단 학업과 병행해야 하기에 여유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고,  최소 영국에서는 영국에서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초기 적응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동아리마다 성격이 다르긴 하겠지만, 경험상 영국인이 대다수인 동아리일수록 받아들여지는 시간이 길었고, 학부생들이 중심이 되는 동아리는 대학원생들을 어색해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영국인들의 성격상 처음에 예의 바른 것과 친해지는 건 차이가 있는데, 그렇기에 정말 그 모임의 일원이 되고 싶다면 꾸준히 나가야 한다. 굳이 막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내 존재를 알려야겠다고 애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냥 네 존재를 익숙해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마 어느 순간 그런 느낌이 들 거다. '받아들여지고 있다'라는 느낌.


그러다 정말 마음 맞는 사람이 생겨서 따로 만나 점심도 먹고, 차도 마시고, 집에 초대도 하고, 파티도 같이 갈 정도가 되면 금상첨화고. 그러니 지금은 답답해도 쪼렙 사냥하러 다니는 기분으로 열심히 참가하자. 어느 순간 레벨이 올라가 있음을 느낄 수 있을 테니.


3. 대화 주제는 가볍게.


이건 아마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최소 영미권에서 유학하는 사람이라면 가볍게 대화하는 것에도 익숙해지자. 상대가 누가 되었든 어떤 상황이든 누가 "Hello"라고 인사했을 때, 자동반사처럼 "Hello"가 나오는 건 물론, 그 잠깐의 침묵을 채울 수 있는 가벼운 대화 주제 몇 개는 폰 들고 다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준비하고 다니는 것도 좋다. 


가장 만만한 날씨 얘기부터 교통이나 스포츠, 뉴스 등등. 대신 아무리 최신 뉴스 1면을 장식하는 주제라 하더라도 정치와 관련되었거나, 그 나라 고유의 문화, 국민성, 역사와 관련된 건 가능한 피하는 게 좋다. 예를 들면 영국 음식에 대한 비판이라거나 브렉시트 얘기라거나. 


무엇보다 유학생활 초창기에는 당연히 많은 질문들이 목 끝까지 가득 차 있겠지만, 초반에 모든 정보를 가능한 많이 얻겠다, 그런 조급함을 좀 버리는 것도 괜찮다. 왜냐면 네가 그 사람에게 '내가 당신에게 뭐가 필요해서 접근한다'라는 이미지를 주면 다음부터 그들은 너와 가볍게 만날 기회 자체를 피할 수도 있으니.


그러니 적당히 흥미 있고, 가볍게, 대신 진심을 담아 그 사람을 보자. 물론 상대방의 애매하고 정중한 거절에도 상처 받지 않고 넘어갈 만큼의 면역도 가지면 좋고.


4. 한인 학생회와의 관계


이건 사람마다 다를 거 같은데.. 어떤 사람들은 제일 처음 어떻게든 한국 사람들부터 만나려고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한국사람을 일부러 피해 다니려 할 수도 있다.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사람이 좋으면 좋은 거지, 굳이 국적을 따져야 하나' 그런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을지언정 대규모로 벌어지는 행사에는 별로 참여를 안 하는 편이었다.


참석하든 안 하든, 어떤 관계를 맺든 그거야 개인 나름이긴 하지만, 굳이 내 개인의 의견을 말하자면, 한인 학생회에 일단 등록은 해놓는 게 낫다. 왜냐면..


첫째, 유학생활을 하면서 한국 사람을 전혀 안 만날 수는 없다. 학교에 한국인이 아주 많거나, 아니면 아주 적어서 학생회 영향력이 미미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면 - 혹은 네가 은둔형 외톨이로 지낼 게 아니라면 - 어떻게는 너의 존재는 한인 학생회에 알려지게 되어있다. 그리고 유학 후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면, 어디서 어떻게 엮일지도 모르니까 차라리 처음에 등록하고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라도 알아놓는 게 낫다. 


그리고 아무리 외국인 친구가 많아도, 그들이 다른 한국인을 만나면 그들은 아주 순수한 의도로 널 그 사람들에게 소개해주려 할 거다. 혹은 너에 대한 관심이 한국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져 자연스레 그 친구가 널 한인 학생회로 인도할 수도 있고. 그럴 때 한인학생회와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거기서 여는 행사에 참가하는 건 너의 향수병에도, 외국 친구들과의 관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둘째, 좀 더 실리적인 이유를 대자면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 기업에서 입사설명회를 하러 올 경우, 대학 전체에 공고를 띄우진 않는다. 보통 그 대학의 한인 학생회에 바로 연락을 하고, 한인학생회에서 전체 이메일로 공고를 띄우는 식이고, 이건 어떤 행사가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한인학생회에서는 단물만 쪽쪽 빨아먹으려 하는 유령회원을 싫어할지 몰라도, 개인 입장에서는 이득인 셈.


아마 그런 걱정을 할 수도 있을 거다. 한국에서도 피곤했던 인간관계에 또 휘말리면 어쩌냐고. 그 걱정을 하는 마음도 이해하고, 주의해야 하는 것도 맞다. 한국에서의 지위, 학력은 한인학생회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니까. 그래서 일단 가면 이름, 나이, 한국 출신 도시부터 시작해서, 어느 대학 출신이냐, 뭐 하다 왔냐, 시민권자냐 아니냐 등등 신상 까기 다 들어간다. 그걸 바탕으로 네게 라벨이 붙고, 원하든 원치 않든 어느 쪽으로 '분류'될 수도 있지. 그걸 바탕으로 갑질 하는 인간을 내가 여기까지 와서 봐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겠지만, 그럼 안 보면 된다. 한국에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너나 그 사람이나 유학 온 학생일 뿐이니까. 


그리고 사실 어느 모임이 그렇듯 한인학생회도 이미 중심세력이 형성되어있거나 파벌이 나눠져 있거나 한다. 시민권자들끼리, 학부생들끼리, 대학원생들끼리, 한국의 같은 대학 출신들끼리, 한국의 같은 지역 출신들끼리 등등. 그러니 그중에 이미 친하거나 아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닌 이상, 네가 들어간다고 막 사람들이 네게 붙거나 하진 않으니 미리 피하진 말자 - 물론 네가 그 사람들이 '친해지고 싶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면 좀 시달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결국 갑은 너잖아?




이렇게 꺼내놓긴 했지만 어차피 그 시간들을 보내는 건 온전히 네 몫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니 너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을 수도 있고.. 


그렇지만 그 방식이 무엇이 되었든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네 길을 가기를. 이제 첫걸음이니 미리부터 지치지 않기를. 



이전 01화 주저 없이 떠나는 너를 위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