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유학생의 흔한 유형들
내 십몇 년의 타지 생활 중 대부분은 대학 근처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엔 어학 연수생이었고, 후에는 유학 온 대학원생이었으며, 나중에는 가르치는 입장이었던 까닭에 학생들을 볼 때가 많았는데, 학생이었던 시기만큼 관찰자의 입장으로 있었던 시기도 길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으로 대충 유형을 그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그냥 재미 삼아 적어보는 한국인 유학생 유형들.
1. 연구실/도서관 죽돌이/죽순이
유학생들 중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유형이 바로 밤낮, 주말을 가리지 않고 도서관/연구실로 출근하는 사람들일 거다. 이건 아무래도 한국에서의 하던 버릇이 그대로 남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한국에서는 굳이 시험 때가 아니라도 도서관에 일단 자리를 잡아 둔 뒤, 놀든 수업을 가든 공부를 하든 하지 않는가? 대학뿐 아니라 중고등학생 때부터 독서실에 가는 게 익숙하고, 한국 대학의 도서관과 대학원은 밤에도 불이 환하다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외국에서도 주말이나 늦은 저녁에 연구실이나 도서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거나 비슷하게 동양인일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이들을 학구파이라 부르지 않는 건, 이들이 굳이 공부를 하러 도서관이나 연구실로 주야장천 출근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 중에는 집에만 있자니 답답하고, 그렇다고 나가고는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할진 모르겠고, 그렇다고 누구보고 만나서 놀자 하긴 좀 그렇고, 그럴 때 도서관이나 연구실이 가장 만만해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비슷하게 하릴없이 나와 있는 다른 한국인을 보면 같이 담배를 피우러 가거나, 점심을 먹으러 가거나, 그냥 수다라도 좀 떨고, 그렇게 사람이 모이면 저녁때 펍에 같이 가기도 하고. 굳이 그런 게 아니라도 집에 인터넷이 잘 안되면 학교에 아무도 없을 때 좋은 인터넷 속도 이용해서 한국에 있는 친구/연인이랑 채팅하거나 한국 티브이나 영화 같은 걸 보러 올 수도 있다. 만약 셰어 하우스에 산다면, 괜히 집에 있으면서 다른 하우스 메이트들이랑 부딪치며 눈치 보느니 그냥 속 편하게 혼자 있으려고 나올 수도 있고... 이런 분들 중에는 한국에서 하듯 편한 슬리퍼를 연구실에 갖다 놓거나 작은 담요나 쿠션을 가져다 놓는 분들도 많다.
2. 외로운 남자들의 모임
1번과 연결되는 건데, 어딜 가도 꼭 30대 전후의 남자들이 모이는 모임이 있다. 누가 모이자, 그런 건 아닌데 자연스레 모여서 저녁에 펍에 가서 나쵸 같은 거 하나 시켜놓고 술을 마시거나, 아니면 혼자 사는 사람 집이나, 기숙사에 살지만 공용 주방이 유달리 한산한 곳, 셰어 하우스에 살지만 집이 자주 비거나 서로 신경을 안 쓰는 그런 곳들을 모임 장소 삼아 만나기도 한다.
이 모임의 주된 멤버들은 대부분 군대에 다녀왔고, 직장 생활 경험도 있고, 결혼을 이미 했거나, 외국 생활도, 영어로 말하는 것도 아직 낯선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의 남자들이다. 다른 한국인들도 따로 모이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 모임의 특징이라면 일단 여자나 외국인이 끼는 걸 좀 불편해하고, 너무 어린 남자나 한국인이지만 현지 국적을 가진 남자들도 좀 어색해한다는 거. 그리고 한국에서의 배경으로 그룹 내의 서열이 매겨져 있기도 하다.
3. 유령족
위에서 말한 1, 2번의 유형과 달리 유학생활이 시작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사람들도 있다. 수업을 들어야 하는 학부, 석사과정에서는 유령으로 변하는 사람들이 드문데, 박사과정 학생들 중에는 발생률이 아주 높다. 초반에는 좀 보였는데, 뒤로 갈수록 공부를 하느라 그런지 숙소에서 아예 두문불출하는 거다. 원래 밤에 일하는 야행생 올빼미 족이 밤낮이 아예 뒤바뀌면서 유령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고, 한국에 애인이 있는 경우 애인의 한국 시간대를 맞추느라 현지에서는 유령이 되는 경우도 있다.
평소에는 유령이다가도 주말이나 무슨 행사가 있을 때 나타나면 크게 문제가 될 건 없는데, 유령족은 때로 이런 정보 자체를 놓쳐서 정말 고립된 생활만 하다가 유학생활을 끝낼 수도 있으니 가능하면 억지로라도 일주일에 한 번은 연구실이나 대학에 나오려는 시도를 하는 게 좋다.
자기가 유령인 줄 모르겠다면 대학에 갔을 때 동기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I haven't seen you for ages"라고 하거나, 아예 네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거나, 그러면 바로 네가 유령인 거다.
4. 이해타산 따지는 계산기 같은 사람
이런 사람 은근히 많이 볼 수 있다. 첫인상은 무척 사교성 좋고 붙임성도 좋아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꽤 많아 보인다. 그리고 주위 한국인들의 백그라운드를 대부분 꿰뚫고 있다 - 한국에서 어느 대학 다녔다더라, 어디 직장 다녔다더라, 어디 집안 자식이라더라 등등.
하긴 이런 정보는 워낙 한국인 유학생 사회가 좁은 만큼 조금만 관심 있으면 다들 알 수 있는 거지만, 이들의 특징은 그 백그라운드 정보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좀 변한다는 거다. 자기에게 유리하다 싶은 사람에게는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땐 노골적이다 싶을 만큼 질문을 하거나 정보를 얻어내려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얘기는 잘 꺼내지 않고, 도움을 받았을 때 고맙다는 말은 할지언정 호의에 대한 보답이나 대가를 지불하는 건 좀 인색하기도 하다. 그러면서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게 별로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좀 함부로 대하거나, 좀 무례하다 싶을 만큼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고. 그리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생기면, 부탁을 거절한 사람에게 악의를 가지고 험담을 하고 다니는 분들도 있으니 미리 조심하기를.
5. No Give But Take
4번의 유형에서 좀 더 앞서 나간 타입들인데, 뭘 주는 건 없으면서 묘하게 원하는 게 많은 분들이 있다. 보통 때는 수업에 잘 나오지도 않고, 도대체 뭘 하는지 학교에서 잘 보기도 힘든데, 꼭 시험 때나 에세이를 내야 할 때가 되면 연락이 온다. 시험 범위 어디냐, 이번 에세이 주제 뭐라더냐, 좀 유용한 정보 도는 거 없냐, 등등..
조별 과제 같은 게 있으면 이들은 보통 조용하다. 뭐 의견을 내는 것도 없고, 그냥 남들이 결정하는 거 듣고 있다가, 좀 쉬울 거 같은 일을 맡으려 하거나, 그게 안되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요청을 안 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자료는 보통 인터넷에 도는 것일 때가 많다. 그럼 도대체 왜 그 돈 들여서 유학까지 온건가, 싶겠지만 그건 나도 모를 일이다.
이분들은 부탁을 할 때도 참 태연하다. 그나마 좀 나은 사람들은 요즘 힘들다, 한국에 문제가 있다, 몸이 아팠다, 등등의 변명을 하려는 시늉이라도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정보를 받았거나 일이 끝나고 나면 또 잠수 탄다는 것. 그리고 정작 내가 도움을 요청하려 하면 똑같은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거나 아예 연락을 안 받는다.
6. 나 한국인 아냐
큰돈과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공부하러 온 건데 한국인들끼리만 어울리면 그건 시간 낭비, 돈 낭비다,라고 생각하는 거, 당연히 이해한다. 세상을 보러 나왔으니 이왕이면 더 많은 걸 경험하고 다른 문화를 겪어보고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그러는 게 좋다는 거, 아주 백 배 천 배 공감한다.
그런데 아주 가끔 보면 그 정도를 지나친 분들이 있다. 한국인들을 다 피해 다니고, 외국인 친구가 같은 한국인이라고 소개해줬는데도 눈앞에 있는 게 한국인이 아니라 똥이라도 된 것 같은 표정으로 거북해하는 사람. 설마 있겠어, 하겠지만 있다. 그럴 때면 소개해준 외국인 친구는 의아해하는 정도로 그칠지 몰라도, 당하는 한국인은 무안하다 못해 분노가 끓어오른다.
7. 한국인들과 영어로 대화하기 싫어하시는 분들
6번과는 반대로 한국인과는 반드시 한국어로만 대화하려는 분들이 있다. 같은 한국인인데 뭔 영어냐 싶기도 하고, 내 영어실력이 다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러워서 피하는 걸 수도 있는데, 이게 일대 일의 관계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데, 여러 명과 어울리면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케임브리지에서 유학 생활 중 Formal Hall (컬리지에서 주최하는 만찬 같은 거. 보통 정장, 드레스를 입고 가운을 입고 참여한다)에 갔다가 얼굴을 알고 있는 한국분이 다가와 한국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다른 외국인 친구들과 있었기에 일단 한국어로 인사한 뒤, 영어로 그분을 다른 친구들에게 소개해줬는데 그 후에도 그분은 줄곧 나만 보며 한국어로 묻는 거다. "요즘 잘 안보이시던데 잘 지내셨어요?", "이번에 이런 행사 있다던데 그거 가시나요?" 등등.
다른 친구들은 소개 후에도 그 사람이 영어를 하지 않고 나에게만 한국어로 말을 하니 어색해하며 침묵했고, 난 그 상황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섞으며 어떻게든 그 분과 친구들을 대화로 엮으려고 진땀이 빠졌다. 그런데 정작 그분은 그런 날보고, "영어 공부 많이 하셔서 좋으시겠어요?" 하고 비꼬더니 사라졌다.
이런 경우는 정말 난감하다. 그럴 때는 차라리 둘만 만나는 약속을 따로 잡거나,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 만나게 되면 아예 다른 사람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그냥 한국말로만 하던가.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분들 입장에서는 인간관계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발로 차는 것과 비슷하니, 다소 어색하더라도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한 명이라도 끼어 있으면 가급적 공용 언어를 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8. 너무 잘 나가서 구설수에 오르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유학 온 사람들 중에는 현지인 혹은 다른 외국인들과 물처럼 스르르 섞이는 사람들이 있다. 영어 실력을 떠나서 사교성이 좋고, 외국인 친구들도 많으며, 이것저것 하는 것도 많다. 가히 바람직한 유학생의 모습이라 할만하다.
나름 인맥이 넓기 때문에 사람들이 부탁을 하기 위해 찾는 경우도 있고, 말은 안 해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외국인과 연애라도 하게 되면 그때는 부러움을 넘어 아주 지나친 관심을 받게 될 수도 있다. 특히 어떤 관심은 도가 지나쳐 몇 명 외국 남자와 친해 보이는 여자를 향한 마녀사냥으로 번지기도 하지만.
9. 숨은 커플들
사내연애 뺨치게 비밀 연애하는 분들도 유학생들 사이에 꽤 된다. 유학 생활이 길고 힘들고 외로워서 그런지, 보통 유학생활 도중에 한국에 있는 연인과 헤어지는 경우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표면적인 연애는 계속하되 현지에 따로 애인을 두기도 한다.
한국에 둘 다 연인이 있으면서 눈이 맞아 사귄다던지, 한국에 연인이 있다는 걸 아예 숨기고 연애를 한다든지, 연애 상대가 외국인이라 숨긴다든지, 등등. 굳이 부적절한 관계라서가 아니라, 아무래도 유학생 커뮤니티가 좁다 보니 누가 누굴 사귄다는 게 인기 연예인 스캔들 뺨칠 만큼의 흥밋거리가 되기 때문에 숨기는 경우도 많지 않나 싶다.
진짜 연애지만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싫어 밝히지 않는 관계도 있지만, 육체관계가 중심이 되는 커플도 있고, 유학기간 동안만 유지되는 단발성 관계,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촌이라고 속이고 동거하는 커플도 봤다.
그냥 이런 사람들도 있더라, 하고 쓰긴 썼지만,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평범하게 공부하러 온 사람들이다. 때로 실수도 하고, 고민도 하고, 그러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그래도 아주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연고가 없는 타지라는 점, 어차피 지금 잠깐 볼 사이인데 하는 마음가짐, 다수의 외국인들 사이에 가려진 익명성 등이 때론 사람을 참 무례하게 만드는구나. 정작 한국에서는 그렇게 사람을 막 대하지 않을 거면서. 그럴 때면 그런 말도 해주고 싶다.
세상 생각보다 참 좁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