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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Oct 30. 2020

이만하면 친해진 거 아닌가요?

영국인과 친해지는 단계

학생일 때와 지금을 비교하자면 사람을 사귀는데 분명 차이가 있었다. 

유학 생활을 할 때는 영국인 친구들과 영국인이 아닌 외국인 친구들이 거의 반반이었다. 물론 친해지는 속도로 보자면 단연코 외국인 친구들이 훨씬 빨랐지만 시간이 지나니 곁에 있는 친구들의 비율이 비슷해진 거다. 대학도시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대학 출신의 친구들이 내 주위 인간관계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학생이 아니더라도 대부분 대학과 연결된 사람이 많았다. 


대학을 떠나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영국인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친해지게 되는 사람들도 영국인이 가장 많았다. 컨설팅 회사에 다닐 때는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영국인들과 가까워졌고, 대학에 있을 때에는 같은 학부에 속한 교수들, 연구 프로젝트로 알게 된 다른 학부 교수들, 그중에서도 나이대가 비슷하거나 성격이 맞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도시를 옮기고 출산을 위해 작은 마을로 이사 오면서 또 만나게 되는 집단이 달라졌다. 직장, 소속과 상관없이 그 지역에 속한 사람들. 그중 '아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는 사람들. '영국인 엄마들'.  


사실 이때가 사람들과 친해지기 제일 힘들었었다. 아이는 좋은 첫 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을지언정 지속적인 관계 유지의 매개체가 될 순 없었고, 결국은 그 사람이 나와 맞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양한 분야, 분류의 사람들과 만난 뒤, 현재 영국에서의 내 인간관계는 대학 시절 친했던 친구들 - 지금은 대다수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버렸지만 -, 예전 직장의 동료지만 친구로 남은 이들, 처음에는 아이를 매개체로 만났지만 지금은 아이가 아닌 내 친구가 되어 버린 이들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고, 대학 때 친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영국인이거나 이제는 영국인이 되어버린 친구들이다. 


물론 '친구'라고 하더라도 그 관계의 밀도가 다르긴 하다. 그리고 쌍방의 입장이 좀 다를 수도 있을 거다. 그래서 적어봤다. 영국인들과 친분을 쌓아가는 단계들. 




단계 1. 그저 아는 사이


오다가다 눈인사라도 하며 나름 아는 척해주는 사이가 다 여기 속한다. 매일이 아니더라도 너무 자주 들러 얼굴을 익히게 된 카페 종업원/주인, 도서관의 사서, 제대로 대화한 적은 없지만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 분명 내가 사는 거리 어느 곳에 살고 있는 이웃, 버스정류장에서 늘 마주치는 그 여자, 대학 주차장을 담당하고 있는 관리인, 어느 학부 소속인진 몰라도 휴게실에서 커피를 탈 때마다 종종 보게 되는 그 사람 등등... 


이 사람들과 생판 모르는 사람들의 차이점이라면, 서로를 인식한다는 거다. 만났을 때 눈인사를 하고, 어떨 땐 날씨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오늘 아침 차가 너무 막히더라는 얘기도 하며,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걱정이란 얘기도 하고, 오늘은 유달리 단 게 당긴다는 소소한 이야기도 하는 관계. 그렇지만, 서로의 이름은 알지 못하고, 뭘 하는 사람인지,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디에 사는지, 그런 개인적인 정보는 전혀 모르는 그런 관계. 


단계 2. 개인적인 정보를 주고받는 사이


의외로 단계 1에서 단계 2까지 넘어오는 건 꽤나 시간이 걸린다. 특히 영국인들과는 단계 1이 지독히도 길게 걸리기 때문에 여기서 웬만한 계기가 생기지 않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단계 1에 머물곤 한다. 단계 1에서 단계 2로 넘어가게 되는 가장 간단한 계기는 그 사람들과 다른 종류의 관계가 하나 더 생겼을 때다. 


예를 들면, 그저 얼굴만 알고 간단한 얘기만 주고받던 도서관의 사서가 알고 봤더니 나와 친한 이웃의 직장동료였다. 그때부터 우린 그 '공통분모' 하나 때문에 서로의 이름을 묻고, 그 덕에 오직 초대받은 이들만 참가할 수 있다는 영국 정부 주최의 Book Fair에도 더불어 초대받을 수 있게 되었다. 휴게실에서만 마주치던 그 사람은 다른 이의 Farewell party에서 다시 마주침으로써 서로의 이름과 소속, 사는 동네까지 알 수 있게 되었고, 버스정류장에서만 종종 보던 그녀는 몇 달 후에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내가 다니는 베이비클럽에 오게 됨에 따라 정확히 동네 어디쯤에 살고 있는지, 그 아기 외에 다른 두 아이가 더 있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유학 시절에는 같이 수업만 듣는 사이에서 다른 친구와의 접점이 생기거나 어느 파티에서 마주쳤다는 사실 만으로 갑자기 2단계로 급상승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공통분모'가 생기면 '익명'이던 단계 1의 사람들은 단계 2로 넘어가 내 머릿속에 이름별로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다. 그리고 단계 1에서 넘어가지 않더라도, 내 가까운 친구/연인/남편의 친구들/가족들, 직장동료들, 동아리 사람들, 가까운 이웃들은 이쯤에서 관계가 시작된다. 


단계 3. 개인 연락처를 주고받는 사이


개인 정보 - 이름, 직업, 대략의 사는 곳, 가족 관계 등 -를 안다고 해서 아직 친하다고 하긴 좀 이르다. 여전히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긴 좀 그렇다는 거다. 단계 2에서 더 관계가 진행되고, 서로에게 호감이 생기고, 말이 통한다는 느낌이 들고.. 그러고 나면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게 되고 개인적 관계 진행이 되면 그제야 3단계로 넘어오게 된다. 


여기까지 또 시간이 걸린다. 왜냐면 연락처를 모르기 때문에 서로 가까워질 수 있는 건 얼마큼 함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느냐에 따른데.. 유학생활 때는 이게 좀 쉬울 수 있다. 수업이나 과제를 빌미로 연락처를 물어도 되고, 같이 뭘 하자고 할 핑계는 찾으려면 넘쳐나게 많으니까. 그런데 유학 시절을 지나고 이 단계까지 오려면 두 사람의 파장이 어느 정도 맞아야 하고, 시간과 노력도 필요하다. 


학생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난 관계에서는 자신과 그 사람의 행동반경에서 서로 얼마나 자주 마주치느냐,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만들게 되는 서로에 대한 호감도가 이 단계로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단계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영국인들은 좀 소심하기 때문에 가끔은 먼저 적극적으로 대시해도 괜찮다. 다만, 성별이 다른 이들에게는 이 방법이 곧이곧대로 적용되지 않으니 이건 우리 '연애'를 논할 때 얘기하자. 


그래도 혹시 헷갈릴 수 있으니 확실히 하자면, 이성적인 감정이 없는 반대 성별 (혹은 같은 성별이라도 '연애'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섣불리 먼저 이 단계로 올라가자는 요구는 하지 않는 게 가장 안전하다. 아무리 그 사람에 대한 인간적 호감도가 높더라도, 상대방도 나와 같은 '인간적 호감도'라는 게 확인되지 않는 이상은. 일반적인 인간관계가 난이도 중의 과제라면 연애관계는 난이도 상의 문제니까. 


그럼 다시 돌아와서, 이 관계를 위해 중요한 건, 서로를 만나면서 하는 대화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가능한 많은 정보를 읽어내야 한다는 거다. 하긴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있으면 저절로 궁금해져서 묻게 되고, 상대방도 내게 호감이 있으면 어느 정도 마음을 열어서 자신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되니, 그런 걸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더 친해지는 계기로 삼는 거다. 


"새로 생긴 카페에 초콜릿 케이크 진짜 맛있다는데, 우리 이번 점심시간에 거기 안 가볼래? 연락처 줘봐, 내가 위치 찍어줄게" 뭐 그런 식으로. 


단계 4. 서로 부탁을 주고받는 사이


서로의 연락처도 알고, 취향도 알고, 대강의 성격도 파악하게 되고, 주말 스케줄도 알게 되며, 그 사람의 일상까지 대충 알게 된 후, 더 친해지는 단계는 서로 부탁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다. 이때부터는 그냥 관계에서 '마음의 빚'을 져도 괜찮은, '부탁해도 믿을 만한' 신뢰가 쌓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인들은 '부탁'에 좀 민감하거나 폐를 끼치기 싫어해서 내가 좋은 마음으로 제안해도 아직 이 단계가 아니라면 웬만한 경우,


 "Oh, thank you so much, it's very kind of you, but I should be all right. I can ask my mum/sister/brother/friend,....."등으로 정중히 거절하거나, 아니라도.. 


"I will definitely ask you next time if I really need it" 등으로 다음번을 기약하지만 그 사람이 내게 다시 부탁을 할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도 상대방이 내게 부탁을 하는 경우는, 정말 내가 필요하기 때문이고, 그런 후에도 상대방은 내게 '빚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늘 무한한 'Thank you'와 더불어 친밀도가 확 높아지게 된다. 그러면 나중에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상대방이 먼저, "If you need any help, please let me know"라며 손을 내밀어 주기도 하고. 


그러니 누군가와 더 친해지고 싶다면, 그 사람이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먼저 손을 내밀어 주고,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거나, 행여 내가 누군가에게 부탁을 요청할 일이 있으면 '감사하다'는 표현을 질리도록 해 주고, 작은 초콜릿 선물이라도 건네는 게 관계를 돈독히 하는 지름길이다. 


다만, 이 단계까지 올만큼 친하지도 않은데 정도가 넘은 부탁을 하거나, 부탁 후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하지 않는 건 관계를 도리어 망치는 지름길이니 조심하자. 반대로 내게 그렇게 해오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잘라내는 것도 괜찮고.  


단계 5. 서로 힘든 얘기, 고민도 주고받는 사이


이 정도 되면 사실 서로를 '친구'라고 스스럼없이 불러도 괜찮은 사이다. 


영국인들은 웬만해선 속 얘기를 잘하지 않는다. 매일 만나서 "How are you doing?"이라고 물으면 대부분 힘들고 피곤하고 죽을 거 같아도 "Yeah, I'm all right/ not too bad/ just tired bit" 정도로만 대답할 만큼 우울하고 힘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이 나와 차 한잔, 커피 한 잔을 하며 가족사, 개인사 등을 꺼낸다는 건 그 사람에게 내가 믿을 만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 뭐 어떤 이들은 성격이 외장형 스피커 같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알아서 판단해서 거릴 두면 된다. 물론 여기서 서로 '친구'라고 느껴지려면 상대방이 맘을 여는 그 레벨만큼 나도 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내 깊은 속내를 드러내서 힘든 얘기를 했을 때, 상대방이 별로 할 말을 못 찾고, 좀 '어색하고 불편한 기색'으로 "I'm sorry to hear that", "I can't imagine", "That must be hard" 등의 형식적인 말대꾸만 하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를 가까이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혹 어떤 이들은 정말 그런 감정교류에 익숙하지 않아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지 아닌지는 대략 며칠 지나면 반응으로 알 수 있다. 


사실 내게는 이 단계에서 다시 관계가 재정비되는 경우도 꽤 많았다. 정말 친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속마음을 열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 참담했던 경우라든지, 마치 내 약점만 잡힌 것 같아 뒷맛이 씁쓸했던 경우라든지, 아니면 다른 친구들에게는 다 말했으면서 나에게만 아닌 척한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이라든지, 등등.. 그럴 경우, 다시 관계는 그저 친한 단계 4나 단계 3이 되어버린달까... 


단계 6. 서로에게 거침없이 농담을 할 수 있는 사이 


영국인들 사이에서 '예의'란 인간관계의 기본과 같은 거다. 그래서 웬만큼 친해도 어느 정도 선을 지킬 때가 많은데, 때로 그 선이 투명해지는 관계들이 있다. 예를 들어 유학 시절부터 나와 친한 친구들과는 서로 거침없이 인종, 국가, 성별, 외모를 넘어서는 농담을 주고받지만 그걸로 서로 어색해지지도, 불편해지지도 않는다. 다른 친한 친구 S는 최근 남편과의 별거를 선언했는데, 내 첫마디는 "Well done" (축하해)였다. 거기에 친구는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고, 우린 꽤 오래 대화했다. 또 다른 친구 T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데 내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불혹을 얘기하며 성질을 긁어놓는다. 그때마다 난 T에게 "너 재수 없어"라고 얘기해주고, T는 그런 내 뿔난 모습에 까르르 넘어가며 즐거워한다. 아주 얄밉게도. 


무슨 말을 해도 인종, 언어 등의 장벽을 넘어서 그냥 '친구'처럼 느껴지는 관계. 아마도 이게 일반적 인간관계에서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단계가 아닐까.  




이렇게 적고 나니, 영국인과 친해지는 단계라는 게, 어찌 보면 연인들이 서로 처음 만나 알아가면서 서서히 가까워지는 단계와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영국인이 아니라 어느 사람 관계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다 비슷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만, 영국인의 특성상 속마음을 잘 안 열고, 상호 신뢰를 쌓기까지 시간이 상당히 걸리는 까닭에, '영국인과는 친해지기 힘들다'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래서 영국인과 가까워지려면 무엇보다 시간 투자가 필요하다. 


물론 그렇다 해도 마지막에는 네가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은가, 라는 대전제가 깔리지만 말이다. 인간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건 어차피 '너'라는 중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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