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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Oct 29. 2020

맹자도 자기 자식은 못 가르친다고 했어

벌써 몇 분째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몰라서 저러는 거면 다시 알려나 줄텐데 잘 알아들은 것 같으면서도 헤매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열심히 하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영 집중을 못하는 느낌이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한번 더 문제 푸는 방법을 알려준다. 혼자 해 보라고 두었더니 발장난을 하기 시작한다.


그때 내 안에서 뭔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난다.


됐다, 넌 오늘 공부하기는 글렀다.


책을 홱 뺏어서 덮어버린다. 너같이 열심히 안 하는 애는 공부할 자격이 없다고 소리를 꽥 지른다.


놀란 아이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문을 닫은 채로 방을 나와버린다.


그렇게 나와서 문 밖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로 서 있다.


이대로 그냥 관둬버릴까. 하다 말아버리면 안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내가 소리를 너무 질렀나. 저러다 공부에 질려버리면 어쩌지. 하기 싫다고 하면 어쩌지. 우리 애 뒤쳐지면 어쩌지.


지금쯤 울고 있으려나. 장난하고 있으려나. 문을 확 열어젖힌다.


너, 그래서 오늘 공부할 거야, 말 거야!




어느 날, 아이의 친구 엄마들을 만났다. 나처럼 아이의 공부를 직접 가르치는 그녀들과의 대화에서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의 고충이 쏟아졌다.
 
아무리 일러도 글씨를 개발새발 쓰는 아들.
공부하랬더니 책만 읽고 있는 딸.
문제를 끝까지 읽지도 않고 답을 대충 써버리는 아들.
 
이러다 내 성격 버리겠다는 엄마.
책을 던질 뻔 한 걸 꾹 참았다는 엄마.
공부시키다가 애도 울고 나도 울었다는 엄마.
 
다들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누군가가 말했다.
 
"맹자도 자기 자식은 못 가르친다고 하잖아."




자기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를 한 엄마에게서 자란 그 맹자가, 자기 자식을 부모가 직접 가르치기는 어렵다 하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어렸을 적, 어느 날 학교에서 산수 쪽지 시험을 엉망으로 봐 온 것을 아빠가 아셨다. 아빠는 저녁을 먹고 난 후 밥상에 나를 다시 앉히셨다. 지금도 수 백 명 앞에서 강의를 하시는 아빠는 그때 나를 가르치시다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때리셨다. 그리고 나 또한,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내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때 아빠의 심정을 백 번 이해하는 순간들이 몇번 있었다.
 
나는 큰 아이가 7살이 되고서 지금까지 쭉 아이를 가르치고 있다. 둘째가 지금 7살이고 공부를 시작한 지는 몇 달 되었다. 나는 가끔 우스갯소리로, 아이 넷 에게 한글과 숫자를 가르칠 정도면 나라에서 학위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도 하곤 한다.


처음부터 아이를 직접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남들처럼 학원도 보내고 학습지도 시킬 줄 알았다. 고생하며 애들 직접 가르치지 말고 남의 손에 맡기라는 말도 여러 번 들었다.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까지 직접 해보겠다고 나섰는데 쉬운 길은 아니었다.
 
사교육을 시킬 여력도, 여유도 없었기 때문에 엄마표 학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을 가르치던 입장과는 영 딴판이었다. 방금 배운 것을 금방 까먹어버리고 대답하지 못하는 아이를 보고 당장 조바심이 솟구치며 나는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 밥을 차려주는 엄마였던 사람은 선생님으로, 엄마를 부르던 아이는 학생으로 돌변하는 상황에 나도 아이도 적응해야 했다.


집안일과 피로에 지치거나 하다못해 부부싸움 후 냉랭해진 집안 분위기에도 공부는 하루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과되지 못한 짜증과 화가 이따금씩 삐져나왔고 그럴 때는 한없이 수업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럴수록 나는 내 아이를, 예전에 내가 했던 그 어떤 과외보다 비싼 과외비를 받으며 수업하는 학생으로 여기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한 번 가르쳐주면 단번에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아이를 하얀 도화지로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물론 처음부터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고 분에 못 이겨 아이를 혼내고 울게 만들고 속상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는 날을 수 없이 보내고 나서야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는 수 개념과 한글을 익혀 보내는 것에 급급했고 수 십 권의 비슷한 수준의 책을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나서야 학교 가서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몇 학년씩 선행학습을 하는 다른 아이들을 쫓아갈 생각은 언감생심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가르칠 자신도, 아이에게 감당시킬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한 학기 정도를 미리 예습하는 정도로 매일 공부시켰다. 비싼 학원을 보내줄수도, 비싼 학습지를 시켜줄 수도 없었지만 적어도 매일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이를 옆에 앉혀두고 책을 폈다.


7살부터 그렇게 공부를 시작해 이제 9살이 된 큰 아이는 이제 혼자서 공부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둘째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형 옆에 앉아 흉내를 낸다. 남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공부가 재미있다며 어려워도 끝까지 해내겠다고 아이가 말하는 정도에 나는 만족하기로 했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둘째는 얼마 전에 한글을 뗐다. 둘째가 5살이었을 때 큰 아이를 공부시키면서 함께 시켜볼 요량으로 같이 앉혔다가 공부할 준비가 전혀 안 된 것만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쫓기듯 한글과 숫자를 가르쳤더니 2년 동안 열심히 영근 둘째는 둘째대로 큰 형과 본인을 열심히 견주어가며 해내고 있다. 한편으로 큰 아이를 가르치다가 모두 소비해버린 내 열정은 좀처럼 다시 충전되지 않고 있다.
 
그렇게 가르쳐야 할 아이가 둘이 남아있다. 나머지 아이들은 큰 형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며 자랄 것이고 나는 여지없이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목전에 앞둔 상태가 되어서야 허겁지겁 학교에 보낼 준비를 할 것이다. 그 이후의 교육방침은 아직 계획해두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강사라는 직업으로 살아온 시간보다 엄마로 산 시간이 더 많아진다. 지나친 사교육으로 얼굴에 그늘이 진 아이들을 꽤나 많이 보아온 나는 그래서인지 내 아이를 사교육의 장으로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의 공부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들엔 귀를 크게 열어놓고 안 듣는 척 듣고 있다. 자기 자식이 뒤쳐지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내 아이의 행복도 무엇보다 소중하다. 나는 그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외줄 타기를 할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나의 전직이 선생님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젠가 아이들이 물었다.


"엄마는 그래서 우리의 엄마예요, 선생님이에요?"


맹자 왈, 관계와 가르침이 충돌할 때는 관계를 선택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꼭 안으며 말했다.


"너희를 가르치는 엄마지, 자, 공부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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