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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Oct 12. 2020

요즘도 글 쓰나?

그날도 한 바탕 전쟁 같은 저녁 시간을 보냈다. 매일이 다를 것 없는 대식구의 끼니는 준비과정부터 만만치 않다. 차려놓은 음식을 무섭게 먹어 치우는 아이들을 보며 남편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들을 굶기는 부모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결의 비슷한 것을 하기도 한다.


얼추 배를 채운 아이들은 나란히 TV 앞에 조로록 앉았고 나는 설거지를 했다. 핸드폰에 하릴없이 틀어놓은 영상을 흘끔흘끔 보며 기계적으로 그릇을 닦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고무장갑을 벗고 전화를 받았다.
                              
“저녁은 먹었어?”
“응, 먹었지. 시간이 몇 신데.”
“애들도 밥 먹었고?”
“당연하지. 미역국에 한 대접씩들 말아 드셨다.”
“좀 이따 들를게.”
 
그새 TV에 푹 빠져 있는 아이들에게 삼촌이 온다고 했더니 소파에서 방방 뛰고 난리들이 났다. 며칠 째 사람 구경, 바깥구경을 하지 못한 아이들은 그저 신이 났고

나는 좀 있으면 아이들이 잘 시간인데 오늘은 한참 늦어지겠구나 하는 생각만 얼른 들었다.
 
얼마 있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고 동생이 왔다. 막내를 제외한 아이들은 모두 삼촌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다. 낯을 가리기 시작한 막내는 멀찌감치 떨어져 쳐다보다가 나에게 와서 안겼다. 저녁을 먹었냐고 물으니 아직 안 먹었다고 한다. 내가 해주는 음식을 꽤 맛있게 먹어주는 편인 동생에게, 이미 주방은 마감한 후이지만 기꺼이 저녁을 차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동생은 벌써 아이들에게 피자 먹을래, 치킨 먹을래 라고 묻고 있었다. 고봉으로 밥을 먹은 아이들인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먹겠다고 야단들이다. 평소 같으면 말렸겠지만 그냥 뒀다. 말린다고 들을 분위기도 아니었고, 말렸다가는 그저 산통을 깨는 잔소리쟁이만 될 뿐일 것 같았다.
 
피자와 치킨을 주문한 삼촌에게 아이들은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하나는 왼쪽 팔에, 하나는 오른쪽 팔에, 또 하나는 두 다리 옆에 따악 붙어 있었다. 막내는 나에게 안겨 삼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동생은 그렇게 온몸에 아이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멧돼지와 코브라가 싸우면 누가 이기냐 같은 질문에 끝없이 대답했다.
 
음식이 도착하고 상이 또 차려졌다. 이미 저녁을 두둑이 먹은 터라 안 먹는 게 낫겠다 싶어 앉지 않고 있었더니 동생은 같이 앉아서 먹자고 붙잡아 끌었다. 못 이기는 척 앉아서 집어 먹으며 아이들을 보니 이 아이들에게 내가 과연 저녁을 먹인 것이 맞는가 싶었다. 잘 저녁에 너무 많이 먹는다며 잔소리가 또 슬몃 나오려고 하니 남편이 오늘은 그냥 맛있게 먹자고 한다. 동생 하나만 늘었을 뿐인데 평소보다 배는 북적거리는 식탁에서 아이들이 뱉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 동생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을 보니 구겨진 마음이 조금 펴지는 것 같다는 안 어울리는 소리들을 했다.
 
저녁을 안 먹은 아이들처럼 맛있게 한참 먹던 아이들은 어느 순간 손을 놓고 다시 TV에 열중했다. 어른들만 남은 식탁에서 동생은 나에게 불현듯 물었다.
 
“요즘에도 글 쓰나?”





한 번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써서 엄마에게 보여 드린 적이 있었다. 내 기억을 엄마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 엄마는 그 글을 동생에게 보여줬고 동생은 작고하신 박완서 선생님의 느낌이 좀 난다는 평으로 나를 웃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글을 쓴 나에게 동생은, 사는 것이 어지간히 대간한지 왜 이렇게 옛날 생각만 하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풍족하고 여유 있는 시절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때의 우리는 세상의 모든 시름은 어른인 부모님에게 맡긴 채로 어린 아이들의 삶만 살면 되었다. 이제 그 시름들을 마주하며 나이가 든 남매는 예전의 기억을 함께 떠올릴 때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 세월에 적지 않은 서러움이 들기도 했다.
 
요즘에도 글을 쓰냐는 질문에, 나는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실 요 며칠은 글을 쓰지 않았다. 이렇게 쓰지 않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쓸 수는 없었다. 쓸 것이 없었다기보다 쓰고 싶지 않기도 했고 써서는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글을 쓰지 않은 시간 동안 그렇게 어느 감정 하나로 표현할 수 없는 망설임에 주저주저하고 있었다.
 
“안 썼어. 우는 소리만 하게 되길래.”
 
언제부턴가 내가 쓰는 글에서는 우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나 이렇게 힘드오, 나 이렇게 괴롭소 하며 글을 읽는 이에게 보채듯 하는 글이 계속 써졌다. 어찌하여 내 글은 이렇게 징징대고 있는가 싶었다. 내 환경과 상황이 문제인가 내 마음이 문제인가 내가 내 글을 읽고서 마음이 답답해졌다. 읽는 이를 너무 배려하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가 그런 글을 읽고 싶겠어. 허구한 날 죽겠다고 우는 소리만 하는데.”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뿔싸, 나는 지금도 동생에게 우는 소리를 하고 있다. 나는 금세 삐뚜름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행복에 겨워 죽겠을 때나 다시 써볼까.”
 
동생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계속 써봐, 읽고 싶으니까.”
 
행복에 겨워 죽겠을 때라는 것은 내가 말하면서도 대관절 그게 언제일지 알 수 없을 만큼 허무맹랑해서 금세 겸연쩍어졌지만 눈도 마주치지 않고 건넨 동생의 한 마디는, 죽겠다고 우는 소리를 해도 언제든지 들어주겠다는 따뜻한 위로처럼 들렸다. 우리는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피자와 치킨을 마저 더 집어 먹었다.


어렸을 적 일을 시작한 엄마가 늦으시던 어느 날, 바람에 창문이고 현관문이고 흔들거리던 깜깜한 밤에 5살 배기였던 동생은 겁에 질린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부엌으로 다다다 뛰어갔다. 다시 다다다 돌아온 동생의 두 손에는 국자와 뒤집개가 들려있었다.


"도둑이 들어오면 내가 이걸로 혼내줄게."


그렇게 엄마가 들어오실 때까지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기다렸다. 동생과 나는 내가 9살이 될 때까지 한 방을 같이 썼다. 방 두 칸짜리 에서는 별 수가 없었다. 방 세 칸짜리 집으로 이사를 갔을 때 나란히 마주 보는 작은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도 며칠은 내 방에서 같이 잠을 잤다. 동생 하고는 마이클 잭슨이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함께 즐겨 듣곤 했는데 하나밖에 없는 카세트로 이어폰 하나씩을 사이좋게 꽂고 잠이 들었다.


이제는 서로를 지켜줄 일도, 함께 나누고 견뎌내야 하는 일도 없이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지만 가끔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내게 부모님은 더없이 편하게 지내고 계시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는 동생에게 나는 눈물이 날 만큼 고맙다.


결혼하기 전 밤새 음악이야기와 영화 이야기를 하며 보냈던 시간들의 흔적들은 아직도 친정집의 동생 방에 남아있다. 그때 보고 들었던 CD와 DVD도, 책들도 모두 그대로다. 가끔 동생의 차를 얻어 타면 그때 들었던 음악이 흘러나온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추억한다.


행복에 겨워 죽겠을 때가 오지 않더라도, 나는 충분히 쓸 거리가 있다. 우는 소리만 나오는 글이라도 함께 읽고 울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참 든든하고 배가 부르다.


나는 요즘 글을 쓰고 있고, 또 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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