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모임에서 알게 된 지인들과 모여 점심을 먹는 중에 회사를 운영하는 한 분이 모임의 다른 분과 같이 일하게 되었다고 하자 내가 “축하드립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인연이 행운을 만들어요. 우리가 이렇게 만나니 얼마나 좋아요.”
아래는 집 근처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고 나오면서 장모님이 한 말씀이다. “장안동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자네를 소개해 준 친구고 다른 한 사람은 영숙이라고 해. 그 두 사람이 보고 싶은데 연락처가 어디로 가버리고 없어. 그들과 친했던 친구는 이제 세상에 없고."
최첨단 통신시스템의 혜택을 누리며 사는 우리도 연락 두절로 만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드라마의 필름 속 한 장면이 가위로 쓱싹 잘려 나가 버린 것처럼 말이다. 나는 청년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며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아름다운 이들과 인연을 맺는 것은 큰 행운이요 감사할 일이다.
한 쇼핑센터에 갔었을 때였다. 그때까지 들어오지 않았던 한 유명 브랜드명이 삽시에 추억의 빛으로 본체 이탈을 하더니 내 홍채와 망막을 지나 내 마음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주저 없이 핸드폰의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유학 시절 재즈 피아노에 호기심이 발동해 야마하 음악교실 문을 두드리고 알게 된 재즈 피아니스트가 떠올랐다. 그가 공연차 한국에 왔을 때 대학로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했던 이네다 선생과 그의 연인 안무가. 약사였던 그는 피아노가 좋아 30세가 되던 해에 1년 동안 방 안에 박혀 건반에 인생을 걸었었다고 했다.
“화장실 갈 때 외에는 방안에만 있었지. 밥도 방에서만 먹었어. 손에 마비가 와서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연습했어. 그때는 정말 목숨 걸고 했었지.”
그가 내게 해 준 인생담이다. 30년도 넘었지만 또렷이 내 추억의 방에 그대로 있다. 그의 집에도 가끔 초대받아 가곤 했었다. 영검의 시간을 두고 만나지 못함에 순간 울컥하며 ‘언젠가는 꼭 만나야지’라고 다짐도 해 본다.
한국이 좋다며 한글을 배우고 싶다고 내게 한글 선생님이 되어 달라던, 내가 다니던 일본학교의 나까쯔르 선생님. 지금쯤은 아마 70세 정도 되었을 그분과 쌓았던 추억의 대화 중 아직 머리에 남아 있는 일부를 소개한다.
“김상! 내게 한글 좀 가르쳐 주실래요?”
“네. 그럼요.”
“일주일에 한 번 어떠세요?”
“네. 매주 토요일 어때요?”
“좋아요.”
워킹맘이었던 그분은 늘 밝게 웃고 다녀서 학생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하루는 안부 전화를 했더니 신주쿠의 일본어학교로 옮기셨다고 하며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해서 만났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면서 한국 드라마가 재미있어 푹 빠져 산다고 하셨다. 늘 그랬듯이 그때도 밝게 웃으셨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긴자에서 아르바이트하던 곳의 매니저와 재일 교포아주머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좋은 학점에 장학금까지 받는 내가 참 자랑스럽다며 유난히 따르던 후배 녀석, 내 모습에 자극받아 영국으로 유학 갔다고 편지를 보내왔지만 답장을 못한 일본인 후배 여학생, 자기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살짝 귀띔해 주었던 규슈 출신 일본인 친구. 이들과의 아름다운 추억은 거실의 블라인드 틈 사이를 투사하며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과 일체가 되어 나를 반긴다. 결혼 전 부모님 집에 남겨 두었던 이들의 연락처가 담긴 수첩이 어디론가 가버렸다. 잘 챙기지 못한 내 잘못이다. 다시 만날 수 없겠지만 생각나면 따스한 온기가 온몸에 전해지며 내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는 사람들이다. 그저 모두가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내일은 친구와 점심을 하기로 했다.
소중한 날이다.
예전에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내게 너무 잘해주었는데 그때 그것을 몰랐네. 그저 같이 웃고 하면서 즐겁게 놀던 친구들에게만 신경이 가고 그에게는 소홀했어. 지금 생각하면 익숙해져 버린 소중함을 몰랐던 거지."
그러자 내가 이렇게 물었다.
"그 친구와는 연락해?"
그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지..."
이런 경험이 그에게만 있는 것일까.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생활하는 우리. 어쩌면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릴지도 모를 것들에만 집중하다가 진정 소중한 것들에는 소홀하며 지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는 하루가 되길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