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온다

by 김곤

샤워를 할 때마다 천천히 하려는 마음의 소리와 드잡이해 보지만 잘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도 서두르는지 모른다. 느긋하게 하려고 매번 마음을 먹는데도 잘 되질 않는다. 회사에서는 점심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해치우기 십상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 24시간,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오롯이 우리들의 몫이다.




노을이 온다.

따스하다.

설렌다.



운전대를 아내에게 건넨 지 20년이 되어가는 요즈음, 인스타를 한 후로 달리는 차 안에서 찰나의 순간에 휴대폰을 누르는 일이 있다. 그때는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순간을 포착하며 휴대폰의 버튼을 누른다.


어제다. 박명에 집으로 가는 길이다. 여물어가는 감빛 노을이 온다. 아름답다. 나는 설렌다. 그를 휴대폰 속에 담고 싶은 마음이 피어오르는데, 자동차의 속도가 빨라 삽시에 그가 멀어지려고 한다. 놓치고 싶지 않다.


휴대폰에서 퍼져 나오는 찰칵 소리가 아내의 운전에 방해가 되면 안 된다. 여러 번의 기회가 없다. 재빠르게 버튼을 눌러야한다. 첫 번째 컷을 누른다.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 화면을 살핀다. 마음에 안 들어온다. 다시 그를 담기위해 고개를 올려본다. 차가 달린다. 그는 나의 눈에서 멀어진다.


잠시 후다. 다시 그가 보인다. 재빠르게 휴대폰 버튼을 누른다.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다짐으로.


고개를 숙여 휴대폰 화면을 다시 살핀다. 설레며.


마음에 들어온다.

신호등 앞에 차가 멈춘다.

아내에게 보여주며 말한다.

괜찮다. 그렇지.


....응. 좋네.


차는 다시 달린다.

목적지로....




삶에서 우리는 숱한 결정의 순간을 맞는다.


아침이다.

일어날까....아니 조금만 더 자고.....뒤척이다가 다짐한다. 일어나야하는데....라고.

침대에서 일어난다. 화장실로 간다. 양치질을 하고 부엌으로 간다. 컵에 물을 따르고 한 모금 마신다.

오늘 아침은 무엇을 먹을까.....밥그릇에 계란후라이, 낫또, 저민 아보카도를 넣고 비빈다.

오늘은 어떤 옷을 입고 나갈까. 저녁 메뉴는....내일 모임은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올라오는 순간이다. 식탁 위에 단호박이 보인다. 단호해야 한다. 후회 없이, 라는 생각이 부유한다. 단호박 같은 사람처럼.


미적거리다 놓아주는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1981년 가을이다. 교실이다. 담임선생님이 들어온다. 손에는 검정 노트가 있고 그 사이에는 언제든 사용 가능한 조그맣고 적당히 기다란 나무 막대기가 끼워져 있다. 칠판 바로 앞 탁자에 노트를 살포시 올리고 그가 말한다. "2학년 때 문과반을 갈 것인지 이과반를 택할 것인지 택해야한다. 각자 적성과 대학에 가서 전공하고 싶은 과목을 고려하여 결정하기 바란다." 그가 교실을 나가고 교실 안이 술렁인다. 다음해에 우리들은 긴장의 설렌 봄을 맞이한다. 각자의 길에서. 누구는 망설임 없이, 누구는 어찌할지 모르며.


1986년 어느 여름날이다. 강남의 영동시장 건너편에 있는 한 음악다방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에 통유리로 된 커다란 유리박스가 보인다. 박스 안에는 디제이가 앉는 의자가 있고 그 앞에는 양 옆으로 턴테이블이 놓여있다. 가운데는 마이크와 음향시설이 뒤편에는 LP가 사각형 나무 박스 안에 알파벳순서로 진열되어 있다.


오후 2시 10분 전이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간다. 시그널 음악이 들어있는 LP를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집어 한쪽 턴테이블에 살포시 올린다. 이어폰을 귀에 대고 음악의 시작점에 바늘을 정확하게 멈춘다. 다시 뒤를 본다. 첫 음악이 들어있는 판을 집는다. 처음처럼 반복하고 의자를 고쳐 앉는다. 유리 밖을 본다. 군데군데에서는 담배연기가 춤을 춘다. 시그널 음악을 돌린다. 턴테이블 LP가 조용히 돌아간다. "안녕하십니까. oo입니다. 오는 길에 비가 내리더군요. 이러한 날에는 친구, 연인들과 파전에 막걸 리가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화 함께 하는 동안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첫 음악 듣겠습니다. 레인앤티얼스입니다."


1989년 봄, 늦은 밤이다. 일본 시부야에 있는 한 맨션의 방 안이다. 라디오 방송에서 디제이의 음성이 요란하게 방 안을 울린다. 그는 일본어와 영어를 혼합해가며 멘트를 날란다. 한국말로만 들었던 나로서는 생소하지만 설렌다.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방송국에 들어가면 이러한 방송을 해봐야겠네.....




1990년 일본이다. 대학에 지원서를 제출한다. PD를 하고 싶다. 실기 위주의 수업으로 유명한 일본대학에 지원해야한다. 아니다. 일반대학 신문방송학을 가면 된다. 두 길을 두고 망설인다. 최종 선택은 일반대학으로 한다. 지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른다. 합격자 발표 날이다. 걱정의 설렘을 안고 학교로 간다. 게시판이 보이는 건물 쪽으로 간다, 사람들이 몰려있어 발꿈치를 올려 본다. 직사각형의 길고 커다란 하얀 종이 위에 합격자의 수험번호가 가로로 나열되어 있다. 나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인다.


......보인다.

따스하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불어온다.

겨울바람이

따뜻하다.

설렌다.

오늘처럼.



2025년 겨울, 새벽이다.

감빛 노을이다.

그를 마음에 품는다.

설렌다.

따뜻하다.

시간이 불어온다.

마음에서 용기가 올라온다.

새로운 알을 품는다.

허공에 부유하는 언어들을 불러 모은다.

발걸음을 멈춘다.

휴대폰의 메모장을 연다.

알갱이들을 조각한다.

설렌다.

따스하다.


새벽을 업고 걷는다.

운동장이 보인다.

사람들이 보인다.

누구는 걷고 누구는 달린다.

각자의 삶처럼.


2025. 4. 15. 수정

사진: 김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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