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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yton Jan 04. 2020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2017 월드시리즈 2차전 (2017.10.26)

2017 월드시리즈 2차전, 연장 10회 초 마운드에 오른 조시 필즈가 호세 알투베, 카를로스 코레아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하는 순간 게임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1:3으로 뒤져있던 경기를 끈질기게 따라붙어 9회 3:3 동점을 만들며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10회 초 홈런 두 방으로 순식간에 5:3으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의 명언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를 속으로 되뇌며 기적을 바랄 뿐이었다.


당대 최고의 마무리 데니스 애커슬리를 상대로 1988년 월드시리즈 1차전 극적인 대타 끝내기 홈런을 기록한 커크 깁슨


1988년 오렐 허샤이져, 커크 깁슨(절뚝이는 다리로 다이아몬드를 돌면서 펼친 어퍼컷 세리머니로 유명하다)을 앞세워 LA 다저스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 후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다저스는 월드시리즈 무대를 다시 밟지 못했다. 1986년에 태어난 나로서는 2017년이 응원팀의 월드시리즈를 구경할 수 있는 실질적인 첫 기회였다. 내 나이 겨우 세 살 때 벌어진 월드시리즈는 그저 가끔 중계중에 나오는 예전 영상으로 분위기를 짐작만 할 뿐이었다.


초중고 시절을 거쳐 다저스 팬으로 쭉 자라온 나는 야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잠시 접고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돌이 갓 지난 딸이 있었고, 둘째 아이를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와이프도 있었다. 현실적으로 2017년 월드시리즈 직관을 하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한 선택이었다.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많았고, 하나 같이 해결하기 쉽지 않은 과제들 투성이었다.


아마 와이프의 통 큰 지지가 없었더라면 내 생애 첫 월드시리즈, 그것도 응원팀의 월드시리즈 직관이라는 화려한 추억은 없었을지 모른다. 야구를 보기 위해 신혼여행지를 미국으로 선택할 정도로 나는 야구에 미쳐있었고, 야구는 내 삶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런 나의 삶을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봐 온 와이프 입장에서는 허락을 쉽사리 해주기도, 그렇다고 허락하지 않는 것도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00년이 넘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하는 팀도 있는데, 살아 있는 동안 월드시리즈가 또 온다는 보장이 있겠어? 대신 이번이 마지막이야. 나도 두 번은 자신 없어."


와이프의 허락 이후 나의 월드시리즈 직관 프로젝트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LA 왕복 항공권을 예매했고 스텁허브에서 월드시리즈 1차전, 2차전 표를 예매했다. 회사에는 3박 4일의 짧은 휴가를 냈고, 딸아이는 부모님께 잠시 부탁드렸다.


고된 일정이었다. LA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 새도 없이 다저스타디움으로 향했고 월드시리즈 1차전을 직관했다. 29년 만에 LA 홈에서 열린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는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의 7이닝 역투를 앞세워 3:1로 승리하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1차전 승리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음 날 같은 장소에서 2차전이 열렸다.



2차전 역시 다저스는 순항했다. 0:1로 뒤져있던 다저스는 5회 말 작 피더슨의 솔로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었고, 6회 말에는 코리 시거의 투런 홈런이 터지며 3:1로 경기를 뒤집었다. 당초 선발 매치업(다저스 리치 힐-휴스턴 저스틴 벌랜더)에서 밀린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의외의 결과였다.


승부에 조금씩 암초가 드리우기 시작한 건 8회 초였다. 다저스는 경기 초반 고전했지만 안정감을 찾아가던 선발 리치 힐을 4이닝 만에 교체하는 초강수를 뒀고, 그 결과 마무리 켄리 젠슨을 8회 초부터 마운드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다저스는 이상하리만큼 포스트시즌에서 리치 힐을 일찍 강판시킨 후 경기가 꼬이기 시작했다. 2018년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월드시리즈 4차전 역시 그랬다. 도날드 트럼프 미 대통령까지 트윗으로 이러한 결정을 내린 다저스를 비판하기도 했다.


2017 월드시리즈 2차전도 마찬가지였다. 8회 초 카를로스 코레아에게 적시타를 내주며 조금씩 불안감을 키우더니 9회 초에는 선두 타자 마윈 곤잘레스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하며 동점을 내주고 말았다.


다시 연장 10회 말. 10회 초에 홈런 2방을 내주며 리드를 뺏긴 다저스는 패색이 짙었다. 야시엘 푸이그가 추격의 솔로 홈런을 날렸지만, 야스마니 그랜달과 오스틴 반스가 삼진으로 물러나며 순식간에 2사에 몰렸다. 경기 종료까지 아웃카운트 한 개.


로건 포사이드가 휴스턴의 마무리 켄 자일스에게 풀카운트 승부 끝에 볼넷을 얻어내며 불씨를 살렸다. 다음 타석의 주인공은 시카고 컵스와의 NLCS 5차전에서 혼자 홈런 세 방을 터뜨리며 다저스를 월드시리즈로 견인한 키케 에르난데스였다.


켄 자일스의 와일드 피치로 포사이드는 2루까지 진출, 2사 2루를 만들었다. 2사 이후였기에 짧은 안타 하나면 충분히 5:5 동점을 만들 수 있는 상황. 침착하게 볼을 골라내며 유리한 볼카운트를 만든 키케 에르난데스는 자일스의 바깥쪽 패스트볼을 그대로 밀어쳐 1루와 2루 사이를 갈랐다. 그 사이 포사이드가 홈을 밟으며 승부는 다시 5:5 동점!!!


연장 10회 말 동점 적시타의 주인공 키케 에르난데스


다저스타디움에 모인 5만여 명의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2루에 도착한 에르난데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다. 패배의 공포에 직면해 침묵에 빠졌던 다저스타디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2017 월드시리즈 2차전 가장 극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다저스는 이어진 연장 11회 초에 조지 스프링어에게 투런 홈런을 허용하며 다시 리드를 휴스턴에 내줬고, 리드를 다시 찾아오지 못했다. 11회 말 찰리 컬버슨이 추격의 솔로포를 날렸지만, 경기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월드시리즈 직관이라는 꿈같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쉬운 2차전 패배를 뒤로 하고 나는 다시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월드시리즈 2차전 키케 에르난데스의 극적인 동점 적시타를 본 것만으로도, 그 순간 다저스타디움의 뜨거운 분위기를 만든 일원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살면서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며 또 한 번 스스로 다짐하게 된다. 절대 포기하지 말자. 끝날 때까지 절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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